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꾸 회귀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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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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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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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8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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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 - 수룡

DUMMY

또 때리려고? 이번엔 절대 움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의지가 무색하게, 그는 조금은 따뜻한 손길로 나의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미안하네. 기분 풀게나. 자네의 마음이 많이 닫힌 것 같아 충격을 조금 줬네. 나쁜 뜻은 절대 아니었어. 자네, 이름이 뭔가.”


뭐야, 먼저 시비 걸고 화해하자는 이 이기적인 제스처는. 미안하면 다인가. 아무래도 좋아지긴 어려운 사람인 듯했다. 심지어 말투도 이상해. 특성이 무협 관련이라고 말투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 건데.


그래도 그가 한 수 접어줬으니 나도 한 수 접어야지. 사실 내가 많이 흥분해서 그렇지,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열을 낼 일은 아니다. 강형욱은 내 상관이다. 물리적 압박을 가한 것은 물론 과하게 손을 썼지만, 나머지 언행 정도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생활의 한 단면이다.


“신지훈입니다.”

“강형욱일세. 편하게 팀장님이라고 부르게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네. 자네는 아직 부대에 정식으로 소속된 게 아니니 당장 오늘은 휴식하면 되네. 내일부터는 바로 작전 투입이니 생각 정리 잘하고, 잘 쉬게나.”

“예, 그럼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가보겠습니다.”


그는 내게 나지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할 말 다 했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신기했던 건 천천히 발을 내딛는 그의 육체가 조금씩 떠오르는데, 아마도 무협에서 전설의 경지라고 칭하는 허공답보의 한 수인 듯했다. 역시 고수는 고수다.


이제 쉬러 가볼까. 머리가 복잡할 땐 가만히 누워있는 게 최고다. 그래도 고위 각성자 대우는 확실해서 독방을 배정받았으니 나 혼자 궁상을 떨어도 부끄러울 일이 없다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전에, 팀장님에게 건네받은 이 수첩의 내용을 한 번 훑어야 한다. 나의 행동 방침이나, 국제 교전 수칙 등이 적혀있으니 필수로 알아야 한다나. 그러나 글씨도 빼곡하고 두께도 두꺼운 것이 딱히 읽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었다. 활자 공포증에 시달린다고 공부는 중학교 이후로 접었는데. 물론 핑계긴 하지만.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는가.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이 수첩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웬걸, 각성하면 덩달아 머리도 좋아지고 집중도 잘되나 보다. 생각 외로 글자들이 술술 읽혔다. 진즉 이랬으면 서울대를 갔을 텐데. 이래서 각성자 치고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예상치 못한 각성의 효능 덕에 나는 내용을 빠르게 숙지했다. 하지만 잘 읽히고 말고를 떠나서 오랜 시간 묵은 글자에 대한 거부감은 어쩔 수 없거든. 그 탓인지 상당히 나른했다. 이제 그만 침대로 돌아가자.


그나저나 A급이라고 대우가 썩 괜찮았다. 군인으로 따지면 대령급 정도의 대우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필요에 따라 혼자 작전을 구상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단독 작전권이었다. 명령에 구애받지도 않고, 꼰대 같은 강 팀장과 함께 작전을 나가지 않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침대에 기댔던 내 몸은 조금씩 노곤해졌다. 나는 피곤함에 맞서지 않고 이내 잠들었다.



——————————


“제5 공병여단! 빨리 와! 장비 날라! 바로 다리 설치해!”


서울 수복 작전 개시일.

한강, 아니 참극 이후 혈해라고 불리는 바다에 국방색 장비들로 무장한 군인들이 득시글하게 몰려들었다. 파도가 상당히 거센데도 군인들은 그곳에 다리를 설치 하겠다며 달려들었다. 장군이 명하면 군인들은 산도 옮긴다는 말은 오래된 우스갯소리지만, 하위 각성자들까지 군인으로 편입되면서 이제는 실현 가능한 일이 됐다.


각성자들이 파도를 잠재우고, 마나를 이용해 해수면 밑바닥에 철근을 쑤셔 박는다. 그 후 비각성 군인들이 철근의 이음새에 바닥 면을 연결해 다리를 만들어나가는 식. 각성자와의 콜라보 덕에 진척이 상당히 빨랐다.


군인들의 피와 땀이 혈해의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아가기도, 나아가기도 애매한 가장 위험한 지점. 웬만하면 이런 불리한 위치에서는 휴식하지 않으나, 부대의 책임자는 별 이변이 없을리라 생각한 듯했다.


“다리 위에서 휴식한다! 전투 각성자들은 경계 태세!”


