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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게임하는 게이머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연재 주기
오탱이
작품등록일 :
2020.09.07 13:54
최근연재일 :
2021.09.21 12:00
연재수 :
3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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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74
추천수 :
630
글자수 :
2,009,897

작성
21.01.1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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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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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8쪽

꽃의 부탁

DUMMY

"불굴의 영웅은 다른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주머니를 따라가던 중 불쑥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분위기도 적적하니 적당히 생각나는대로 꺼낸 말은 아닌 것 같다.

따라갈수록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오는 길을 따라 걸으며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안 나올 것 같은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유저들은...흐음...'


당장 게시판만 봐도 뭐...사자랑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질문에 서로 부모님 안부 물어볼 정도로 날이 선 인간들인데.

그러니 내게 그런 걸 물어보면, 과거에 버그로 사기친 놈들 이야기나, 어떻게든 돈 꾸역꾸역 모아서 pc방 가고 처음으로 현질 했는데 그걸 장난이랍시고 뜯어가던 어른들 이야기 정도말고는 할 게 없다.

아니면...그래, pc방 알바 중이었는데 어느 놈이 강화 폭망했다고 pc방에 불지른 이야기?

삶이 워낙 극단적이니 입밖으로 쉽게 튀어나오는 말도 뭐, 그닥 평화롭진 않다.


"사람따라 다르죠. 괜찮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그런 사람도 있고."

"호호, 그럼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괜찮은 사람인가요, 안 그런 사람인가요?"

"...같은 유저들 입장에서야, 제가 특별히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니까 괜찮은 사람 아닐까요?"


가끔 자연이와 모닥이를 찍어서 게시판에 올리면 사람들이 미쳐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중에는 '아니 저기요, 이런 거 혼자 독점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가르쳐 줘요! 아, 나 완전 배신감 느껴.' 라는 반응을 보면 괜히 즐겁다.

우리 애들이 워낙! 귀여우니 그런 반응도 이해는 한다만, 어째?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걸.


'모닥불 피워놓고 친구 먹으라고 말해줘도 안 믿는 걸 어떡해.'


나 때문에 슬라임 펫이 유행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불이 피어오르다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돈 주고 하는 게임에서 며칠씩 불 앞에 앉아 불에게 말을 거는 그런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몬스터 부족 하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간 다음에 구원자라도 되는 것 마냥 나타나라고 해볼 걸 그랬나? 아, 그걸 말 안 했네.


"제가 보기에 이방인은, 정말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이들입니다."

"그렇죠."

"얼마 전엔 기어이 타국의 왕자를 유혹하여 왕자의 아내가 된 이방인도 있었죠."

"이야, 대단하네요."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처음에는 나도 가볍게만 여겼던 대화 속에서 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과연, 이건 의미없는 잡담인가? 아니라면 무언가 뜻이 담긴 문장들인가? 그런 애매한 기분 속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자 나의 불안은 절정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어이! 오늘 눈에 익힌 은방울 꽃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 아주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게 되었다.


'꽃이냐고 물어보면, 안 되겠지?'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은 들지만, 나랑 인연이 없던 사람이 나랑 인연이 있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나타나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면 이 정도 의심은 당연한 거 아닐까?!

내가 지금 사는 삶과 살아온 삶이 어떤 삶인데, 이걸 그냥 아주머니의 수다라고 의심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건 설정 오류다.

왠 아저씨들이 내 옆으로 와서는 템트리 알려주고는 수업료라면서 돈을 뜯어갔던 인생을 살아온 인간이다.

어딜 날 속여먹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곁눈질로 아주머니의 표정을 지켜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사뭇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는 그런 이야기들에서, 이방인과 저희들의 관계를 더욱더 돈독하게 만들고, 이방인들이 조금은 더 이 세계에 강한 애착을 가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느꼈답니다."


흐름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어지간한 감정 변화나 거짓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한 내 앞에서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분위기를 풍겨대면 괜히 마음이 아프다.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죠. 저는 이방인들도 그러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광기를 신처럼 여기는 인간이 꺼냈다고 생각하기에는 꿈과 희망이 넘쳐흐르는 사고방식이다. 유저들은 한 순간에 도시를 초토화할 수 있는 버그를 찾아내면 망설임 없이 일을 저지를 양반들인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의 어머니인데 설마 광신자의 일원이려고.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야! 하여튼 나는 음모론에 너무 취약하다니까?


