124화 다시 백두산으로 6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용어들에 질려버려 얼굴이 노랗게 익어갈 때 즈음, 찬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 마나 홀? ‘
‘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차원 통로? ‘
‘ 잠깐만!! ‘
‘ 그럼 지금 지구에서 생성되고 있는 게이트도 일종의 차원 통로가 아닐까? ‘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 혹시 게이트란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 자네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게이트 말인가? “
찬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맞네. 그것도 일종의 차원 통로라네. “
“ 정확히 말하면 연맹 놈들이 지구와 다른 차원 세계를 인위적으로 연결되도록 한 차원 통로라고 해야겠지. “
어찌 된 일인지 찬희의 질문에 대답하는 노인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 지금 지구와 연결되고 있는 이세계는 모두 마왕 군에 의해 멸망한 세상이거나 하나의 차원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진화한 모습이네. ”
“ 차원 동맹은 그렇게 마왕에 의해 멸망되고 버려진 세상을 또는 부정한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세계를 지구와 연결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인간들의 능력치를 끌어올려 자신들의 일원으로 만들려고 하지. “
“ 한마디로 장기판의 졸(卒)로 만들려는 속셈이야. “
구겨져 있던 노인의 얼굴에는 어느새 노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느긋하던 말의 텐션은 조금씩 올라가고 눈에는 사무친 원망의 빛이 역력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찬희의 기억 속에는 고대 인류가 멸망할 때 우주 연맹의 도움 따윈 없었다.
아마 그 원한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듯했다.
“ 차원 동맹을 너무 믿지는 말게나. ”
“ 잘못 진화하여 오염된 세상도 원래부터 그런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
“ 하나의 세상은 자연스러운 진화를 거쳐 상위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지.. 이건 창조주의 의지이자 자연의 섭리라네. “
“ 하지만 진화의 시간은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어떤 세상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에 반해 어떤 세상은 진화의 시간이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가기도 한다네. “
백발의 노인은 잠시 말을 끊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찬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비단 찬희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생 인류, 자신들의 후손에 대한 걱정이었다.
“ 슬프게도 현생 인류는 고대인과는 달리 마나에 친숙한 존재들이 아니라네. “
“ 고대인의 멸망과 함께 역사는 단절되었고, 그 과정에서 마나를 다루는 능력까지 모두 사라졌지. 그런 단절의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된 결과 지구의 대기 중에서 마나가 사라지게 되었어. “
“ 뭐, 지금은 차원 병합을 통해 다시 마나가 유입되고는 있지만, 절대 맹신하지 말고 조심해야 하네. “
고대 문명이 멸망하고 한동안 지구에는 문명이 없는 암흑의 시간이 흘러갔다.
문명의 흔적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졌고, 문명의 존재를 밝혀줄 증인들은 모두 죽임당하거나 어딘가로 끌려가거나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의도적으로 단절되었던 문명이 다시 시작은 되었지만, 인류의 발목에는 종족값 최하라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 자네는 마나가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알고 있나? “
찬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기연을 통해 마나를 받아들이게 되어 축적하며 사용을 하고는 있지만, 이 힘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용하고 있었네.. ‘
“ 그럼, 혹시 마나가 폭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나? “
뒷머리를 강타하는 충격이 울려왔다. 이제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나는 우주의 초월적인 에너지, 상위 존재들이 사용하는 힘의 근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사용해왔을 뿐,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만약 기가 폭주를 하면 어떻게 되나? “
“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겠지. “
“ 그럼 마나가 체내에서 폭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또다시 찬희의 뒤통수가 뜨끔해졌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마나를 사용하고 있던 찬희에게 마파람의 질문은 충격적이었다.
“ 자네가 보아왔던 이 세계의 괴물들, 의지가 상실된 채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무한한 증오를 보이며 공격해 오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이 한때는 마나를 사용하던 선한 생명체였다면..”
이 말을 끝으로 노인은 말없이 찬희를 응시했다.
“ 그~그럼..! ”
“ 맞네. “
“ 자네가 보아 온 이 세계의 괴물들 중 일부는 체내의 마나가 폭주하며 이지를 상실하게 되어 파괴 본능만 남은 괴물이 된 거지.. “
“ 그럼 다시 묻겠네. “
“ 자네는 마나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노인이 던진 말은 큰 파문이 되어 돌아왔다.
기(氣)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라고 한다면 도대체 마나는 어떤 것일까? 문득 척준경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는 마나가 우주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이라고 말했지만, 너무 모호한 말이었다.
찬희는 마나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
초월적 힘..
초월...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빛처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 혹시,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해 발생한 힘인가요? “
노인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찬희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는 마치 사랑스러운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의 미소와도 같았다.
“ 과연, 영특하구나! “
“ 우리 신인족의 홍복(洪福)이 틀림없구나~ 허허허 “
찬희로써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 마나는 태초의 힘의 잔재(殘在)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 “
우주는 빅뱅이란 거대한 폭발로 창조되었다. 그럼 그 빅뱅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 미증유의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기원한 것일까?
태초에 홀로 존재한 단 하나의 빛.
그 빛으로부터 기원한 빅뱅으로 천지는 창조되었고 그 빅뱅의 에너지는 전 우주로 퍼져 나갔다. 우리가 마나라고 부르는 힘의 정체는 바로 빅뱅 후 우주로 퍼져 나간 태초의 힘의 잔재였다.
