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머 아카데미의 귀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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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톤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0.09.09 16:45
최근연재일 :
2021.07.16 01:0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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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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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인류 최후의 날

DUMMY

“쿨럭, 쿨럭!”


목구멍이 매캐해서 마른기침이 나왔다. 조잡한 방독면만으로 저 노란색의 가스를 모두 정화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 발짝씩 전진하기를 어연 1시간쯤 됐을까, 마침내 반갑고 익숙한 그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다 왔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오래된 맨홀 뚜껑.

그러나 실상은 인류 최후의 희망.


생존자들의 쉘터.


나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밀고 사다리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딛으며 어둡고 습한 아래로 향했다.


곧이어 철제 도어 하나가 딱딱하고 차가운 모습을 드러냈다. 얼른 방독면을 벗고 홍채 인식 보안 장치에 눈을 갖다 대자,


「B1-A45 에어리어 정찰관, 강민성 님. 확인됐습니다.」


무뚝뚝한 여성의 목소리가 왼쪽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서 도어가 좌우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장장 몇 시간 만에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이제야 살 만하군.


“강?”


무기를 정비하고 있던 남자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뱃살도 그 움직임에 따라서 출렁인다.


송혁준. 살아남은 사람 중에선 그나마 손재주가 제일 좋은 녀석이다. 무식할 정도로 우직한 성격이라 아카데미 시절엔 비웃고 살았지만, 이런 상황이선 이만큼 든든한 동료도 없지.


“혹시 오염되지 않은 구역은 발견했어?”

“전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다리에서 풀쩍 뛰어내려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이번엔 완벽하게 성공.


“강민성, 그러다가 무릎 연골 다 나간다.”


그러자 대장이 그 지긋지긋하고 쉰내 나는 지적을 또 하기 시작했다. 다정한 분이긴 한데 이 신경질적인 말투만 어떻게 고쳐주셨으면.


“괜찮습니다, 대장님. 저는 좀 굴러야죠.”

“그래, 그건 대찬성이다. 너는 고생 좀 해야지. 그런데 구를 거면 괴물들 앞에서나 실컷 굴러.”


턱수염이 잔디처럼 난 사각턱이 오늘따라 유독 야성적으로 비친다. 아예 관리를 안 하신 모양이다. 이젠 다들 지칠 대로 지쳤으니 용모 관리 따위는 사치겠지만.


이 기지의 생존자는 넷. 그리고 이 숫자는 곧 전세계의 인구수를 뜻한다. 다른 기지는 이미 초토화돼서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즉, 우리가 죽는 순간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


'잠깐만, 이러면 한 명이 비는데?'


이 쉘터 안의 홍일점.

자존심 강한 책벌레가 안 보인다.


“임승아는 어디 있죠?”

“짜잔!”


갈색 머리 단발을 한 여자가 식량 창고 입구 안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깔끔한 베이지색 스웨터와 짧은 청바지 차림,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는 시집 한 권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허리 양쪽에 손을 얹고 혀를 찼다.


“귀족 아가씨 납셨네, 다들 천 쪼가리 걸치고 있는데. 아예 곤룡포라도 입으시지 그러냐?”

“귀족 다 얼어 죽었나? 안녕하시오, 조양 임씨 8세요!”

“······.”


임승아는 입 꼬리를 귀에 걸고 오른손을 내밀어 V자를 그려보였다. 차마 타박은 못 하겠고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어넘겼다. 언제 또 도망자 신세가 될지 모르는데, 어디서 저런 긍정 파워가 나오는지 의문일 뿐.


이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책벌레 아가씨는 시집을 내려놓고 당차게 팔짱을 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신대륙은 찾으셨어, 콜럼버스 양반?”

“코빼기도 안 비친다.”


나는 벗은 방독면을 혁준에게 맡기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있었는데, 팀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만 내쉬면서 바닥만 응시하고 있자, 보기 안쓰러웠는지 대장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을 걸었다.


“강민성,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놈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곳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다.”


나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솔직히 위로가 안 된다.


“너 때문에 인류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안 그래도 부족한 에너지 더 떨어지니까.”

“저 때문에 맞지 않습니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곧이어 그 가증스러운 분홍색 머리의 여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등에 돋아난 자주색 박쥐 날개, 입술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송곳니, 깊고 푸른 사파이어 빛 눈동자 위로 떠오른 하트 모양 마크.

