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사는 수라를 보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백로천성
작품등록일 :
2020.09.2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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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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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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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국

DUMMY

옛사람들은 말했다.



표국의 뒷문을 오가는 건 시체와 표사 뿐이다.



시체와 표사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표현한 이 말은 현실과는 달랐다.



사실 표사와 시체를 무림에선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체가 검 아래에 몸이 죽은 사람들이라면, 표사는 검 아래에 이름이 죽은 사람들이었다. 무림에서 표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표사도 없었다.



문파에서 무공을 배우진 못했으나 검을 쥐고 싶은 사람들. 무공은 배웠으나 재능의 벽에 부딪힌 사람들. 뒷골목에서 칼을 배우고 합법적인 돈벌이를 찾아나선 사람들. 칼을 쥐었으나 벽에 틀어막힌 사람들만이 표사를 찾아왔다.



매일 같이 표국의 달구지에는 녹림과 분전하다 죽은 표사들이 실려왔다. 그들은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뒷문으로 출입했다. 돗자리에 둘둘말린 그들은 장작처럼 한더미에 쌓여있다가 가족이 장례를 위해 데려가거나, 야산에 버려졌다.



매일 같이 표국의 뒷문에선 표사 생활을 청산하고자 표국을 뛰쳐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녹림의 한패가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가끔, 아주 가끔씩 표사로 칼을 쥐다가 무림 고수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소수의 성공은 표사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후문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표사에서 무림고수가 되었단 이야기가 무덤을 뚫고나와 복수에 성공한 전설과 같은 궤의 이야기라는 건 감안하지 않았다.



오늘도 표국의 뒷문으로 달구지가 달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표사가 봇짐을 짊어지고 표국을 뛰쳐나갔다. 표국은 이런 무림초출을 말리지 않았다. 오늘도 각양각색의 이유로 표사가 한 명 줄었고, 또다른 칼잡이가 표사가 되겠다며 문을 두드렸다.



표국은 뒷문을 나서는 표사를 시체와 구분하지 않는다.



이처럼 매일매일 사람을 숫자판 위의 역산으로 계산하는 표국의 어느 아침. 봉두난발을 한 노인이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표국의 문을 열었다.



출납을 기록하던 이가 고개를 들지않고 물었다.



"무진표국입니다. 거 뭘 찾아오셨습니까."


"표두는 어딨나."



노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점원은 코를 찌르는 악취에 얼굴을 찌푸렸다. 파리가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표국 안을 휘젓고 있었다. 점원이 애써 손짓하며 파리를 쫓아내고 고개를 들면, 노인의 형형한 눈빛이 점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어르신 오셨습니까!"



점원은 언제 자신이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크게 인사했다. 노인은 그 과장되고 정중한 태도에 흡족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으나, 방금 전 무례를 질타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점원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표두께선 곧 오실겁니다! 마침 요 앞에 나가셨으니 금방 오실겁니다!"


"그럼 기다려야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돌아선 노인의 등판은 태산을 옮겨놓은 든 거대하고 단단했다. 헐렁한 옷차림 속에서도 숨겨진 근육이 꿈틀거리며 그 기운을 드러내려 아우성을 쳤다.



짐을 옮기던 일꾼이 악취에 인상을 쓰다가 노인이 지나가자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마을에서 거한으로 소문난 일꾼은 노인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몸을 구겨넣은 노인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노인이 스스로 그 형형한 눈빛을 숨기더라도, 그에겐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표국의 점원들은 그에게 다가가선 안된다는 공포감과 악취에 대한 거부감이 동시에 온몸을 헤집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그에게 냄새가 나니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말해야 했지만, 문제는 '누가' 말하느냐였다. 무림고수가 사람을 죽이기 너무나도 쉬운 세상. 발을 밟았다는 이유로 칼을 휘두르는 미치광이가 이 세상엔 너무 많았다.



점원들은 노인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는 이 표국의 표두와 아는 사이였다. 표두는 자신이 없을 때 노인이 오라면 대접을 잘하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점원 알기를 촉빠진 화살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가 노인에게 점원들을 죽이지 말아달라 간청했을지는 미지수였다.



결국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누가 무림고수에게 냄새나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식으로 말하겠는가. 숨을 참고 일하는 수 밖에 없었다. 표두가 오면 그도 후각이 있을테니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할 것이고, 그렇게되면 직원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터 였다.



"저희 왔습니다."



청명한 목소리가 표국 안을 울렸다. 의주로 보냈던 표사들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점원은 뒷문을 바라봤다. 달구지 끄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사망자도 없었다.



"마원(馬遠)이구만. 다른 사람들은?"


"이게 뭔....."



표사 마원은 표국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표국 안을 동네 똥개로 걸레질한듯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뒤에 있는 무림고수 노인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점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원에게 고개를 저었다.



"표국 안에서 무슨....."


"콜록! 콜록! 어이고!"



