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요원의 학교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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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5
작품등록일 :
2020.09.15 03:59
최근연재일 :
2021.05.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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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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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122화] 진실 (10)

DUMMY

******



클론 326호.


그것이, 그녀의 별명이었다.


이름은 없다.


이름을 지어준 부모도 없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


혼자.


그저, 혼자서.


새카만 어둠속을 헤엄치는, 외로운 존재.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빛을 찾아준 것은 너무도 따스한,


그래. 한없이 따스하고 자상한, 그 목소리였다.



******



- 클론 326호, 배양 성공. 프로세스를 종료합니다.


감정이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갇혀있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서서히 걷혀가고, 따스하고 밝은 빛이 그녀를 감쌌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차갑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것은, 윤기 나는 붉은 머릿결에 에메랄드빛의 눈동자를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안녕, 326호. 언어프로그램이 설치되었으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지?”


여자는 그녀를 ‘326호’라고 불렀다.


“······.”


아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녀는 아주 작게나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신기했다.


언어라는 것을 배운 적도, 공부한 적도 없는데 붉은 머리 여자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좋아. 이제부터 간단한 테스트를 할 건데, 별로 아프지는 않으니 조금 기분이 이상해도 놀라지 마.”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동그란 전극을 부착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


순간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지만 아픔은 금세 가셨다.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순간 확 돌다가 이내 차츰 사라져갔다.


곧 그녀의 몸을 누인 딱딱한 침대는 스스로 부양하더니 원통형의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동했다.


위이이잉, 소리가 나며 기계 내부의 투명한 플라스틱 막 너머로 보이는 투박한 색의 기계장치가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이윽고 장치의 회전이 멈추고 그녀가 누운 침대는 다시 기계 밖으로 나와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이네. 검사는 이걸로 마칠게. 조금만 기다려. 입을 옷을 준비해줄 테니까.”


붉은 머리의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알몸인 채 멍하니 누워서 붉은 머리 여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붉은 머리 여자가 곱게 접힌 흰색 옷을 손에 든 채 돌아왔다.


“입어봐. 사이즈는 맞을 거야.”


붉은 여자의 말에 따라 326호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여자가 건네준 옷을 입었다.


헐렁한 옷이었다.


아무런 디자인 없이 그저 새하얗고 얇은 옷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소매가 팔락거렸고, 바지 밑단의 너비도 상당해 전체적으로 헐렁했다.


다행히도 허리의 사이즈와 옷단의 길이는 맞았다.


무심코 헐렁한 목 부근의 옷깃을 매만지다가, 무언가 흔들리는 것이 손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가늘고 긴 섬유 같은 것들이 머리로부터 어깨 위까지 촘촘하고 길게 늘어져있었다.


머리카락.


사전에 저장된 정보로 인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예쁜 벚꽃의 색을 띤, 그녀 자신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었다.


본 적도 없는 벚꽃의 존재를 어째서인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 입었으면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따라와. 네가 오늘부터 지낼 장소를 안내해줄게.”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는 붉은 머리 여자의 뒤를 따라, 그녀도 슬리퍼를 신은 뒤 서툰 걸음으로 걸어갔다.


붉은 머리 여자는 그녀를 배려한 것인지 일부러 느리게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새하얀 방을 나서자 칙칙한 회색 콘크리트 벽이 길게 늘어선 일자 복도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붉은 머리 여자는 흰색 가운에 손을 넣은 채로 그녀의 보폭에 맞춰 내 몇 미터 앞을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서툰 걸음으로 붉은 머리 여자의 뒤를 쫓아가다가, 드디어 체력에 한계가 찾아온 326호는 목소리를 쥐여 짜내어 여자를 불렀다.


“저기···!”


그녀가 난생 처음으로 내뱉은 목소리는, 너무도 작았다.


폐가 쪼그라든 것처럼, 말을 하기에 필요한 공기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았다.


그녀의 부름에 앞서 걸어가던 붉은 머리 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응? 왜 그러니?”


여자가 돌아보자, 그녀는 힘겹게 숨을 고르고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실 수 있나요···? 너무 힘들어서···.”


“아아···. 그렇지.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폐활량이 딸리겠구나. 미안해. 내가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네.”


붉은 머리 여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등을 돌린 채 자세를 낮추었다.


326호가 멍한 얼굴로 붉은 머리 여자의 등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자, 업혀.”


어깨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업혀···?”


“이상하다. 업힌다는 말은 프로그램 되지 않았나···?”