인간과 괴물을 반반 섞은 기묘한 모양새지만, 숨이 턱 막힐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그 위화감을 모두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물론 그게 아름답다고 느낀 것도 예전의 이야기. 지금은 그 우유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칼날로 쑤시고 싶을 지경이다.


“그년을 섣불리 믿은 제가 잘못이죠. 하필이면 괴물 세력의 스파이였을 줄은.”

“누구라도 속았을 거다.”


대장이 한층 더 인자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작해야 C클래스 괴물이라고 다들 방심한 게지.”

“하지만, 대장!”

“그 녀석이 진화가 가능한 특수 종족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기도 했고. 전부 결과론이다.”

“착실하게 진화시켜준 건 저입니다!! 그 음흉한 속내도 모르고!”

“학생으로서, 그리고 테이머로서 최선을 다한 것일 뿐이다. C클래스를 A클래스까지 키웠으면 자부심을 가져도 돼.”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데도요?!”


잠시나마 활기가 돌았던 기지 내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마음을 좀먹어가던 그때,


“그래도 여기만큼 아늑한 곳도 없잖아? 네가 찾은 곳인데.”


유일하게 표정이 밝은 분위기메이커께서 냉장고 안의 수통 몇 개를 집었다.


“탄산수?”

“에탄올.”

“알코올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민증 잉크도 안 마른 게.”

“됐어, 내놓으라고. 누구는 참 원숙한 누님인 줄 알겠다.”

“너 그러다가 병 걸린다?”

“걸리라지.”


차라리 뇌혈관이라도 팍 터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이 사람들이 몸을 숨길 곳은 찾고 나서.


나는 낡을 대로 낡은 수통을 들고 벌컥벌컥 내용물을 들이켰다. 불쾌하게 쓴맛이 혀를 자극한다.


“아~ 부동산 시장만 살아있었으면 여기 팔아서 우리 모두 대박 나는 거였는데. 아까비~”

“너도 참 속편한 소리한다. 필기 1등 출신 맞아? 이런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시끄럽네요, 248등 씨.”


괜히 시비 걸어봤다가 정곡을 찔렸다.

성적을 걸고넘어진다면 이쪽에 할 말이 없지.

저쪽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는데.


그나저나 아카데미라······.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돼버렸다.




이건 한참 전의 이야기.

어느 날부터 이차원의 게이트가 열리더니, 온갖 괴물들이 침공해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내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됐고, 치안 시스템 역시 망가져 강력범죄가 들끓었다. 이에 각국 정부들은 서둘러 의논을 해서 대책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군대를 동원해서 화기로 대응해보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어느 순간부터 인류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 특수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단단한 비늘과 철갑을 두르거나 전자 배리어를 생성하는 등, 놈들은 어렵잖게 화기에 대한 면역을 갖추었다.


수많은 무기들이 고철덩이로 전락한 인류는 속절없이 밀려났고, 이대로 400만년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가?

사람들은 게이트를 넘어온 괴물의 일부가 인간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걸 알아채고, 그들과 교감을 시도했다.


그 도박은 놀랍게도 성공.


마치 조련사가 동물을 다루듯이, 괴물들과 친숙해져서 그들을 부하처럼 다루는 능력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테이머.'

이들의 임무는 항복하거나 생포된 괴물들을 훈련해서 인류 측의 전력으로 써먹는 것. 화기로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상대할 때 매우 효율적인 수단으로 검증을 받았으며, 대우 역시 파격적이라 지원자들이 넘쳐났다.


문제는 위험성. 근본적으로 포악한 놈들이라 미숙한 테이머들 밑에서는 이런저런 사고들이 났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테이머를 양성하는 교육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테이머 아카데미.'


이 신생 교육 시설은 각 국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우수한 테이머들을 육성해냈고, 나 역시 큰 꿈을 품고 그곳에 지원하여 기어코 합격했다.

그럼 나는 어느 정도 위치였는가 하면······.


밑바닥만 겨우 모면한 신세였다.




“근데 서큐버스는 왜 골랐어?”


임승아가 탄산수를 홀짝이며 물었다.


“진화시킬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을 리는 없고.”

“사람이랑 말이 통하는 괴물이 걔밖에 없었거든. 내 재능으로는 그 녀석을 다루는 게 한계였다.”

“아~ 나는 또 뭐라고. 그동안 오해했네.”

“오해?”

“비주얼에 혹해서 그런 건 줄 알았지.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잖아, 남자들.”

