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매니저의 아이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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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0.09.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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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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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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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1)

DUMMY

[<신기루>, 아티스트: 정세주, 권차혁, 차태경]


내가 새롭게 쓴 아티스트 명을 읽은 이유나가 말했다.


“보컬 유닛은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닌가요?”

“유닛 앨범을 따로 만들자는 게 아니에요. <Stranding Mind>에 ‘신기루’만 보컬 유닛 음원으로 넣자는 거죠.”

“으음.”

“1 메보에 2 리드보컬, 아이돌에서 흔한 거 아니라면서요. 그럼 WAVE의 보컬 역량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선보여줄 음원이 하나는 있어야 해요.”


손 위에서 펜을 한 바퀴 굴리고 말을 이었다.


“트랙을 타이틀 앞으로 빼고, 핫 곡을 붙여 유통하는 건 어떨까요.”


타이틀에 버금가거나, 독특하여 대중에게 밀어주고 싶은 곡이 있으면 회사는 그 음원을 ‘핫(Hot)곡’으로 선정하여 음원 사이트에 유통한다.

타이틀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두 번째로 찾아 듣는 음원이 되는 것이다. 타이틀이 간판이라면, 핫 곡은 메시지였다. WAVE의 실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메시지.


“<신기루>를 보컬 유닛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는 좋아요.”


이유나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계약서를 새로 쓴 이유나는 지금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라 WAVE의 수록곡 녹음 작업을 맡았다. 작곡가에게 프로듀서 자리까지 맡게 한 건 EN엔터가 아직 중소 기획사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 이보다 유리한 건 없었다.

프로듀서의 권한으로 수록곡을 만질 수 있는 명분이 이유나에게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신기루>에 최 건과 이기태 씨의 파트가 없어지는 건데···.”

“괜찮아요.”


지금 WAVE의 첫 번째 목표는 차트인.


그 말은 달리 말해, 대중들에게 WAVE가 누구인지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뜻이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뜨기 위해서 메인 보컬이나 예능 전담 멤버에게 파트를 몰빵하는 것도 부지기수인 것이 망한 아이돌의 현실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중들이 기억해야 하니까.


하지만 어떻게 내가 감히 이기태와 최 건의 입지를 없앨 수 있을까.

내가 똥기저귀 갈며 10년을 애지중지 키워온 녀석들인데.


무엇보다 지금 나는 WAVE의 리더 차태경의 신분이다. 아이돌에게 있어 매니저보다 가까운 사람. 함께 고생하고 함께 웃는 사이이기 때문에, 멤버들에겐 단순한 직장 동료를 넘어서 친구이자 가족으로까지 여겨지는 대상이다. 매니저에게 하지 못하는 고민 상담을 리더에게 하는 일은 놀라운 게 아니니까.


말이 길어졌지만 여하튼,


“제게 계획이 다 있어요.”


최 건과 이기태는 나한테 맡기시라, 이거다.


*


이유나의 프로듀싱에 따라 음원 녹음은 탄력을 받았다.

<신기루>를 보컬 라인의 유닛 음원으로 만들겠다는 그녀의 주장에 곽 이사는 조금 놀란 듯한 모션을 취했지만, 고민 끝에 이유나에게 전적인 권한을 내려주며 승낙했다.


‘이유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겠지.’


신인 작곡가에게 회사가 이 정도로 퍼 준다는 건, 이유나의 환심을 사서 다음 앨범 계약도 이어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아직 이유나는 회사의 호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이기도 하고, 명성을 쌓는 데에 있어 회사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한 건 맞았지만···.


그녀의 작곡에 날개를 달아주려면 유의해서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하기사, 곽 이사도 다 WAVE 띄우자고 그러는 건데.


타이틀 녹음이 속전속결로 끝나기 무섭게 안무 연습이 이어졌다. 가이드로 나온 안무 영상을 숙지한 후에, 안무 트레이너의 지휘에 따라 차근차근 박자를 밟아나갔다.


“원, 투. 하고 바로 Warning Warning 갑판에 울리는 사이렌.”


트레이너의 동작에 따라 거울을 보고 안무를 맞춰보았다.


‘내가 춤을 다 추다니.’