붉은 머리 여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결국 붉은 머리 여자는 손수 그녀의 손을 이끌어 그녀의 팔을 자신의 어깨 위에 두르게 했다.


반대쪽 손도 똑같이 두르게 해 그녀의 상반신을 자신의 등에 밀착시킨 붉은 머리 여자는, 326호의 양 허벅지 아래를 각각 손으로 받치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몸이 가벼워서인지, 붉은 머리 여자의 등 뒤에 업힌 채로 큰 무리 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갑자기 높아진 눈높이에 순간 시야가 아찔해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무서워져 붉은 머리 여자의 흰색 가운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곧 여자가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붉은 머리 여자의 걸음걸이에 맞춰 그녀의 몸도 함께 위아래로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한참을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갔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여자의 발소리만이 기나긴 복도에 공허하게 울렸다.


“저기···.”


침묵이 꽤나 흘렀을 무렵.


326호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붉은 머리 여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을 바라본 채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무슨 일이니?”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내 이름···? 후훗.”


여자는 재밌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궁금해?”


“아, 그게···. 당신을 부르려면 적어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구나. 그 말대로야.”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곧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시카.”


“제시카···?”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제시카···.”


326호는 여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제시카의 발걸음은 여전히 어디인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제시카···.”


“응.”


“제 이름은···. 뭔가요?”


“네 이름?”


제시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326호는 제시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제시카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네···. 네 이름을 지어줘야겠구나. 뭐가 좋을까···.”


나, 이름이 없는 걸까.


326호는 괜스레 슬퍼졌다.


“음······.”


한동안 고민하던 제시카는,


“크루엘.”


이내 작게 내뱉었다.


불현듯 어깨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326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크루엘(Cruel: 잔혹한, 무자비한)이 좋겠다. 성은··· 그래. 인큐베이터로부터 분리되어 사람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으니, 케이드(Cade: 사람 손에 길러진)라고 하자. 사람의 손에 의해 길러질, 잔혹한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아이. 케이드 크루엘(Cade Cruel).”


“케이드··· 크루엘.”


“그래. 어때, 예쁜 이름이지?”


“······네.”


“좋아. 오늘부터 네 이름은 케이드 크루엘이야.”


“케이드··· 크루엘.”


크루엘은 방금 자신의 이름이 된 단어를 한 번 더 되뇌었다.


이름이 생긴 326호 클론.


그때는 마냥 좋았다.


그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르고.


이름이 생겼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날아갈 듯이 기뻤다.


자신도 드디어 진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그저, 좋았다.


그저.


좋았다.



******



X – Project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또 다른 실험.


그것은, 인간과 컴퓨터의 융합.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 프로젝트였다.


인큐베이터를 이용해 길러낸 인간 클론 개체의 뇌에 외부 전기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수용체를 장치해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이 실험은, 과거 수많은 실패를 발판으로 수도 없는 연구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지만 지금까지 성공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술국 내에서 알렉산더 부부 주도로 완성된 플라네타리움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슈퍼컴퓨터 기반의 차세대 인공지능 플라네타리움은 인간의 뇌와 아주 유사한 구조를 가지며 스스로 사고하고 정보를 학습하며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갖는, 이른바 ‘인간’ 그 자체였다.


알렉산더 부부를 선두로 한 기술국 개발팀은 이 차세대 인공지능을 클론의 인공두뇌 역할을 하는 칩 형태의 집적회로로 연결시키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남은 문제는 이 인공두뇌를 담을 ‘그릇’ 이었다.


인간의 장기와 피부를 포함한 신체 부위는 생각보다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해서, 인공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다고 여겨졌다.


일시적인 대용품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것의 수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몸의 일부 또는 전부가 기계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가 아닌, ‘진짜 인간’과 반영구적으로 접속되는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거기서 그들이 채택한 방법은 실제 인간의 몸에 이 전자두뇌를 칩 형태로 이식하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간단하게 보일 수도 있는 방식이었지만, 당시에는 IC칩을 인간의 두뇌에 접촉했을 때 발생하는 거부 반응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뇌와 IC칩의 융합이 실패하면 그 부작용으로 뇌세포 대부분이 사멸해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생체실험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다.


실험은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실험을 진행한 지 무려 10년 만에, 단 한 개체.


‘326호 클론’ 만이, 이 실험에 적합 판정을 받아 생존하였다.


최초이자 유일한 생존자, 326호 클론 케이드 크루엘은 전투 클론 양성 계획의 첫 단추로서 간단한 기초 재활을 마치고 X-Project의 49기 서바이벌에 투입되었다.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고도 끔찍했다.


