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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게임하는 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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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기
오탱이
작품등록일 :
2020.09.07 13:54
최근연재일 :
2021.08.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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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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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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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과거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DUMMY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유나 그런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뭔가 이것저것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갔고, 기어이 나 홀로 남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나마 여기 이놈 때문에 판타지 세상 같아서 정신이 유지가 되네. 게임 만세다 망할 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재미도 감동도 없다. 의미도 없다. 이미 흘러간 과거이고, 몇 백 번이고 잊으려 해 겨우 잊었던 과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져나오는 기억을 나는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10년 쯤 전, 나를 뺀 다른 가족들이 친척의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냥 마냥 귀찮아졌다.

어린 나는 때를 쓰며 친척집에 가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며 다소 부모님의 마음에 상처가 갈 법한 말도 했다. 당시에는 나름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못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농담은 잘 못한다. 나 혼자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모자른 놈.


'시종일관 진지하고 농담 한 마디 평소에 안 하는 인간은 갑자기 심한 농담하면 안 되는 건데,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한참을 그러다, 결국 부모님은 나를 두고 친척집으로 떠나셨다. 아들의 짖궂은 말에도 떠나가는 순간에는 웃으며 집 잘 기키라는 말을 해주셨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아들~집 잘 키기고 있어?"

"별 걱정을 다 하신다."

"집에서라도 운동 좀 하고! 너 계속 그렇게 컴퓨터만 쳐다보면 나중에 허리 디스크 와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져!"

"그럼 누워서 지내야지 뭐! 아하하!"

"에휴...그래, 갔다 올게~"


나도 특별히 부모님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날은 유달리 나가기가 싫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나는 마지막까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부모님을 떠나보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친척이 황급히 집에 찾아와 나를 병원에 끌고 갔을 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부모님이 내 눈을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저 계속 바라보았다.

그때부터였다. 상대방을 눈을 바라보는 것이 지독히도 힘들어졌었다. 물론,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소심해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원래부터가 그런 성질이었던 내가, 그 사건을 계기로 더 심해졌던 거지.

그리고는, 나를 불쌍하게 여긴 친척이 나를 입양해주었다. 새아버지, 새어머니, 라고 불러야 할 테지만 내가 두 분에게 겨우겨우 정을 붙이고 겨우 다시 내가 있을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에, 두 분의 아이, 내 사촌이 병을 죽어버렸다.


"...인광아, 이제부터 네가 진짜 내 아들이다...기억하렴."

"...네..."

"나도, 네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할 테니, 너도, 조금만 노력해주렴..."

"......네......"


분위기는 나락을 떨어졌다. 주워온 아이인 나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두 분의 기운을 복돋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두 분은, 그런 나에게, 너무 힘들어하고 너무 어색해 하는 나에게도 손을 내밀어 주었다.

어쩌면 죽은 사촌의 대용품이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잘해 주려고 하고, 그래서 더 아껴주려고 하고, 그래서 가끔은 내가 습관처럼 하는 행동을 보며 왜 그러냐며 버럭 화를 내고, 내 목소리를 듣고 울적해 한 것일지도 모른다.


"넌 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 아이는 그러지 않았는데!"

"...! 어머니도...내 어머니도 이런 식으로 안 했어요! 날 이렇게 안 대했다고요!"

"아니 그런데 이게!"


짝!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겠지.

이후에도, 이상할 정도로 내 주변에서는 사고가 많이 생겨났다. 굳이 친척이 아니라고 해도 내 친구들이나 학교나, 군부대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사건 사고가 잦았다.

알고는 있다. 사건이란 것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란 걸, 나는 그저 운이 나쁜 것일 뿐이란 걸.

하지만, 이상하게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친구에게,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학교에서, 내가 익숙해진 환경과, 나를 받아들인 장소와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에게서, 사고가 일어났다.

친구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자살을 해버렸고, 학교에는 너무 큰 불이 나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고, 뭐, 군부대야 워낙 잔 사고가 많은 곳이니,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내 근처의 사람들이 휘말리니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 탓인가?'


난 저주를 받은 것일까? 가끔은 내 행동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분명히 문제였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를 만들어내는 녀석이었다.


"이, 인광아, 오늘 시간 있어?"

"엉? 귀찮은데?"

"아, 아니...괜찮으면 같이 pc방이라도 가자고..."

