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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탱이
작품등록일 :
2020.09.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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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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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심해의 구덩이

DUMMY

깊고 깊은 심연을 바라보는 듯 한 줄기 빛조차 내려오지 않는 새까만 심해에서도 가장 깊은 어둠을 가진 심해의 구덩이.

먼 옛날 인간과 어인의 싸움이 계속되던 그때에 인간의 대영웅과 어인의 대영웅의 싸움에서 만들어져버린 가장 깊은 구멍.

그 아래에는 봉인된 무기가 있다하며, 그 아래에는 그 무기를 봉인하기 위해 같이 잠든 인간의 대영웅이 있다 한다.


"저기 아래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


물속에서 살아가는 어인이면서도 숨을 쉬기 위해 머리에 얇은 막을 씌운 어인의 영웅이 입에 대나무를 문 채 깊은 심해의 바닥에 꽂꽂이 서 있는 인광에게 말했다.


끄덕.


마법으로 만들어낸 불빛 아래에서 어디를 보는지조차 알 수 없는 멍한 눈으로 그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인광. 스포티는 일을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의 이야기에는 정말 하등 관심도 없다는 태도의 인광에게 알 수 없는 이질감과 섬뜩함 마저 느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인간이 기억하기에는 다소 길고 어려울 수도 있다는 배려로 자신을 스포티라고 부르라고 했음에도 처음 몇 번을 빼고는 문어 아가씨라고 당당하게 그녀의 이름을 잊었음을 말하는 인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 제가 한 이야기 기억은 하시죠?"


그녀는 상관의 허락이 떨어진 후 곧바로 인광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해주었다.

이것은 인광도 어느 정도 새겨들었고, 그 결과 다행히도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어 그는 누구보다 당당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스토리는 집중해서 들었다고.'


접대용 방에서 오랜만의 고요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인광이 내보일 수 있는 당당함에 스포티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네가 아래에서 기어이 오랜 대영웅의 저주를 풀어낸다면 우리 어인들은 다시 아가미로 숨을 쉴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디, 그 점을 똑똑히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군."


거의 신과 같은 위치에 있던 어인의 대영웅의 봉인은 저주가 되어 후대의 어인들에게 전해져 스포티같은 예외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고는 하나 같이 물속에서 생활을 할 수가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해저 던전은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벽에 구멍이 나 물이 차면 허겁지겁 달려와 구멍을 매꾸는 것이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인간에 비해서는 물속에서의 생활이 자유로운 것은 맞지만, 평생을 물속에서만 살 수도 있는 어인들이 저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씩 주기적으로 물밖으로 나가 숨을 쉬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니 비록 가증스러운 인간이라 하더라도, 유일하게 인간만이 그 저주를 풀 힘을 가지고 있기에 마냥 미워하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놓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봐야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적대심을 보이며 저주는 계속 이어질 테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눈물 나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인간, 어떻게 맨몸으로 심해에 있는 거지? 고생 좀 해보라는 심보로 아무런 마법도 없이 내려보낸 건데 왜 멀쩡한 거야?'


이렇게 깊은 심해에서는 아무리 마법으로 보호받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답답함을 느끼고 마법 없이는 금방 죽어버린다.

하지만 인광은 바다 수영의 스킬 효과와 흐름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오는 압박에게서 자유로웠다.

가뜩이나 어린 나이에 인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었던 스포티는 인광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광기가 가장 좋아하는 호기심을 보여버린 것이다.

다행히 지금의 인광에게 광기의 힘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앞으로도 스포티의 호기심이 계속 이어진다면, 인광이 광기의 힘을 되찾은 때에 가장 먼저 광기에 전염될 것이다.


"사례는 충분히 하지."


끄덕끄덕!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핀 미소, 그리고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며 앞으로 걸어나가는, 너무나도 속물적인 그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그러한 위협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럼 옥시토포 마법 대장. 뒷일을 부탁하겠네."

"네! 책임지고 인간을 봉인의 장소까지 인도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하고. 자네처럼 물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어인을 잃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마치 돌연변이처럼 저주에서 벗어나 과거의 그 평범했던 어인들처럼 바다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스포티에게 어인의 영웅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스포티를 바라보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바다가 평화를 바랄 걸세."


축복을 빌어주는 영웅의 인삿말에 스포티도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심해의 구덩이의 앞으로 다가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 이미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서도 밝게 빛하는 별산호도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도 어둠에 감싸여 사라지는 바깥과는 전혀 다른 상식으로 돌아가는 만들어진 이계.