인공두뇌에 인스톨 된 자동 전투 시스템에 의해 서바이벌이 시작되자마자 무의식중에 행동을 개시한 326호 클론은, 단 2시간 만에 다른 모든 참가자들을 배제하고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2시간 01분 14초.


그것이, 단 한 명의 연약한 소녀가 나머지 199명을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326호 클론은 네트워크상에 존재하는 온갖 전투 데이터와 지형, 지리의 정보, 도구의 사용법. 움직임 등을 연산해 가장 최적의 전투방식을 실행에 옮겼다.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상용화가 된다면 임무의 효율 향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럴 마음만 먹으면 세계정복도 꿈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부부는 이 실험의 작전명을 ‘Operation Bloody Rain’이라고 칭했다.


작전명, 핏빛 비.


말 그대로 너무도 잔혹하고 무자비한,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연구진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변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49기 서바이벌에서 실행한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3일 뒤, 제시카의 연구실.


-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제시카가 고개를 돌렸다.


“블레이드 박사님. 제이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제시카의 대답에 제이크 연구원은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이크는 그녀가 이끄는 팀 소속의 말단 연구원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326호 클론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왜, 그 애한테 무슨 일 있어?”


“네···. 서바이벌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뒤로 계속 방 안에 틀어박힌 채로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듣자하니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뭐? 너희가 괴롭힌 거 아냐?”


“괴롭히다뇨···! 저희 연구원은 신성한 실험체에게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농담이야. 원인이 뭔데?”


제이크 연구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하루 한 번 실시한 건강검진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고, 뇌파 검사에서도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내가 직접 가볼게.”


X-Project 연구진들이 간과한 것.


그것은 바로, 크루엘 개인의 인격이었다.


인공지능을 인간과 너무 유사하게 프로그래밍을 한 탓에, 크루엘의 뇌에는 전투 병기에게 불필요한 감정ㅡ 죄책감이나 후회 같은 감정도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자기 손으로 수백 명을 살해했다는 그 죄책감과 후회에, 크루엘은 심각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빠져 잠도 들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서바이벌 당시에는 프로그램의 명령에 의해 거의 무의식으로 전투를 실행했던 그녀였지만, 그 실체는 평범한 10살 남짓의 연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크루엘의 방에 찾아간 제시카는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크루엘에게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크루엘. 괜찮니?”


“······.”


크루엘은 한참동안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에 기나긴 정적이 흘렀다.


제시카는 끈기를 갖고 기다렸다.


마침내, 크루엘이 간신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흐느꼈다.


“제가··· 제가 죽였어요.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어요. 이 손으로···.”


그 순간, 제시카의 머릿속에는 ‘실패작이네.’ 라는 한탄보다, 크루엘에 대한 연민이 앞섰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해서.


낙심한 크루엘의 모습에 과거의 자신이 겹쳐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시카는 크루엘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었다.


하다못해 죄책감, 후회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인지하고 디버깅했었다면 모를까.


아무리 인공지능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인격체에게 그 감정을 깨닫게 해버린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과한다고 해도 용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크루엘.” 제시카는 목이 메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크루엘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 검사할 게 있는데, 잠깐 같이 가줄래?”


“······네. 알겠어요.”


제시카가 내린 결단.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데이터의 롤백.


크루엘이 49기 서바이벌에서 전투를 치르기 하루 전까지의 기억을 복원해 덧씌우는 것.


그것으로 그녀가 학습한 죄책감과 후회는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문제는 앞으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또 다시 이와 같은 루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가진 차세대 슈퍼 인공지능의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단점.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 ‘인간의 감정’이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


플라네타리움 서버의 대대적인 롤백 작업이 이루어졌다.



******



케이드 크루엘은 플라네타리움 서버 롤백 이후로 다음 50기 서바이벌이 진행되는 시기까지 몇 달간 여러 번의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서바이벌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그런 끔찍하고도 명확한 실험 결과는 한 번이면 족했다.


50기 서바이벌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실시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크루엘은 다른 X 대원들과 함께 실전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몇 번의 작전에 투입되어도, 몇 번의 살인을 해도, 크루엘의 트라우마는 여지없이 부활했다.


원체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마음이 약했던 그녀는 X의 가혹한 임무 환경을 버텨내지 못했다.


