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이세계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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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J
작품등록일 :
2020.09.19 15:23
최근연재일 :
2020.11.0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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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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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축 (1)

DUMMY

#6


기분 탓일까. 같은 길이어도 혼자서 돌아오는 길이 더욱 먼 느낌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별다른 생각도 없이 종수는 그저 터벅터벅 기억 속 길을 따라 걷기만 했다.



고작 발을 들어서 내딛는 기계적인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되었다.


밖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아니... 그런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따지자면 이것은 정신의 문제였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감정들이, 허리 아래로 줄줄이 휘감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전하고, 공허하며... 또 허무하다...


종수는 ‘허’자가 들어가는 세상 모든 감정을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걷는 듯했다.


넋이 나간 채로 걷기를 얼마쯤. 드디어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도착한 집 앞마당에서는, 아마도 내내 종수를 기다리고 있었을 현과 마주하게 되었다.




“음...”


양손으로 지팡이를 붙잡고 선 현은 깊은 고뇌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 굳은 표정에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제나처럼 눈을 꾹 감은 상태로, 현은 종수를 향해 무거운 시선을 날렸다.


“.........”


그 시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으나 종수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일들을 똑바로 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꽤나 긴 정적이 이어진 끝에 결국 현이 첫마디를 꺼냈다.



“......떠났는가?”



마치 성대를 아래에서부터 쥐어짜낸 듯 위태롭게 새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종수는 대답 대신 손에 든 것을 현에게 건넸다.


“으음. 이것은......”


현의 손바닥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보석.


그것은 산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소녀가 마지막에 입은 옷가지와 함께 발견된 유일한 유품이었다.


“그런가. 결국에는......”


현은 눈꺼풀을 닫은 채로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아보였다.


동시에 산이 남긴 유품을 손바닥 안으로 감싸더니, 으스러뜨릴 것처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손을 포함하여 팔 전체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종수, 산은......”


떨림에 가득 찬 목소리로, 현은 천천히 말을 토해내듯 물었다.


“무슨 말을...... 남겼는가?”


잠시 기억을 되짚은 종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슬프게 해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그 외에는?”


실제로 산이 남긴 말은 이게 전부였기에, 종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현은 소리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눈에 띌 만큼 어깨를 늘어뜨리고서 몸을 돌렸다.


툭. 툭. 지팡이에 몸을 맡긴 채 쓸쓸히 계단을 올라가는 현.


“종수?”


한참을 그 뒷모습에 못박힌 종수에게, 현은 등 뒤로 말을 전했다.


“가만히 서서 무엇을 하나. 어서 오라.”


감정을 억누른 듯 몹시 건조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산과 연 단위의 시간을 함께한 현이 슬픔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데, 종수가 그 이상으로 분위기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듯했다.


“......네.”


먹먹한 마음을 억지로 가슴 안에 묻고서, 종수는 최대한 태연히 현의 뒤를 따랐다.




집에 들어온 두 사람은 거실을 지나 복도에 들어섰다.


복도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곳은, 하필이면 산의 방이었다.


현은 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음.”


잠시 머뭇거리다 문 쪽으로 손을 갖다대는 현.


천천히 손잡이를 돌린 뒤, 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


못내 애석한 듯 한숨만 내쉴 뿐 다시 문을 닫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현은 이 주인이 없는 방을 거의 일 분이 넘도록 가만히 바라보다, 종수가 실수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 그제서야 문을 닫았다.


“잠시...... 딴생각을 했구나. 미안하다.”


“아, 네에.”


낮게 중얼거리며 사과한 현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해가 떠있을 때 다시 찾은 현의 방은 더욱 선명하게 현대적이고, 이질적이었다.


현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앞 사장님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등받이를 완전히 뒤로 기울이고 앉더니, 한 손을 이마에 얹고서 말했다.


“후우. 그대도 편히 앉도록 하라.”


시키는 대로 종수도 의자에 앉아 깊숙이 몸을 뉘었다.


“아......”


어제 저녁만 하더라도 그토록 답답하던 이 자리가 어째서인지 오늘은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는 기분이었다.


짐작컨대 오늘은 같은 공간의 두 사람이, 아마도 동일한 생각을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이 순간만큼은 굳이 말을 안 해도 서로가 서로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종수.”


긴 침묵의 끝, 현은 손등으로 눈앞을 가린 채 입을 열었다.


“산은, 울었나?”


왜 그것을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랬는가.”


왜인지 현은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내가 아는 ‘산’은 필시 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을 ‘산’으로 떠났구나.”


“그게 중요한가요?”


“음. 그대는 모를 것이다...... 아니.”


잠시 말을 멈춘 현은 의자를 똑바로 세우더니 감은 눈으로 종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혹 그대, 산에게서 무언가 들은 게 있나?”



물음의 형태를 빌렸지만 이미 속으로는 다 알아챘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차피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기에, 종수는 산이 알려준 것들을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이곳 사도들은 합일교를 탈출하기 전에 이미 여러 번 세상의 경계를 오갔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새로운 ‘나’를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종수가 긴 이야기를 마치자, 현은 어울리지 않게 끙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나 참, 멋대로 별 이야기를 다 하고 갔네.”



어제 저녁 산과 다툴 때 나온 목소리 톤이었다.


“하. 뭐야, 그럼? 어차피 다 아는 사람 앞에서 계속 나 혼자 쇼를 한 거네?”


계속 혼잣말로 볼멘소리를 하던 현은 이마를 탁 치고 웃었다.