"나쁘진 않군요."

"호호, 영웅이 그리 말하니 저도 기분이 좋군요. 같이 힘내주시겠습니까?"

"그건...저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건 참 아쉽네요. 이런, 대화는 여기까지만 해야겠군요."


의심을 잠시 접고 살며시 미소마저 지으며 티테이블이 놓여진 은방울 꽃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도착했다.

향긋한 꽃 향기와 부드럽게 코를 간질이는 차의 향기. 그리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한 명.

...하하, 이거이거, 또 날 음모론자로 만들려고 아주 준비를 단단히 하셨네 그래! 하하...

조금의 짜증과 불안함에 몸이 굳어버린 나를 아주머니는 어서 가보라며 툭툭 밀치더니 혼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 버렸고,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단 둘이 남겨졌다.

떠나가는 아주머니를 쳐다보니 슬쩍 나를 뒤돌아보며 힘을 내라는 듯한 제스처를 한 번 보여주고 웃는 얼굴로 떠나가는 아주머니를 떠나보낸다.

나는......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이다. 나는 제국의 영웅이고 아주머니는 황태후니까 '우리 영웅에게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야징! ㅎㅎ!' 그런 따스한 마음의 결과물이 현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떠보기나 하자.


"...꽃?"

"만나서 반갑습니다, 광기여. 아시다시피, 꽃입니다."

"......"


흐음...! 머리가 아프구만! 하여튼 안 맞는 아줌마야 황태후 아줌마!


"앉으시죠."

"......"


귀에 들리는 목소리나 풍기는 목소리에서는 다소 나이가 느껴지지만, 생긴 것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미인이 사라락사라락 옷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티테이블 앞에 앉는다.

나는 쉽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한 매혹에 저항하셨습니다! 강제 평온에 저항하셨습니다! 인위적 따사로움에 저항하셨습니다! 자백의 향기에 저항하셨습니다!]


"뭐, 싸우자는 겁니까?"

"저희 꽃은, 꽃이 되는 순간 지금 광기께서 느끼셨을 불편한 기운을 풍기게 됩니다. 구원의 대영웅처럼, 쉽게 조절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죠."

"...길게 말하지 맙시다. 하고 싶은 말만 짧게 해요."

"그거면 되겠습니까?"


와아, 사람 미치게 하는 말이네 그거?

뭐 가진 거 하나도 없는 양반이 저렇게 말하면 비웃고 넘길 텐데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을 사람이 저러니까 미치겠다.

살짝 눈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꽃의 앞에서 망설였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쯧!"


드르륵.


있는대로 짜증을 내며 의자를 하나 빼 자리에 앉아 꽃이 따라주는 차를 가만히 바라보다 마셔본다.


[마약 성분이 섞인 차입니다! 가벼운 피로 해소와 기분 좋음에 저항하셨습니다!]


"...마약 말고 좀, 몸에 좋은 거 쓰시지."

"가진 게 그런 것들 뿐이라...극소량만 사용한 것인데도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그래요."


광신자들이 정상이라는 사공방식이 비정상이겠지.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가자.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인지. 광신자고 회장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게임만 즐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씁쓸한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은방울 꽃이 새겨진 카드를 꺼냈다. 그 카드를 본 꽃이 살짝 미소짓는 것 같았다.


"그건 계속 가지고 계시면, 저희들이 앞으로도 광기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없으면요?"

"저희들은 광신자들 사이에서도 그 존재가 극비리에 부쳐지는 조직입니다. 혼돈이 말하는 파멸의 때가 다가올 때에도 저희들은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춘 채로 있을 겁니다."


이 카드는 비밀스러운 모임의 회원증 같은 건가? 앞으로도 요긴하게 쓰자.


"아마 제가 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이 넓은 황성 안에 정견의 대영웅과 광기, 단 둘 뿐일 겁니다."

"그럼, 아주머니는 어떻게 된겁니까? 날 어떻게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예요?"

"황태후께서 불굴의 영웅의 행보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말광량이 손자 어떻게든 돌봐주려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요? 선 자리를 잡아 줄 수 있겠냐 물으니 흔쾌히 이리 하시더군요."


이건 대체 무슨 오지랖이야? 첫 만남에 남의 얼굴에 손대는 것도 그렇고, 아아 참, 마음에 안 드네.