"에이, 나한테 그럴 돈이 어디 있냐? pc방 갈 돈 있으면 모아서 뜨끈한 국밥 하나 사 먹어야지!"

"하, 하하...언제적 밈을...그리고 너! 돈 있으면 pc방 가잖아!"

"으음~귀찮아! 오늘은 영 아니야!"

"...알겠어. 잘 가!"

"어어, 내일 보자."


따돌림 당하던 친구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갔더라면, 조금만 더 그 친구의 표정을 살펴보았더라면, 같이 놀자는 말에 귀찮다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않았더라도.


"야 이것들아! 소화기를 가지고 놀면 어떡해!"

"앗! 아하하! 지, 지금 갖다 놓을 게요!"

"얼른 원래 자리에 돌려놔!"

"...야, 너 이거 원래 어디 있었던 건지 기억 나냐?"

"인광이 네가 가지고 왔잖아."

"엥? 나 아닌데...? 그냥, 여기에도 소화기 없으니까 여기 둬도 되겠지?"

"으음, 괜찮지 않을까?"


학교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소화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애먼 곳에 놓지만 않았더라면, 그 불이 학교 전체를 집어 삼키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갈게요."

"...고생해라."

"......잘 다녀오라고 해주면 어디 덧나나..."

"뭐라고 했니?"

"아니에요. 들어가세요."

"...그래...잘 있어라."


내가 날 거둬준 분들에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 내가 두 분에게 느끼는 마음을 전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두 분이 내 전역을 기다리지 못하고 죽음으로 도망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난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만 관심을 줬더라면, 내가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었더라면, 내가 그것을 몰랐더라면,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과분하게 행복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러다 찾은 유일한 탈출구가 게임이었다. 그곳에서만큼은 마음이 놓였다. 나 때문에 죽는 것은 캐릭터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무시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임은 꺼려졌다. 혹시 모를 일이니까. 혹시라도, 혹시라도 또 내가 저 사람에게 가까워진다면, 그때는 정말 모르는 거니까.

그렇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마주보지 않아 문제가 생겨도 나는 마주보기를 거부했고, 안일하게 생각해 문제가 생겼어도 나는 여전히 안일했고, 표현하지 않아 문제가 생겼음에도, 나는 쉽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달리 이유는 없다. 무서웠으니까. 그게 전부다.


마주보면 내 부모님처럼 될지도 모른다, 안일한 멍청이 짓을 하지 않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내 마음을 표현하면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무서웠다.

사고의 경우에는 사고의 주범을 미워할 수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사고가 일어난 경우에는 범인이 내가 아끼던 것과 같이 죽어버려서 내 분노는 갈 곳을 잃고 길을 해매었다.

그러니 사실상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낸 것은 늑대가 처음이라고 봐야될 것이다. 정말, 익숙하지가 않았다.


기어이, 주변의 모두가 죽고 사라져 더이상 나를 찾을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된 어느 날, 나는 혼자 멍청하게 서서 과거를 잊으려 했다.

눈을 감자 떠오르는 과거에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습관적인 행동에 떠오른 기억은 내 마음을 찢었다. 어디선가 읽은 글은 내 경험을 떠오르게 해 머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2년 정도를, 혼자서 멍하니 방 안에 앉아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며 모두 잊으려 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게임을 하며, 내게 일어났던 일을 모두 게임 캐릭터가 한 일들로 덮으려 했다.

시시각각 떠오르는 과거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게임을 하면서도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머리를 맴돌았다.

그 때문에 잠시 병원을 다니기도 하고, 카운셀링인가 뭔가를 하기도 했는데,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에 내 기분이 자꾸 여기저기로 뛰어다녀서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해져 그만두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한 게임의 트레일러가 지금의 월드 게이트였다.

처음 그 트레일러를 보고, 정말 오랜만에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약을 먹어야 하는 두근거림이 아니라 정말로 기분이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뭐랄까,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내 개판난 인생을 덮어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그래서 테스터 신청을 했고, 테스터로 지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과거가 떠오르지 않았고, 정말 오랜만에 오기가 생겨서 어울리지도 않게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트레이너씨와도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사람의 정을 또 다시 갈망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파이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같이 있고 싶다는 기분이었다. 다소, 복잡한 기분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과거를 잊고 게임을 하면서 현실이라면 절대로 못할 컨셉을 잡고 놀며 드디어 처음으로, 과거의 기억을 딛고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고, 상대방을 머리와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에도 성공했다.