“킥킥! 진짜 이게 뭐하는 건지! 짜증나!”


인격이 바뀌기라도 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현은 책상 한쪽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감싸듯 쥐고서 엄지를 이용하여 액정 위를 타다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


멍한 것도 잠시뿐.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남았을까 생각하던 종수였는데, 이 장면을 마주하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 세상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심장이 뚝 떨어진 것처럼 놀란 나머지, 종수가 도저히 말을 못 잇고 있는 그때였다.



“신기한가?”


“어? 네, 에?”


어느 틈엔가 다시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온 현.


그녀는 평소와 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도 해보겠나?”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현은 종수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종수는 자기도 모르게 양손으로 보물을 받아들듯 휴대폰을 받았다.


잠시 눈치를 살피다 전원 버튼을 찾았다.


오른손 엄지로, 눌렀다.


다시 한 번 꾹 눌렀다.


무언가 잘못한 걸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버튼을 하나씩 눌러보고, 액정을 빠르게 연속으로 터치해보고, 기계를 처음 본 원시인처럼 휴대폰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방 곳곳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역시나 먹통이었다.


종수는 이때야 비로소 자신의 조작이 잘못된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냥, 놀림을 당한 것이었다.


“저기......”


종수가 눈빛으로 추궁하듯 쳐다보자 현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네에?”


“다 의미 없다니까? 여기 있는 모든 게......! 다......! 의미 없다고!!!”


쾅! 현은 갑작스레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외쳤다.



“이런 병신 같은 연기를 하는 것도, 이딴 쓰레기들을 모아두는 것도...! 죄다 의미 없어! 나도 알아! 안다고!!!”



쿵! 무언가가 종수의 얼굴을 스치고 날아들어 벽에 부딪치면서 난 소리였다.


급발진하듯 흥분한 현이 책상 위의 마우스를 종수 쪽에다 던진 것이었다.


“혀, 현?”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서, 아직까지도 씩씩거리고 있는 현.


종수는 지금 이 전개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이 그저 낯설고 곤혹스러웠다.


“이제, 다음은...... 나......”


만약 현에게 인격의 스위치 같은 게 있다면 지금은 고장난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후......”


그나마 치솟은 감정을 차츰 가라앉히는 듯했기에, 종수는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저, 저기. 괜찮은 거예요?”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다.”


“네?”


“멀쩡한 사람이 이러겠는가? 음. 머리가 시끄러워서 죽겠구나.”


현은 불평하듯 중얼거리다가 음음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음. 아무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네... 근데 갑자기 왜 그랬어요?”


“으음......”


현은 다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앉더니, 한숨과 함께 되물었다.


“종수. 그대는 아직도 돌아가고 싶나?”


그야 당연했다.


실제로 산과 마지막 대화를 한 뒤로 더욱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현에게만큼은 있는 그대로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망설임 끝에 종수는 대충 얼버무리는 것처럼 답을 회피했다.


“고민할 수 있다. 나도 그랬으니.”


고개를 끄덕거린 현은 얼굴에 슬픈 빛을 내비치며 이어서 말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도 가끔은, 가끔이 아니지, 꽤나 자주 생각한다. 돌아가고 싶다고.”


“네???”


“왜 그러지? 나는 그러면 안 되나?”


“아, 아뇨... 그게...”


피식 실소를 흘리는 현.


종수 입장에서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첫 만남에서 세상의 경계를 넘어선 안 된다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열변을 토한 장본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놀란 종수가 눈치를 살피는 사이 현은 독백하듯 계속해서 말했다.


“단 하나라도 고를 수 있는 입장에서는 이 속을 절대로 모를 것이며, 그러하기에 내게는 더욱이 절실하다. 게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술에 취해서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떠오르는 감정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노채도, 산도, 그리고 그대도...... 모두 사도들에게 구원을 받았지 아니한가?”


“네에...”


“하지만 말이지, 나는 말이다...... 그대들과는 달리, 그 전에 합일교 놈들에게서 버림받은 몸이었다.”


씁쓸히 중얼거리는 현의 입가에 자조의 빛이 스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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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4. 결착, 그리고 결탁 (3) +5 20.10.08 694 25 12쪽
23 4. 결착, 그리고 결탁 (2) +5 20.10.06 699 26 11쪽
22 4. 결착, 그리고 결탁 (1) +6 20.10.04 748 29 13쪽
21 3. 거짓과 진실 사이 (7) +11 20.10.02 785 31 13쪽
20 3. 거짓과 진실 사이 (6) +11 20.10.01 780 28 12쪽
19 3. 거짓과 진실 사이 (5) +15 20.09.30 812 34 11쪽
18 3. 거짓과 진실 사이 (4) +10 20.09.29 804 30 12쪽
17 3. 거짓과 진실 사이 (3) +9 20.09.27 804 30 11쪽
16 3. 거짓과 진실 사이 (2) +6 20.09.27 815 40 12쪽
15 3. 거짓과 진실 사이 (1) +8 20.09.26 853 31 12쪽
14 2. 최선의 선택 (7) +9 20.09.24 862 36 12쪽
13 2. 최선의 선택 (6) +8 20.09.24 905 39 12쪽
12 2. 최선의 선택 (5) +8 20.09.23 940 46 13쪽
11 2. 최선의 선택 (4) +12 20.09.23 971 4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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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 최선의 선택 (2) +15 20.09.22 1,085 5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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