"뭐 어떻게, 질문을 받아야 합니까? 질문을 해야 합니까?"

"질문할 것이 있다면 하시지요. 하지만 그리 만족스럽진 못할 겁니다."


이미 대답에서부터 난 너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단다, 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말을 꺼내놓고 잘도 저렇게 뻔뻔스럽게 웃는다.


"광신자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대외 활동이 제가 하는 전부이기에."


모른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회 활동에 전념한다고 하니, 실제로 광신자 내부의 정보는 잘 모를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면 나중에 협상의 카드로 제시하기 위해 지금은 입 다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돈의 목적은 뭡니까? 파멸의 때는 또 뭐고요. 파멸이 내려오는 겁니까? 광신자 내에서 저를 배적하려는 녀석은 어떤 녀석들입니까?"

"죄송합니다."


진짜 모르는 건가?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으음! 그렇게 유능하진 않네! 황태후까지 속여먹었으면 뭐 이것저것 더 많이 알아도 되잖아!


"...알려줄 수 있는 게 뭡니까?"

"차를 맛있게 타는 법을 가르쳐드릴 수 있지요."

"......거, 광신자 내의 계급이나 가르쳐줘요."


다행히도 이건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정말 다행히도 말이야.


"저희가 가진 힘을 아주 조금만 몸에 담은 것이 '씨앗', 그 힘을 몸에 녹여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새싹', 그 힘을 더욱더 강하게 키워낸 이들이 '줄기', 이윽고 경지를 뛰어넘은 이들이 바로 '뿌리' 입니다."

"그럼 꽃은 뭔데요?"

"앞서 말한 것은 전투원들이며, 저희 꽃은 전투 이외의 부분을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힘을 몸에 담고 녹여내었음에도 인간으로서의 형태를 똑바로 유지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게 된 자들이 '꽃'.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광기를 섬기는, 아니 사랑하는 이들이 꽃에서 열매가 됩니다."


설명 끝. 참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어서 고마움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럴 거면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해가면서까지 날 만난 건데?


'그런데 사랑이라...좀 무섭네...'


"다른이들이 광기를 파멸의 때를 열어줄 열쇠로 본다면 저희들은 그저 광기를 광기로 바라볼 뿐.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제가요?"

"후후..."


레비랑 비슷한 과인가.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류의 사람이구나.

정했다. 묻고 싶은 거, 들어야할 것만 빠르고 간략하게 들은 뒤에 이곳을 빠져나가자.


"다름이 아니라 광기께는 저희가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여 광기를 다치게 할까 겁이 나지만, 저희들의 입장상, 별 수 없이 광기께 도움을 구하고자 합니다."

"왜요? 뿌리 그런 애들한테 부탁하지."

"들으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혼돈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 따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히든 퀘스트 발생! '사라진 열매' : 광신자의 비 전투원들의 조직 '화원' 에는 지금 최고 명령권자인 '열매' 가 실종된 상황입니다! 그로 인해 '화원'의 이들이 혼돈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들을 돕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공 보상 - 보상금과 전투 집단 '숲' 에 대한 정보 일부분.]


'이 말은, 뿌리 같은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는 거지?'


곧 레이드 보스 같은 것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녀석들을 먼저 알고 있는 것이 무슨 득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몰라서 해가 될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의 설명 대로, 과연 이 녀석들을 돕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문제다.

열매를 찾아주면, 그때 내 위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광신자는 내게 어떻게 되는 건데? 날 어쩌려는 거야?


"생각해보죠."

"긍정적인 대답,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예정대로 호프본에 가는 건 정해진 일이긴 한데. 이것 참, 진짜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잡히네.

후에 아주머니에게 어땠냐는 둥, 괜찮은 사람 아니냐는 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죄송하지만, 지금은 일과 연애 중이라."

"어머...안 어울리는 말을 하시네요."


어떻게든 이야기를 끝낼 수는 있었다. 하마터면 밑도 끝도 없는 아주머니의 잡담에 빨려들 뻔 했다.

또 누가 나를 붙잡지 않을까, 이번에는 또 어떤 깜짝 이벤트가 나를 놀라게 할까 두려운 마음에 서둘러 황성을 나섰다.


"아저씨."


그런 나를 맞이해준 것은 머리에 말랑이를 얹은 아이엔과 자연이 손을 잡고 온 레비.