현실에서는 겨우 한 달이지만, 게임 속에서 보낸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반 년 가까이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년 동안 나는 나에 대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내 생각보다 소유욕이 강했다는 것 정도다. 누가 나를 건드는게 싫고, 누가 내 것을 건드는 것이 싫었다. 혹시라도 또 내가 정을 준 것이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버리는 것은 더이상은 싫었다.

세상이 내게서 앗아간 만큼, 내가 잃은 만큼, 나를 떠나간 만큼, 내가 슬펐던 만큼, 이제는 전부 내 손에 쥐고 놓지 않을 것이다. 나를 속이고, 기만하며 내 것을 빼앗으려 드는 이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중략하고. 정말 의도치 않고 원치도 않게 과거를 떠올리게 된 나는, 이제는 이 과거를 이용해야겠다.


[진짜 괜찮은 거 맞죠? 혼자 뚱해 있다가 갑자기 혼자 실실 웃으면, 저는 좀 무서운데요...]


끄덕끄덕.


[...진짜죠?]


아직 도저히 이 과거를 이겨냈다고는 말할 수 없고, 실제로 흑백의 세계에서 다시 심해로 올라가는 이 순간마저 너무 고통스럽지만, 나는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내팽개치고 그냥 다시 잊을 때까지 잠수타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그전에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일이 있다.

하나 아쉬운 것은 이게 도박이라는 것이다. 이게 또 도박이다. 평소에도 심심찮게 인생은 도박이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이런 순간에까지 '혹시' 나 '설마'에 기대게 될 줄은 몰랐다.


"아아...! 이럴 수가! 내가! 내가 이리도 물속에서 자유롭다니!"


어인들의 성까지 올라와 물속을 자유롭게 다니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어인들의 모습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산호들의 빛과 어우러져 정말 장관이었다.


"자네는 우리들의 영웅이야!"


[승급 퀘스트 발생! 불굴의 마음으로 만들어낸 여러 행적들이 당신을 영웅이라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영웅이 되어서는 그 빛이 색을 잃고 맙니다! 영웅의 전당을 찾아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 주세요!]


정말 장관이다! 어인들이 최고야! 문어 아가씨, 아니 우리 귀여운 스포티가 아주 그냥 복덩이었구만 그래! 너가 나 안 봐줬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니?! 이히히!

...아, 이게 아닌데...도대체가 나는 게임만 하면 사람이...


[잃어버린 반쪽으로부터 강한 연결이 느껴집니다!]

[퀘스트 발생! '이제야 그릇이 만들어졌군.' - 너무 강해져버린 당신의 반쪽이 드디어 당신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 되어 당신의 반쪽과 완전한 하나가 되는 첫 걸음을 나아가세요!]

[퀘스트 보상 - 칭호 및 업적 시스템, 스킬 '불완전한 폭주', '불완전한 폭발'. 전직 퀘스트 '계속되는 광기의 고행']


크흐...크히히...후우...진지해져라, 나는 지금부터 진지하게 일을 진행해야 한단 말이야...후후후...!


어쨌든, 그외에도 갖가지 보물을 약속 받고 지금부터 이어질 파티의 주인공으로 초대받는 등, 이 게임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게임 주인공같은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해야될 일이 있으니 겸손한 척을 하며 미루도록 하자. 이제는 슬슬 올라갈 때가 되기도 했으니 잠시 해어지기에는 적절한 시기다.

승급 퀘스트며, 하양이가 던져준 퀘스트며,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울함을 탑재한 표정이라 어인들은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다음을 기약하는 나를 씁쓸한 표정으로 보내주려고 했다.


'루시가 다시 여기까지 찾아왔으려나. 찾아와야 하는데.'


쿵!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지상에서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것인지, 해저의 이 성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과 함께, 창밖으로는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성의 바로 위, 칠흑같은 어둠이 자리잡고 있던 그곳이 마치 수면의 바로 아래라도 되는 것처럼 강렬한 빛과 함께 저기 높은 곳에 떠다니는 구름이 보였다.

누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해저 던전에 닿을 듯 말듯한 거리까지 원통형으로 텅빈 공간을 만들어낸, 겨우 나 하나 때문에 움직였다고 생각하기는 힘든 인물이 이 위에 있는 모양이다.


"...권왕인가..."