그 전까진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그동안 한 발짝 뒤에서 남들이 춤추는 모습만 봤는데, 이제는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춤을 추고 있다.


살면서 한 번도 춤이란 걸 배워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아이돌은 아이돌인지 나름의 버프를 받고 있었다.

이게 만약 김정환의 몸이었다면, 머리로는 동작을 다 숙지하고 있어도 몸이 미처 따라주지 못했을 거였다. 춤에 대한 센스가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차태경은 달랐다.


아이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센스라는 게 있다.

안무를 이해하는 과정이 남들보다 빠르고,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해당 동작이 예쁘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컴백 날짜가 정해지기 전까지 연습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나갔던 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차태경의 몸은 이미 춤을 추는 데 익숙하다. 데뷔를 하기 위해 그가 쉴 새 없이 연습했던 결과일 것이다.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만약 차태경의 몸이 춤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춤선이 우스워졌을 거니까.


자연스럽게 그룹에 녹아들어 안무를 숙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멤버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춤사위가 있었다.


“건이는 진짜 배우는 게 빠르네.”


잠깐 무릎을 짚고 선 정세주가 내뱉었다. 최 건은 흔들림 없이 연습실 거울을 쳐다보며 자세를 고쳐나갔다.


WAVE의 메인 댄서 최 건은 다섯 살 때부터 춤을 배웠다.


영재 학원 출신으로 오랫동안 현대무용을 배웠다고 했다. 원래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는데, 콩쿨에서 우연히 캐스팅 담당자의 눈에 띄어 설득 끝에 아이돌의 길을 걸었다고 했지.


최 건이 메인 댄서로 활약할 수 있었던 데엔 타고난 피지컬 역시 한몫을 했다. 팔다리가 길고 허리가 짧아 늘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물론, 어떤 동작을 해도 시원시원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무리 격렬한 동작을 해도 흔들림 없이 무드를 이어나갈 수 있는 최 건만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있었다.


이 아우라는 연차가 쌓일 대로 쌓인 데뷔 8년 차 즈음, 패션위크에서 기가 막히게 명품 브랜드 오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이돌 출신으로선 드물게 프랑스 L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되어 전 세계에 있는 명품 샵에 최 건의 사진이 걸렸으니까.


최 건 잘난 거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


“건아, 나 아까 이 동작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안무 연습이 끝난 후, 숙소로 복귀하는 멤버들과 매니저 사이에서 나머지 연습을 핑계로 최 건을 불러세웠다.

최 건은 흔쾌히 안무를 봐 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2015년에 발매하는 <Disaster>는 1절에서 2절로 넘어가는 브릿지 부분에 최 건의 댄스 브레이크가 하나 있었다. 전문 댄서들도 추기 어렵기로 악명이 자자한 안무였다. 비트를 잘게 쪼개놓아서, 빠르게 몸의 균형을 바꾸어 바닥을 굴렀다가 일어나다시피 하니까.


물론 멋은 있었기 때문에 <Disaster>가 WAVE의 첫 차트 진입곡이 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해 주긴 했지만. 문제는 <Disaster>로 활동할 때 최 건이 허리와 발목을 자주 접질렀다는 사실이었다.


메인 댄서에게 있어 생명인 허리와 발목을 <Disaster> 활동으로 3주 동안 야금야금 깎아 먹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2016년에 있었던 연말 무대에서 최 건은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디스크가 터져 주저앉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0년인 지금은 댄스 브레이크가 생략되고 브릿지 부분에 단체 칼군무가 삽입되었다. WAVE가 데뷔 초 신인 아이돌 그룹이라는 점을 고려해 마련된 안무였다. 최 건의 댄스 브레이크가 생략되었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괜찮아 보이는 결과였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최 건의 앞에서 연습 중 버벅거렸던 안무를 선보였다. 최 건은 유심히 내 동작을 지켜보더니 말했다.


“아, 이거. 형 무게중심 지금 어디 잡혀 있어요?”

“발뒷꿈치?”

“그러지 말고 발 앞쪽으로 잡아봐요. 그런 다음에 턴 하면 훨씬 부드럽게 동작이 되죠.”