그런 구덩이의 경계에 발끝을 걸치고 선 인광은 두둥실 떠올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부드럽게 구덩이로 다이빙을 하는 듯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기가 차다는 눈으로 장난스럽게 구덩이로 떨어지는 인광을 바라보다 촉수를 뻗어 인광의 등에 달라붙어 스포티도 천천히 구덩이의 바닥을 향해 떨어져내려갔다.


"완전히 바닥에 닿으면 그때부터는 빛도 소리도 색도 사라집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이 그들과 함께 떨어지며 어둠에 침식되듯이 먹혀들어가 곧 사라졌다.


"이 아래는 흑백의 세계. 빛은 없지만 사물을 구별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겁니다."


이미 한 번 해저 던전, 어인들에게는 카란틀리아라고 불리는 깊은 해저의 성으로 향하는 길에 경험했던 끝이 보이지 않는 오싹해지는 어둠이었기에, 인광은 꽤 안정적으로 아래로 향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정말 끔찍한 괴물이 사니까, 조심하세요."


그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언가에게 먹혀들어가는 듯이 작아졌다.

갑자기 확연하게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 그러나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인광의 반응에 혹시 죽어버린 것인가 놀라 스포티는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어깨와 뒷통수를 툭툭 쳤다.

해파리에 닿은 듯이 저항감이 있는 말랑말랑한 것이 몸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에 인광은 소름이 끼쳐 화들짝 놀라며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 해산물은 딱 질색인데...'


그래도 적어도 눈앞에서 건드려주는 것이 그의 마음이 편했기에 그는 등에 붙어 있던 스포티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짐 들듯이 겨드랑이에 끼웠다.

말랑이의 말랑함과는 그 느낌이 또 다른 이상한 촉감에 심지어 인광은 작은 구토감 마저 느끼다 돌연, 푹신한 모래 바닥에 안면을 부딪혔다.

그리고 그때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상이 흑과 백의 세상으로 변하며 그들이 심해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여전히 물속인 듯이 느껴지는 저항감과 스포티의 말처럼 진동음 정도는 느껴졌지만 소리가 없었고, 흰색과 검은색이 구별이 되었지만 색도 없음이 확실했다.

마치 만화책을 펼친 것처럼 오직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인광은 미지에서 오는 작은 떨림을 느꼈다.


툭툭.


게다가 이 감각, 인광에게 이 감각은 조금은 익숙한 것이었다. 테스터 시절에 느꼈던 그 감각이며, 잠시 잊고 살다 광신자가 자신에게 흘린 문서를 펼쳤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괜찮습니까?]


주위의 물이 차갑다고 알려주는 형식이 아니라 직접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심해의 물. 숨을 쉬는 것이 조금 버겁다고 머리로 알게 해주는 방식이 아닌 정말 숨을 쉬는 것이 힘들어져 답답해지는 느낌. 뭉툭한 감각이나 지식, 혹은 캐릭터의 반사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진 반응이 아닌 옆구리를 찔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게 되는 느낌.


끄덕.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떠올리기 싫은 가설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고 숨은 거칠어졌지만 인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차라리 잘 된 것이라고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너무나도 베일에 쌓여 있어 이걸 계속 파해쳐야 할지 잊어야 할지 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이곳에 뭔가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무언가가 있다면, 자신의 가설을 반박해줄 무언가가 있다면 마냥 무섭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마법으로 허공에 글씨를 쓰는 스포티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치고 얼른 안내하라며 턱짓하며 인광은 깊게 숨을 들이 마쉬며 자기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

인광 자신은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촌장은 그를 보며 감탄하고 말랑이는 그를 보며 따르게 되었고 아이엔은 그를 보며 존경하게 되었으며 파이는 빛을 본 것이다.


그건 스포티도 다르지 않았다.

심해의 구덩이는 바다의 종족인 어인이라 하더라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이상하고 괴기스러운 공포의 공간이었다.

자신이 설령 그 누구보다 용감한 자라도 이 자리에서까지 미소 지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오세요.]


어쩐지 듬직한 그의 모습에 스포티는 조금은 더 부드러워진 태도로 그를 안내했다.

이곳이 비록 많은 이들이 꺼리는 곳인 것은 확실했지만 특수한 힘이 흐르는 것도 그랬고, 스포티가 입고 있는 옷의 재료인 강철 미역이 자라는 특수한 지형이기도 했기에 스포티도 조금은 익숙해 길을 안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이곳이 미로의 숲의 중앙에 버금가는 마경이라는 것이다.