“걘 사람도 아닌데, 뭐.”

“어?”


그때, 임승아가 보안 시스템을 만지다가 흠칫해서 소리쳤다.


“대장, 열 감지 신호 뜨는데요?”

“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벌떡 일어났다.

장비 고장일 가능성은 없다.

송혁준이 바로 어제 손을 봤으니까.


“······괴물이에요.”


임승아가 장난기를 싹 빼고 다급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모두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어요. 전방 53m!”

“우연히 지나가고 있을 가능성은 없나?”


대장은 서둘러 중화기를 챙기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임승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흔들 뿐이었다.


“모든 개체가 이 쉘터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는데요?”

“간만에 고기 파티 벌여야겠군.”


곧이어 송혁준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돌격소총 여러 정을 건넸다. 더 이상 기지의 안전함에 기대지 말고, 자기 몸은 알아서 지키라는 뜻이다.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런데 그때, 등골이 얼음이라도 갖다 댄 것처럼 서늘했다.

뭐지, 이 살기는? 우리를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러나, 강민성?”


대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 이건······.”


나는 그 수상하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쪽을 바라보았다.


임승아가 웃고 있다.

인류의 완벽한 멸종이 코앞까지 다가온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라도 이럴 수는 없을 텐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아까 말한 내 아카데미 성적,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교직원들이랑 나만 알고 있을 정보를 어떻게 저 녀석이 꿰뚫고 있는 거지?


설마······.


“다들 그럼 굿바이.”


임승아는 섬뜩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보안용 유리창을 깨부수고 비상용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쉘터의 돔이 천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게 뭘 뜻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독가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 대피!”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대장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입을 벌린 돔 사이로 전갈의 형태를 띤 괴물 몇 마리가 침입하고 있었다.

흉포한 괴성이 고막을 찢어발길 기세로 울려 퍼진다.


장장 3m는 되는 거구.

B클래스 괴물 ‘데저트 스콜피온.’

일반 화기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녀석이다.


현재 시점에서 대처법은 딱 하나.

테이밍을 통해 아군으로 만드는 방법.


그러나 지금 생존자 중에서 테이머는 나와 임승아뿐인데, 나 같은 떨거지가 B클래스를 다룰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임승아는······.


탕―!!!


임승아, 아니 임승아의 모습을 빌린 그 누군가가 품에서 호신용 권총을 꺼내어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불을 뿜으면서 건조한 총성이 기지 내부에서 메아리쳤다. 대장의 주름지고 넓은 이마에 바람구멍이 뻥 뚫렸다.


28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전사는 그렇게 허무하게 고깃덩이가 되고 말았다.


“대장!”

“대장!”

“저 아저씨는 실력이 꽤 좋아서 말이야. 혹시나 모르니 처리해둬야지.”


임승아의 시선이 배불뚝이 무기 전문가에게로 향한다.


“너는 놔둘게. 우리 애들이 생고기를 좋아해서.”

“으, 으허어어억!”


쏜살같이 달려드는 전갈들에 비해 송혁준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렸다.

차마 그 참상을 맨 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애써 흘려들으려 했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때,


“달링은 너무 괴로워하지 마. 옛정을 생각해서 몇 분은 살려줄게. 아, 그렇지! 디저트로 주면 딱이겠다.”

“달링? 너, 설마······.”


나는 비상용 출구를 향해 뒷걸음질 치며 눈매를 세웠다.


임승아가 슈퍼모델처럼 다리를 길게 뻗으며 요염한 발걸음으로 한 발짝씩 다가오는 중이었다.

저 눈에 익은 발걸음.

곧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릴리트?”

“역시 알아봐주는구나! 너무 기쁜 거 있지, 달링?”


주변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에 작은 파동 하나가 일더니, 그 공간을 중심으로 임승아의 모습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릴리트(원본).png

분홍색 머리와 깊고 푸른 눈동자, 박쥐 날개.

그리고 흰색 베일을 걸친 웨딩 란제리 차림.

내 눈을 속이고 아카데미 내부에 잠입해서 80억 인류 전체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장본인.


“달링도 참 칭찬에 인색하다니까. '예뻐서 골랐다'는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솔직히 실망했네.”

“닥쳐!”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소리쳤다.

심장의 고동이 점차 빨라진다.


“진짜 임승아는 어디 있지?”

“아, 걔? 어젯밤에 여기 근처에서 서성거리기에 편하게 보내줬어. 지금쯤 황천 너머에서 도시락 까먹고 있을걸.”