어인의 영웅이 중얼거렸다. 권왕이라면 분명 에롤을 만나러 갈 때 한 번 마주쳤던 그 여자 아이의 별명인데, 과연, 대영웅의 옆에 있을만한 인물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과거의 내가 되어야 한다. 정말 잊고 싶고 보기 싫은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


"아아, 진짜 싫다."

"뭐라? 혹시 저자가 자네를 잡으러 온 것인가?"

"에? 어어, 그렇겠죠."


권왕이 뚫어낸 통로를 통해 아이엔이 살벌한 표정으로 떨어져 내려와 순식간에 성을 갈라내고는 나를 꺼내간다.

떨어질 때의 아이엔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순간 연기를 잊을 뻔 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과거의 기억들이, 내 죄책감이, 내 후회들이 내 감정을 다 잡았다.

완전히 바다 위로 올라온 나는, 에롤이 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함 위에 떨어졌다. 슬쩍 보기에 내 팀은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루시를 포함해서.


"아저씨."

"닥쳐!"


쾅!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힘껏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연기는 아니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그것을 잊고자 하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끄으으! 으아아! 떠오르지마! 기억하지 마! 으아아! 멍청이! 개 같은 거! 제발 잊어! 으으, 잊으면 안 돼...잊으면 안 되는데! 너무 아파! 내가 아프게 했어...내가 너무 아파...! 왜 전부 나를 두고...! 아아! 그만! 그만!"


광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스스로 자해를 하며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한다.

깜짝 놀란 일행이 달려와 나를 붙잡지만, 내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건들수록 점점 더 심해져갔다.

잊고 살았던 것들이, 점점 나를 지배해가는 더러운 느낌에 당장이라도 전부 그만두고 싶었지만 내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려면 조금 더 자극적일 필요가 있다.

과거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몸을 말아 혼자 중얼거렸던 말들을 지금은 전부 입밖으로 내뱉었다.

모두의 경악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을 때, 나는 구석에 몸을 말고서 처량하게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저곳에 있는 그 모두가, 나와는 다르다. 나보다 훨씬 더 올바른 인간이고, 제대로 된 인간이다. 그런 생각을 담아 바라보았다.


아이엔은 언제나 위를 바라보며 올곧은 마음으로 정의를 꿈꾼다. 노력을 멈추지 않고 불굴이라는 분에 넘치는 힘을 가진 나보다 더 훨씬 더 포기하지 않는 아이일 것이다.

촌장님은 나로 인해 지금 저 모양이 되었지만...아니 지금도 본인의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는 상당한 인격자이자 나와 만나기 이전부터 그러한 인격자로서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말랑이는 눈이 부신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 본인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주저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아이다.


나머지는, 뭐 어찌됐든 좋다. 이러나 저러나 못난 나보다 훨씬 잘난 인간들인 건 확실하다.


"...보지 마...아무것도...하지 마..."


촤르륵!


사슬을 뽑아내어 목에 두르고, 거칠게 숨을 고르다 있는 힘껏 좌우로 잡아 당겼다. 다른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이 가장 무서웠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나는 겁이 많다. 겁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모두가 끝이 나는 것을 보며 끝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나를 상처 입혀도, 내가 너무 죽고 싶어도 죽는 것이 무서워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자, 천사 누나가 눈에 보였다. 로그인 로그아웃 때 말고는 요즘 거의 볼 일 없던 얼굴이라 새삼스럽게 반가운 기분도 든다.

위에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본 탓인지 일행들에 비해서는 다소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최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그리 표정이 좋지 않다.

참 다행이다. 나도 내 그런 마지막 모습이 정말 싫었는데, 이걸 이렇게 공통점을 찾을 줄은 몰랐네.


"...왜 그랬어요?"

"보여주려고요."

"모험가님 일행이 그 모습들을 보고 카란틀리아에 쳐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이제는 어인을 붙잡고 있던 봉인도 사라져서 정말로 전쟁으로 이어질 거라고요."

"일 없어요. 에롤 그놈 얼굴 못 봤어요?"


모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대영웅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모두의 뒤에서 모두를 바라보던 그 절대자의 눈빛은, 무섭기도 했지만 뒤를 맡길 만큼의 힘이 담겨 있기도 했다.

내 일행이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서 해저로 돌진하려고 해도 보나마나 에롤이 막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바다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어인들을 겨우 몇 명이 이겨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나중에 해명하는 것이 꽤 힘들겠지만, 그때는 그때다. 지금은 내가 해명을 들을 때다.