쿵!!!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았을 때 인광의 등뒤에서 진동음이 전해져 와 인광과 스포티는 곧장 전투 준비를 했다.


'...잠깐, 저거 레비아탄이야?'


인광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익숙해서 제발 두 번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대한 바다 괴물.

뱀처럼 길쭉한 몸에 갑각류의 껍질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어지간한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는 데다 불규칙적으로 돋아난 뾰족하고 투박한 사마귀 낫 같은 것이 다리처럼 움직이고 거대한 입에 무수히 돋아난 이빨은 거대한 생물의 뱃속 여행은 불가능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인광은 스포티를 들고 도망쳤다. 설령 스포티가 레비아탄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 해도 인광은 자신의 몸에 온전히 전해질 고통을 감내해가며 떠올리기도 싫은 가장 많은 죽음의 원인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정신 없이 도망을 가면서도 절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스포티와 앞을 바라보며 가야될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신은 개미보다 작은 존재로 보일 만큼 거대한 레비아탄의 모습에 인광은 최선을 다해 이동했다.

사슬을 뻗어 평소처럼 빠르게 이동하려 했지만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였기에 흐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빠르게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도 될 테지만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보이는 곳에서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그림자가 있음을 알고 사용한단 말인가.


쿵! 콰지직!


짧은 도주의 끝을 알리듯이, 이곳이 절대 만만치 않은 곳임을 알리듯이, 그의 뒤를 따라오던 레비아탄은 흑백의 세계에서도 완전히 흑색으로 칠해진 천장에서 내려온 굵은 원통형의 무언가에게 밟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으깨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려온 무수한 촉수에 휘감겨 천천히 천장으로 끌어올려진다.


'미친! 미친! 이 미친! 이건 아니지!'


이런 괴물들이 사는 마경, 미로의 숲의 중앙도 대체로 이런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고통을 느낄 일이 없었기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품에 안은 스포티의 감촉도, 달리면 온몸에 느껴지는 저항감도, 달리고 난 뒤에 다가오는 숨이 차는 감각도 모두 사실이다.

평소대로 싸워서 혹시 지기라도 했다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왼쪽입니다.]


스포티의 친절한 내비게이션에 맞춰 마주치기 싫은 고통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인광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인다.

레비아탄의 추적으로부터는 벗어났기에 흐름에 다시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인광은 의식적으로 흐름에 집중을 하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인광에게 흐름이 보인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화살표를 순서대로 입력하는 정도였고 그것이 게임의 시스템이 그에게 보여주는 흐름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감각이 현실인 이곳에서 느끼는 흐름은 말 그대로 세상의 흐름이었다.

스포티의 안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 심해의 구덩이에서 난잡하게 폭주하는 흐름, 자신의 온몸에 흐르는 흐름까지.

거칠어졌던 숨은 점점 잦아들었고 물의 저항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이동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뭔가 조금만 더 가면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은 느낌. 무언가에 닿을 것만 같은 느낌. 세상의 흐름을 손에 쥘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과 예감.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만 더, 눈앞에 지금까지의 게임 시스템 안에서의 흐름과는 다른, 진짜 흐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퍽퍽퍽!


그러나, 그러한 느낌, 예감, 기분은 스포티가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때려대는 바람에 사라졌다.


[오른쪽이요! 오른쪽! 안 보여요?!]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흐름에 빠져들어있던 인광은 존재할리 없는 것에 빠졌다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담아 피식 웃어버렸다.

자칫 잘못하여 인광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흐름에 올라타 그대로 사라져버릴 뻔한 것도 모른 채 인광은 조금 심술이 나 스포티를 바닥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당연히도 이곳은 물속이기에 스포티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해엄쳐 바닥에는 닿지도 않고 여유롭게 따라오라는 듯이 인광에게 손짓했다.

이후에도 뒤틀린 게나 동굴로 위장중인 심해어 따위를 지나며 방금 전의 흐름에 홀려버렸던 것과는 다르게 천천히, 느긋하게 흐름을 관찰하듯이 느껴보았다.

조금 전의 흐름이 마치 안전바 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라면 지금 인광이 느끼는 흐름은 거대한 크루즈 위에서 파도 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비유면, 도르핀은 크루즈 그 자체인 걸까, 아니면 크루즈를 조종하는 함장인 걸까?'


실없는 생각도 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가짐으로, 혼자 왔다면 절대 도착하지 못 했을 봉인의 장소에 도착했다.