“ 그런 절대적인 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친숙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고 몸에 축적한다면 반드시 불행한 결과를 가지게 된다. “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대해 더 많이 듣고 싶었지만, 노인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백발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 이런! 인사말이 너무 길어졌군. 자네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네. “
“ 무엇입니까? “
고대 임금인 신웅의 힘을 이어받은 찬희는 마파람에 대해 마음의 짐을 느끼고 있었지만,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어떤 골치 아픈 일에 엮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게 도와준 신웅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고분고분 말을 듣는 중이었다.
“ 좀 전에 보아하니 자네 오행신공을 익히고 있더군. 하면, 봉황진기 또한 익히고 있지 않은가? “
“ 네. 두 무공은 저희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 무술입니다. “
“ 오~ 역시 그랬군! “
“ 럼 내 한 가지 더 물어보겠네.. 이 대답 여하에 따라 자네와 나의 관계는 변할 수 있을 걸 세. “
“ 오행지기들이 이미 오행신수(五行神獸)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데, 자네 혹시 진기 구슬도 흡수한 건가? “
“ 네.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
“ 신수는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지. 신수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진기의 양과 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지. 즉, 자네가 가지고 있는 진기의 양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탁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면 신수로써 진화하기에는 힘이 들어. “
찬희의 대답을 들은 마파람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드리웠다.
하지만 기뻐하는 마파람과는 달리 찬희의 얼굴은 묘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신웅의 기억이나 진기 구슬에 대해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상대가 먼저 물어보자 더 이상 모른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은인을 뵙습니다. 고찬희라 합니다. “
찬희는 그제야 인사를 하며 이름을 밝혔다.
하지만 찬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파람은 사람 좋은 미소를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 고씨라··· “
“ 내 1500년 전에 만주 땅에 살던 고씨 성을 가진 영특해 보이는 아이에게 봉황진기랑 오행신공을 전수해 준 적이 있지. “
“ 그 아이의 후손인 게로구나. 하하하 “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자신의 가문에 무공을 전수한 귀인이 바로 마파람이란 소리였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엮여버린 찬희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행여나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도움을 준 것을 빌미로 무언가 골치 아픈 일은 요구할까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 근데 어르신은 정말 사람입니까? “
“ 아무리 고대인들이 상위 종족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살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
“ 그리고 좀 전에 분명 소멸까지 당하셨는데, 어떻게 살아계시는 겁니까? “
찬희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마파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궁금증을 이야기했다.
“ 내.가. 아.직.도. 사.람.으.로. 보.이.나? “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백발의 노인 주위에 회색빛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산한 바람까지···
반전을 위한 무대 장치는 완벽했지만···
“ 아~ 장난치지 마시고요. ”
정색을 하며 화까지 내는 찬희에 의해 마파람의 회심의 일격은 물거품으로 끝이 났다.
“ 으~음, 몇 년 전 TV 예능에서 이렇게 놀던데? “
“ 요즘은 안 좋아하나? 트렌드가 바뀌었나? ”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마파람은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색이 돌아와서는 점잖게 찬희를 바라보았다.
이 양반도 살짝 정상은 아닌 듯했다.
“ 근데 나, 정말 사람 아니다. “
“ 자네가 말한 대로 인간이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살 수가 있었겠나! “
“ 지하에 있는 수하들 봉인시키고, 혼자 세상을 떠돌다가 후에 정령이 되었다네. ”
“ 자네도 알잖나? 오행신공 익히면 정령과 친화도가 올라가는 거. 오래 살다 보면 정령이 될 수도 있다네. 크크 “
“ 아 그리고 자네가 소멸시킨 건 나의 분신이라네. 신경 쓰지 말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 “
신경 안 쓰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마파람은 신인족을 봉인한 후 인지할 수조차 없는 오랜 시간,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마왕의 세력이 신인족들을 학살할 때도, 자신들의 문명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릴 때도 조용히 숨어 그것들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그렇게 혼자 세상을 떠돌다 마왕군을 피해 살아남은 얼마 남지 않은 신인족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유전자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살피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사실 고찬희의 집안 또한 살아남은 신인족의 후손으로 영특했던 찬희의 조상이 마파람의 눈에 들어와 오행신기와 봉황진기를 전수받게 되었는데, 훗날 찬희의 조상은 바로 한민족 최강의 정복 군주가 되었다.
“ 각설하고, 너, 일 하나 해야겠다. “
찬희를 대하는 마파람의 말투가 짧아졌다.
원래 한민족이란 게 그렇다.
상대방을 처음 만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나이를 제일 먼저 확인한다. 그러고는 성씨가 같으면 본관을 물어보고, 족보와 서열을 따지게 된다.
자연스레 한민족의 법칙에 따라 서로 간에 인사를 나누며 둘 사이 역학 관계를 모두 파악한 마파람은 찬희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꼬워도 할 수 없다.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한민족의 법칙이니까.
“ 진기 구슬을 흡수했다면 알겠지만, 이곳 지하에는 정확히 2,999명의 환인족 전사들이 봉인되어 있다. “
“ 그들의 봉인을 서둘러 풀어야 해! “
그 말을 남기고 찬희의 의사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마파람은 몸을 돌려 전각 안으로 들어갔고 찬희는 똥 씹은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다.
‘ 하아.. 끝까지 모른척할걸... ‘
뒤따라가는 찬희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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