...왜 얘네들만 온 거지? 어른 둘은 어디가고 애들만 온 거야? 그건가? 집안 어른이 '얘! 뭐하니 얼른얼른 마중나가지 않고!' 라고 말하는 그건가?


"설마 또 무슨 일 난 건 아니지?"

"아니에요. 돌아다니다 보니까 도착한 거에요. 카페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엔의 손에는 이것저것 잔뜩 산 것 같은 쇼핑백이 하나 가득 들려있었다.

이번 마경 일로 성과금을 잔뜩 받았다더니, 어지간히도 신났던 모양이다. 다른 애들이었다면 낭비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아이엔이니까 적당히 썼겠지?


"다음은 어디로 가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세 쌍, 그냥 빛을 받아 반짝이는 둥그런 것이 하나.

자연이를 안고, 말랑이를 머리에 이고 평소의 상태가 된 나는 드디어 조금의 안정을 되찾는다.


"호프본. 너도 알지?"

"알죠.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그런 것치고는 별 감흥 없어 보인다?"


대영웅과의 만남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그 순수한 어린 아이는 어디로 가고 피곤에 절은 대리님 같은 인간이 저기 서있는 거야? 난 우리 애 저렇게 키운 적 없어!


"맞아요, 아이엔이 이방인이 된 이후부터 사람이 갑자기 쌀쌀맞아졌다니까요? 진 님처럼!"

"아, 아니야..."


내 머리 위의 말랑이가 몸의 일부분을 죽 늘려 마치 팔로 땅을 툭툭 내려치듯이 내 머리를 툭툭 때리며 항의한다.

녀석, 이제는 정말 진화가 멀지 않은 모양이다. 원래 이렇게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우리가 와와 하면 엄청 멀리서 피식, 웃는다니까요? 도르핀 님 처럼! 인광 님이 뭐라고 해주세요!"

"내가 언제!"


그렇군, 아이엔이 손에 든 건 전부 다른 아이들의 물건이었던 건가. 어지간히도 신났던 건 아이엔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었군.

뭐어, 아이엔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순간에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데이터 덩어리가 되어버렸는데 성과금이고 나발이고 알게 뭘까.

그렇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과몰입이 불가능하고 앗 하는 순간에 필사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지. 지금의 아이엔이라면 안 되겠다 싶으면 다음을 노리고 포기하려고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마경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마경에서의 일 때문에 더더욱 저런 상태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허무한 거지.


"딸냄...이곳은 그래도."

"알아요! 안다고요!"


난 아직 아이엔이 이 세계에 흥미를 가져주기 바란다. 그러기에는 마냥 좋아라 하기 힘든 사실을 여럿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좋아해주었으면 한다.

...저래도 막상 호프본에 가면 눈을 빛낼지도 모르니 두고 보도록하자.

아이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손에 있던 짐을 가로채간다. 자연이를 안고 있어서 한손 분량밖에 못 들었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난 여기가 좋아. 여기에서 루시도 만나고, 파이 너도 만났고, 여기 애들도 다 만났잖아."

"......"

"그래서 난 너도 이곳을 좋아해주었으면 해. 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무려 네가 나를 만난 곳이기도 하고."

"...네..."


[평생 그런 말 하지 않을 것 같던 모험가 님의 입에서 나온 감성적인 말과 따사로운 분위기에 일행이 적잖이 감동합니다!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답지 않게 부끄러운 말을 해버렸다. 애들 앞이라 사람이 많이 무뎌져 버린 걸까.

그냥, 자식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참...이 어린 나이에 별 걸 다 느낀다 나도.


"가자."


얼른 가자. 호프본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새 마차 구해준 마부 씨라면 반나절에 도착하겠지.

그런데 그 사람, 요즘 들어 운전이 거칠던데, 혹시 그 사람도 알게 모르게 광기에 전염된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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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지긋지긋한 인연 21.02.23 26 1 12쪽
161 일상의 소중함 21.02.22 25 1 14쪽
160 부끄러운 고백 21.02.19 22 1 16쪽
159 자강두천 21.02.18 28 1 16쪽
158 새싹 마왕 21.02.17 22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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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대영웅의 시선 21.02.12 23 1 16쪽
154 대영웅 탈선하다 +1 21.02.11 29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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