다른 곳보다 유독 더 푹 꺼진, 그 중앙에 다섯 개의 창이 커다란 고래 어인의 팔, 다리, 심장을 꿰뚫고 있는 그곳이, 바로 봉인의 장소였다.

인간의 대영웅과의 격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덩이로 이어진 흑백의 세상에서 먼 옛날과 전혀 달라지 않은 모습으로 봉인된 어인의 대영웅.


[봉인을 지키는 괴물! '썩어 문드러진 희망' 이 나타났습니다! 죽어서까지 지상 모두의 평화를 지켜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영원히 고통 받는 삶을 선택한 불쌍한 대영웅의 파편입니다! 그를 편안히 영면에 들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 흑백의 세상에서 상처 입고 약해져 괴물에게 잡아 먹혀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의 대영웅이 봉인된 어인의 대영웅 위에 앉아 조용히 인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괴물들을 먹고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하며 긴 시간을 그저 봉인을 지켜 어인이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얼굴마저 잃어 그저 검게 보일 뿐인 먼 옛날의 대영웅은 평소 어인들이 나타났을 때의 적극적인 전투 태세가 아닌 느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발걸음으로 인광을 향해 걸어왔다.

이제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자신을 대신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제는 후대에게 자신의 의무를 맡기기 위해.


'이 녀석도 파스티엔이랑 같은 세대인가?'


봉인된 무언가를 지키는 모습이 미로의 숲에서 마주쳤던 파스티엔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녀와 대치했을 때의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이며, 그녀와 마주치기 전 알게 되었던 구덩이와 이곳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400년 전이라... 정보 수집 퀘스트는 취향이 아닌데...'


해야할 것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도 취향은 아니었지만 인광은 우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광의 다짐과 함께 일그러진 대영웅이 기어이 인광의 앞까지 다가왔을 때, 대영웅은 끊어질 것 같은 의식의 끝자락을 부여잡고서 그에게 있어 최초이자 최후의 시련을 인광에게 남긴다.


[과거를 딛고 일어서서, 온전히 현재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봤던 희망의 첫 발걸음이니. 연약한 후배에게, 희망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다 꺼져가는 희망의 불꽃을 태워,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대영웅의 일그러진 몸에서 무수히 뻗어나오던 손이 후두둑 떨어지고 대영웅의 마지막이 담긴 새하얀 손이 인광에게 살며시 닿는다.


[선택은, 온전히 그대의 것. 현재는 온전히 그대의 것. 희망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도, 내딛지 않는 것도, 모든 선택도, 모든 결과도, 모든 기쁨도, 모든 후회도, 모두, 그대의 것.]


천천히 바스라지는 대영웅의 일그러진 몸을 바라보며 인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바스라지기 전의 대영웅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후배의 모습일 테니까.


'뭐, 이 정도 서비스는 얼마 든지.'


"용사님? 용사님 일어나셨어요?"

"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처음 보는 천막 안에서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던 인광은, 빠르게 이것이 어떤 이벤트인지 깨달았다.


'이거 그거네, npc의 과거를 내가 대신 조작해서 과거 스토리 알려주는 거. npc가 입으로 말해주는 것 보다는 이쪽이 연출적으로 훨씬 좋지.'


게다가 대영웅의 말에 따르면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만들어지는 세계인 경우일 것이었다. 마치 요정의 호수에서 받았던 시련처럼.

다른 점이라면 이것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이기에 인광이 이곳에서 무엇을 해도 과거는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이며, 중요한 점은.


"...파스티엔?"

"네. 그런데 꼭 그렇게 남 부르듯이 부르셔야 하나요?"


인광이 알고자 했던 400년 전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너는 선택을 하라.]


400년 전의 과거. 파스티엔의 정체나 대영웅이 이곳 심해 깊숙한 곳에 갇히게 된 이유. 어쩌면 구덩이에 관한 진실이나 계속해서 자신이 현실의 감각을 마주하게 되는 이유도 알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단순한 연출인지, 아니면 버그인지, 아니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일어난, 판타지적인 현상인지 알아낼 찬스였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리고 이것이 현재 게임 플레이에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음을 인지하고, 인광이 선택한 것은.


"너 약점이 뭐야?"

"네?"


'궁금하긴 했지만, 과거 따위 어찌됐든 알 바 아니다.' 였다.


인광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생각을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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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고래 싸움에 새우가 20.11.26 66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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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시험의 탑 20.11.12 100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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