다른 클론 개체로 대체하는 방안도 끊임없이 시도해봤지만, 인공두뇌 이식에 성공한 사례는 그녀 이후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어떠한 방식을 사용해도 크루엘과 같은 수용 적합체는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녀만이 플라네타리움의 전파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무이 전무후무한 실험체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환생을 하듯, 49기 서바이벌이 열린 시각을 기점으로 플라네타리움 데이터의 삭제와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우선 플라네타리움의 서버를 계속 백업하는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차세대 인공지능인 만큼 차지하는 서버의 용량 또한 만만치 않아, 아무래도 크루엘이 트라우마에 빠질 때마다 계속 이 행위를 반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326호 클론의 뇌 과부하였다.


인간의 뇌는 뇌세포에 저장되어있는 중요도 낮은 과거의 기억들을 서서히 잊어가며 자체적으로 밸런스를 맞춰간다.


쓸모없는 기억은 잊혀지고, 중요한 것은 오래 남는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첨삭작업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기억들을 외부에서 전기적 신호를 가해 강제로 제거할 경우, 뇌세포에 심각한 손상이 가해진다.


실제로 계속해서 뇌의 기억을 강제로 수정당한 크루엘의 뇌세포 손상률은 40퍼센트를 육박했다.


특히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 부위의 손상이 심각했다.


더 이상 기억의 수정을 하다가는 뇌를 더 이상 못 쓰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일은, 크루엘이 참여한 마지막 작전에서 일어났다.


런던 시립 아트홀 폭파 사건.


알렉산더 부부가 주최한 플라네타리움 연구 발표회에서,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


X 내부에 혼선이 있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 하에 실행이 된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확실한 것은, X 대원들에 의한 폭탄 테러에 의해 알렉산더 부부를 포함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즉사했고, 그 중에는 SOS의 고위 간부진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사망자들 대부분은 기술국 소속이거나 기술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연구자들 혹은 교수 등의 학위 높은 사람들이었다.


SOS 조직 내 일부에서는 누군가가 조직 체제 전복을 노리고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명령대로 폭탄을 설치한 크루엘은 역시나 작전이 끝난 직후 현장에서 심각한 트라우마 상태에 빠졌다.


제시카가 다른 X요원들에게 그녀를 잘 감시하라고 사전에 일러두었지만, 절망에 빠져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갑자기 돌발적으로 화염에 휩싸인 잔해물 속으로 뛰어들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XZ – 049! 돌아와!”


함께 작전을 실행한 동료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크루엘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시뻘건 화염 속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의 환청만이 그녀의 고막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크루엘은 자신이 불길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팔다리를 훑으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사방에서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단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이 불길 속에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다면, 그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따위는 어떻게 되든 좋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는 막무가내로 불길을 헤치며 계속 나아갔다.


그때였다.


그녀가, ‘소년’을 발견한 것은.


“으으···.”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려와 크루엘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한 소년이 쓰러져있었다.


서둘러 달려가 소년의 상태를 확인했다.


소년의 얼굴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찡그린 얼굴은 고통으로 물들어있었고, 전신 여기저기에 새카맣게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아직 살릴 수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크루엘은 서둘러 소년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들쳐 메고 걸음을 떼려 했다.


“!!”


그러나,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더 이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은 한쪽 무릎마저 바닥에 쿵, 하고 꿇고 말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안 되는데.


이 소년을···. 살려야 하는데.


그러나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녀는 소년과 함께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야에 남은 것은, 눈앞을 가리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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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117화] 진실 (5) +2 21.02.26 36 2 18쪽
116 [116화] 진실 (4) +1 21.02.23 59 1 15쪽
115 [115화] 진실 (3) +2 21.02.19 30 3 20쪽
114 [114화] 진실 (2) +2 21.02.16 41 3 19쪽
113 [113화] 진실 (1) +2 21.02.12 44 2 18쪽
112 [112화] 등하불명(燈下不明) +2 21.01.27 65 2 10쪽
111 [111화] 비밀 (12完) +4 21.01.26 85 3 24쪽
110 [110화] 비밀 (11) +2 21.01.25 84 1 19쪽
109 [109화] 비밀 (10) +2 21.01.24 61 2 23쪽
108 [108화] 비밀 (9) +2 21.01.23 49 3 17쪽
107 [107화] 비밀 (8) +2 21.01.22 57 2 16쪽
106 [106화] 비밀 (7) +1 21.01.21 45 1 18쪽
105 [105화] 비밀 (6) +2 21.01.20 44 2 19쪽
104 [104화] 비밀 (5) +2 21.01.19 43 1 18쪽
103 [103화] 비밀 (4) +2 21.01.18 42 3 19쪽
102 [102화] 비밀 (3) +1 21.01.17 41 3 15쪽
101 [101화] 비밀 (2) +2 21.01.16 42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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