최 건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춤을 추면서 헷갈렸던 부분을 최 건은 곧장 캐치 해서 가이드 해주었다. 춤에 대한 기본 이해도가 높은 녀석이다.


그러니까, 춤에 있어 반열에 오른 이 녀석은 분명 춤을 변주하는 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잠깐 짬이 난 때를 놓치지 않고 최 건에게 물었다.


“건아. 너 춤 만들어 본 적도 있어?”

“춤이요?”

“어. 너 춤 오래 배웠다며. 근데 왜 안무는 안 만들어?”


최 건이 난처한 기색으로 거울을 쳐다보았다.


최 건에게 있는 단점을 꼽는다면,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의견 피력에 서툴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한다. 어려서부터 영재 학원의 억압적인 환경에서 무용을 배워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누구 한 명 튀지 않아야 하는 무용에선 그게 자연스러웠겠지만, 아이돌은 달랐다.

아이돌은 끊임없는 자기 PR의 직업이다.

자신의 장점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중들에게 보여줄 줄 알아야 했다.


“전 창의력이 없어서 안 돼요.”


최 건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구니까 2015년에 댄스 브레이크 할 때도 자기 몸에 맞게 안무 변형도 못하고 관절을 혹사시켰지.


“왜, 하면 잘할 거 같은데.”

“아녜요, 또 어려운 거 있어요?”

“건아.”


이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다.

주는 것만 받아서 하면 그게 로봇이지 아이돌이겠냐. 사람이면 자기계발을 꾸준히 해야지.


“너 안무 만들어오면, 내가 <Disaster> 브릿지에 너 솔로 댄스 넣어달라고 의견 드릴게.”


최 건이 시선을 돌려 날 빤히 쳐다보았다. 기획에 참여가 어려운 WAVE의 현 상황에서, 리더가 총대 메고 A&R팀과 독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작 데뷔한 지 6개월 된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타이틀에 솔로 댄스를요?”

“어. 그러니까 멋있게 만들어봐, 곽 이사님이 오케이 할 정도로 끝장나게.”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최 건의 눈에 짧은 사명감이 어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최 건의 손에 두 가지 가능성을 올려놓았다.

하나, 최 건의 솔로 댄스 파트를 확보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포지션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가능성.

둘, 앞으로 있을 앨범 기획에 WAVE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


안무를 만드는 것 이상의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기회였다. 최 건은 분명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통틀어서 안무를 만들어 올 것이다. 그 결과물은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최 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가방을 챙겼다.


“집에 가자, 이제.”


*


모두가 잠든 새벽, 까치발로 걸어 나와 숙소 거실에 놓인 컴퓨터를 켰다.


우웅-


작은 소음을 내며 화면이 켜졌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인터넷에 접속하여 사운드 클라우드에 들어갔다. 갖은 앨범 커버들이 주르륵 화면을 메웠다. 힙합, 락, R&B,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원들이 홈페이지에 나열되어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작업한 음악을 올리고 들을 수 있는 음악 공유 홈페이지.

이때만 해도 여기에 어떤 노래가 잠들어 있는지 꿈에도 생각 못 했지.


‘기태 예명이 뭐였더라···’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했다.


[HYPER BEAT]


딸깍. 마우스를 클릭하자마자 20곡이 넘는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무료로 공유된 노트에 프리스타일 랩을 덧씌운 음원이었다. 헤드셋을 머리에 쓰며 중얼거렸다.


“많이도 만들어놨다, 이기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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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1) +5 20.09.16 6,970 179 12쪽
10 포지션 변경해야겠는데? +9 20.09.15 7,070 178 12쪽
9 Stranding Mind +6 20.09.14 7,114 185 14쪽
8 스튜디오 차이 +12 20.09.13 7,245 187 12쪽
7 목표는 차트인 (3) +10 20.09.12 7,409 210 12쪽
6 목표는 차트인 (2) +7 20.09.11 7,582 223 13쪽
5 목표는 차트인 (1) +12 20.09.10 7,855 187 13쪽
4 무명을 위한 무대는 없다 (3) +12 20.09.09 8,088 19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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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명을 위한 무대는 없다 (1) +8 20.09.08 9,279 19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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