마원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키기 전에, 점원은 연거푸 기침을 하며 마원의 뒤를 가리켰다. 마원은 자신의 등 뒤를 보고 나서야 이 사태가 무엇에서 비롯되었는 지 알 수 있었다. 거지꼴을 한 노인이 눈을 감고 표두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원과 점원이 다시 시선을 맞추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래, 마원. 다른 사람들은."


"제가 대표로 보고하기로 하고, 먼저 돌아갔습니다."


"또?"



점원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혀를 차면서 마원에게 말했다.



"이보게 마원. 내가 할말은 아닌데, 그렇게 너무 착하게만 살면 손해 본다니까. 자네도 가끔씩 좀 일찍 귀가하고 그래야지. 뭐가 좋다고 자네 혼자 다 보고해. 그러다가 문제 생기면 마원 자네가 다 덮어쓰는 거야."


"뭘요. 제가 문제 생길 일 하는 거 보셨습니까."


"자네 칼 솜씨는 표국 내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 그래. 그래도 말이야."



그 말에 노인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점원과 마원은 대화에 열중하고 있어 노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져간 물건에 이상은 없으며, 다음 번에도 같은 상단에서 일을 맡기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오가는 찰나, 점원과 마원은 코를 훅 찌르는 악취에 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이름이 뭐라고?"



거구의 노인이 어느새 두 사람 옆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원은 헛구역질을 겨우 참아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상단의 어떤 장사보다 덩치가 컸지만, 움직이는 데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마원. 마원입니다."


"칼을 잘쓴다지?"


"네. 네!"


"점원."


"녜!"


"아니,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노인은 마원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점원을 불렀다. 점원은 코맹맹이 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코를 막은 채 대답했지만, 노인은 그런 걸 신경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노인은 다시 마원을 보고 물었다.



"마원. 자네가 이 표국에서 가장 칼을 잘쓰나?"


"네, 아마 그럴겁니다. 표사끼리 대련을 허용하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 생각을 묻고 있다."


"네! 네. 제가 제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점원은 상황이 돌아가는 분위기도 잊어버리고 피식 웃고 말았다. 항상 웃는 상에 서글서글하게 굴던 마원이 쩔쩔매는 것도 쩔쩔매는 것이지만, 겸손한 그의 입에서 '제가 제일 강합니다.' 같은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따라나와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표국을 벗어났다. 그가 표국을 나가도 악취는 남아있었지만, 악취의 군락지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해가 내리쬐는 와중에도 냄새 때문에 밖에서 쉬던 짐꾼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이고, 어르신!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리고 점원은 앉아있던 책상에서 일어나 노인을 따라나섰다. 그가 애타게 노인을 불렀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표국 앞에는 마차나 말들을 위한 커다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노인은 그 공터 중앙에 서서 마원에게 말했다.



"이리로 와라."



마원은 잠시 망설였지만, 노인이 눈을 부라리자 헐레벌떡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점원은 혹시나 마원이 죽을까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다른 표사야 쉽게 갈아치운다지만, 마원 같이 칼도 잘쓰고, 말도 잘듣고 표두가 아끼는 표사는 어디서 구할 수 없었다. 점원은 행여나 이 사건으로 마원이 맞아죽는다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웠다.



마원은 칼을 꼭 쥔 채 노인 앞에 섰다. 노인은 팔짱을 낀 자세로 마원을 훑어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솜씨좋은 조각품을 감상하는 듯한 태도였다.



"음."



노인은 눈을 찌푸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동안 마원을 쳐다보던 노인이 물었다.



"어디서 무공을 익힌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구만. 혹시 네 검술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실전 위주로 검을 배운터라 따로 초식이나 검무를 배운 바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어르신께서 만족할만한 그런 화려한 검무를 보여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노인은 그 말에 크게 웃었다. 가당찮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그 반응에 점원도 마원도 당황했다. 가게 안에서 땀을 식히던 짐꾼이며 점원들이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왔다.



표국 앞을 지나던 행인들도 공터에 서있는 두 사람을 보고 차츰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잘생긴 표국 무사와 덩치 좋은 거지 노인이 공터에서 마주보고 서있다면 누구나 눈길을 줄만 했다.



마원은 표사에 불과했으니 싸움이 벌어진다면 마원은 육편 폭죽이 되어 허공에서 펑 터지겠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의 기대감은 개방 장로와 화산파 후기지수의 대결을 보는 듯 했다.



"그래, 실전에서 네 실력을 보여주겠다 이 말이구나."



한참을 웃던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 윗옷을 벗어던졌다. 노인의 옷 안에 숨겨진 우락부락한 근육이 드러났다. 파괴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몸에 현신한 듯 굴곡지고 단단한 몸에는 수많은 전투를 거쳐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표사 마원. 내 소개를 하겠다."



하지만 노인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양팔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숙이자, 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은 피부를 찢고나올듯 그 형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원은 심호흡을 하며 검을 뽑았다. 점원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일 때문에 표두에게 무슨 질책을 받을 지 몰랐으니까. 노인이 새하얀 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나는 무림사괴(武林四怪) 중 하나. 사헌(司憲)이라고 한다. 그럼 어디 그 고강한 검술을 한 번 보여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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