어젯밤? 야간 정찰을 나갔을 때?

이상하다, 괴물의 생체신호는 전혀 감지 못했는데.


“죽이기 전에 최면을 걸어서 갖고 놀아봤어. 물을 찾으려고 예정보다 좀 멀리 나왔다면서 술술 불던데?”


물이라······.

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식수가 바닥을 드러냈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긴 했었지.

열 센서 범위 바깥은 가지 말라고 대장이 경고를 했는데, 끝내 조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우리한텐 은인이지. 덕분에 이 쉘터 위치도 알았으니까. 그래서 고통 없이 죽여줬어. 신경 독으로 몽롱하게 만들어서~”

“이 새끼가······.”

“슬퍼? 걱정하지 마. 이제 곧 만나게 해줄 테니까.”


릴리트는 고개를 들고 박수를 두어 번 쳤다.

그러자 데저트 스콜피온 몇 마리가 돔의 틈새로 더 기어들어왔다. 집게들이 맞부딪히면서 살벌한 소리를 낸다.


“저승으로 보내주기 전에 감사 인사 하나만 할게.”


릴리트는 생긋 웃으면서 가증스런 윙크를 날렸다.

이만큼 얄미운 조소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A클래스까지 진화시켜준 거, 고마워~”


그리고 다시 박수를 치자, 그 소리를 신호로 데저트 스콜피온들이 나한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억울해서라도, 미안해서라도.

나는 평소에 훈련한대로 기지 우측 말단에 자리한 원형 바닥 위로 달려갔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뻗어 벽에 부착된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천장의 일부에 구멍이 뚫리고, 내가 밟은 바닥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지상으로 솟았다.


화재나 지진 같은 사태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비상 탈출 시스템. 이걸 이럴 때 쓸 줄은 차마 몰랐군.

딱 한 가지 문제라면······.


“쿨럭, 쿨럭, 쿨럭!”


샛노란 가루가 황사처럼 휘날리는 지상.

가까스로 사지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숨을 돌릴 만한 안식처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지옥이었다.


괴물 녀석들이 침공하면서 전세계에 살포한 가스.

한 번 폐부에 침입하는데 성공하면 기분을 몽롱하게 만들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인은 대개 호흡곤란.


따라서 이 탈출 시스템을 쓰려면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 물론 방금 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방독면을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커, 커흐윽!”


제길, 올 것이 왔다.

횡경막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고 정신이 멍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하반신 마비가 온 환자처럼 털썩 주저앉게 된다.


이제 죽는 건가? 최후의 인간으로서.


사고회로가 점차 작동을 멈춰간다.

결국 나는 잠에 들 듯이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황천이 코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순간, 후회가 일었다.



릴리트가 괴물 세력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시간을 5년만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아카데미의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사태를 되돌리고 그 녀석한테 실컷 복수할 수 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끝으로, 의식의 끝자락을 놓고 말았다.





저승이란 곳은 처음 와보는군. 과연 어떤 풍경일까?

일단 의식은 남아있다. 그럼 사후세계는 있다는 뜻인데······.


성인이 천국의 열쇠를 들고 천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염라대왕이 펄펄 끓는 솥을 둔 채 장부를 읽고 있을까?


나는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어?



익숙한 천장이다.

아니, 이런 표현은 너무 건조하군.

담담하게 받아들일 상황이 아닌데.


미칠 듯이 그리운 천장이다.


“어?”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주변 풍경의 변화를 인지했다.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 회백색의 얇은 노트북, 목제 책상과 히어로 영화 포스터.


호흡이 거칠어지고 땀이 줄줄 흐른다. 때로는 반가운 마음이 공포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긴 5년 전의 내 방이잖아?'


떨리는 손으로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가슴과 배에 근육이 거의 안 붙어있고 부드럽기만 하다. 체격도 다소 작아졌다.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나는 푹신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책상 위에 있는 거울을 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소년이 한 명 보인다.

정확히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에 걸친 모습.

솜털 같은 수염이 인중에 자라나있다.


'이게 뭐야? 1분 전까지만 해도 사막 한가운데였는데.'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새어 들어온다. 여고생들의 수다, 차량들의 경적 소리, 촌티 나는 광고 음성까지. 너무나도 생생하고 그리운 인기척들.

여기까지 알아챈 이상, 이 충격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


나는 인류가 멸망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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