천사 누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언제나 이 순간은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지금만큼 두려웠던 적은 없을 것이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안은 내가 뒤집어썼던 이불 같았다. 포근함이 아닌 아슬아슬함을 품게 해주었던 그 공간 말이다.


쿵, 쿵, 쿵.


습관적으로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고통으로 생각을 끊어버리려는, 잊고 있던 습관이다.

지금 이 기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저 담담함을 유지하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더욱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것 말고는 나는 나를 유지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무런 소리도 울리지 않는 방안에 주저앉아 때를 기다렸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때대로 결론이 날 것이니 조급함은 들지 않았다.

내가 머무는 작은 방에서 바로 보이는 현관을 퀭한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발, 제발 저 문 너머에서 아무것도 나를 찾아오지 않기를 빌었다.


삑삑삑.


하지만, 내 기대는 산산히 무너져내렸다. 점점 더 나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져갔다. 과거가 아닌 현재가 나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허억...허억..."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황급히 달려온 듯 줄줄 땀을 흘리고 있는 미인, 루시 로웰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비틀비틀 내게 걸어오는 루시. 그 표정에서는 후회와 괴로움이 엿보였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서글픈 표정으로,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울고 싶은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자신을 올려다 보는 나를 내려다 보며 수많은 고민과 후회, 망설임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내게 뻗어 나를 살며시 감싸 안는다.


"...울지 마..."


본인도 덜덜 떨리는 눈물 젖은 목소리이면서 내게 울지 말라며 다독이는 말을 건낸다.

나도 덜덜 손을 떨며 그녀를 살며시 감싸 안는다. 흑백 세계에서의 경험 탓인지 뭔지, 믿기지도 않지만, 품에 안은 그녀의 흐름이 온전히 느껴졌다.


아마, 난 미친 것이겠지. 어떻게 게임 시스템으로 만들어낸 감각이 현실에도 존재한다고 믿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손쉽게 그녀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는 거야? 그냥 내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잖아? 그렇지?

...그렇다면, 아주 잠깐만 미쳐보자.


꾸욱.


"...크윽! 무, 무슨...!"


어차피 미쳐있다면, 그래 확실히 미쳐버리자.

흐름을 완전히 붙잡혀 손끝도 꼼짝 할 수 없게 된 루시 로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곁눈질했다.

혈관이 도드라지고 뼈가 삐걱이며 눈은 충혈된다. 꽤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누구야?"


울음을 그치고, 광증을 멈추고, 분노를 담아 말했다. 감히 파이의 모습으로 파이를 연상케 하는 말들을 하며 말랑이에게는 자신이 파이인양 떠들어대었던 그녀에게.

흙발로 내가 추억하는 파이의 모습으로 걸어들어와 어줍잖게 내 주변에 서서 역겹게 내게 혼란을 심어주었던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유언 삼아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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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각오를 다질 때...! 20.12.15 31 1 8쪽
111 잠깐 휴식 20.12.14 50 1 19쪽
110 예상 밖 20.12.11 70 1 16쪽
109 워밍업 20.12.10 44 1 16쪽
108 가정 방문 20.12.09 59 1 16쪽
107 집안 사정 +2 20.12.08 63 1 15쪽
106 쉽지 않네. 20.12.07 126 1 13쪽
105 버려진 구역 20.12.04 69 1 14쪽
104 내기...? 20.12.03 95 1 21쪽
103 일 저지르기 10분 전 20.12.02 65 1 16쪽
102 회장님 시찰 오신답니다 20.12.01 34 1 17쪽
101 헤로손의 보고서 20.11.30 83 1 20쪽
100 찝찝한 영웅님 20.11.27 56 1 23쪽
99 고래 싸움에 새우가 20.11.26 68 1 24쪽
98 연애상담 20.11.25 71 1 16쪽
97 면접 20.11.24 73 1 19쪽
96 마지막 부탁 20.11.23 70 1 16쪽
95 새 생명의 탄생 20.11.20 49 1 18쪽
94 레이드 준비 20.11.19 76 1 16쪽
93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20.11.18 61 1 15쪽
92 물건 찾기...? 20.11.17 58 1 14쪽
91 불가능은 아닌 싸움 20.11.16 103 1 18쪽
90 선배와 후배 20.11.13 61 1 20쪽
89 시험의 탑 20.11.12 105 1 18쪽
88 영웅의 전당 20.11.11 103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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