B급 이상 각성자들은 서울 강북을 경계하고, 공병들은 구슬땀을 훔치며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헬멧이라도 벗을 수 있다면 시원할 테지만 적진을 앞두고 그럴 순 없었다. 강북은 북한의 최고 전진기지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국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드는 셈이니 경계 태세가 사뭇 엄중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군이 아니라는 듯, 이변은 바다에서 일어났다.


혈향 가득한 바다는 동해와 남해의 괴수들을 잔뜩 끌어들인 상태였고 영악한 괴수는 자신의 먹이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글보글보글

거대한 기포가 해수면에 하나둘씩 맺힌다. 그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인 괴수의 숨결. 장력을 잃은 기포는 펑, 하고 터지며 물보라를 튀겨냈다. 그것만으로 비각성자들은 균형을 잃었다.


부대 책임자가 이변을 깨닫고 재빨리 명령했다.


“이상 사태 발생, 전군 철수!”


생명이 달린 일.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재빠른 기동임에도 불구하고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평소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대로라면 철수에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기포가 아니다. 괴수는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바다에서 커다란 몬스터가 솟아올랐다. 고층 건물에 견줄 만한, 압도적인 크기의 괴수가 짓쳐 올랐다. 몬스터의 육중한 몸뚱아리는 바닷물을 잔뜩 머금었고, 중력을 이기지 못한 바닷물들은 그대로 떨어져 임시 철교를 향해 들이닥쳤다.


파아아아악

괴물의 호흡이 담긴 기포만으로 균형을 잃을 정도였다. 각성하지 못한 이들에게, 몬스터의 무게가 실린 파도는 목숨을 위협하는 재앙이었다.


“으아악!”

“살려줘!”

“죽기 싫어!”


병사들이 죽기 싫어 목이 찢어질 듯이 외쳤고, 반대로,


“정신 차려! 전우끼리 뭉쳐! 전우 버리지 마! 팔장 껴! 뒷 열은 앞 열에 손 올리고 같이 버텨!”


지휘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죽자고 외쳤다.


하지만 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이성과 본능의 영역이다. 하지만 본능의 움직임은 효율을 보장하지 않는다. 괜히 호랑이 굴에 가서도 정신을 차려야 살 수 있다고 하겠는가.


지휘관의 마나 실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령은 아비규환에 그대로 묻혀버렸고 공포는 질서를 앗아갔다. 이대로라면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일한 희망은 각성자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최고위 각성자는 A급인 나였다. 하지만 유일한 희망이 절망을 이기지 못한다면, 희망은 희망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바닷속 절망은 무려 S급의 괴수 종 수룡이다. 나는 죽어가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없다.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저 괴물을 막아서지 못한다. 가까이에서 저 괴물이 소리치기만 해도 난 전투불능 상태에 빠질 테다. 압도적인 수룡 앞에서는 나 역시 비각성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도 도망쳐도 되지 않을까.


“살려주세요!”

“엄마!”


하지만,

생명의 소리가 갈팡질팡 하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지키고 싶다는 마음으로 각성했다. 그런 내가 도망치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살고자 발악하는 소리에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과연 나는 이 무게를 이겨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내 각오가 지니는 무게는, 나를 버리고 눈앞에 죽어가는 이들을 살릴 수 있을 만큼 무거울까. 내가 죽더라도 괴물을 막아설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충분히 경험 했다. 나는 힘들수록 가벼워진다. 한계가 분명한 사람이다.


내가 혼자 도망쳐도 아무도 욕할 수 없다. 사실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도망쳐도 될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하지? 이렇게 나약하면서, 왜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거야.


다시는 한심 해지긴 싫었는데. 여전히 한심했다. 사실 이런 자책도 내 한심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 기제인 거, 충분히 알고 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선이다. 나 자신을 욕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는. 아마 나는 평생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자괴감에 사무쳤다.


어쩌면 지금이 나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뭐라도 하자. 죽더라도 이대로 도망쳐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지 말고, 뭐라도 해보자.


한순간의 오기였다. 나의 두려움과 본능을 이길 만큼의 오기. 더는 한심해지기 싫다는 바람. 나를 죽여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 이 모든 무게가 나를 지탱해 내 발걸음을 움직이게 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S급의 기세가 나를 짓눌렀다. 나를 맞서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 갔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가치의 무게는,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지키려는 마음이 대기의 마나를 끌어들입니다.]


투명한 장막이 생겼다. 모든 물리적 접근을 차단하는 절대 방어막. 내 마나가 허락하는 한 장막은 모든 피해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수룡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장막을 갈랐다. 인간으로 따지면 겨우 잽을 날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내가 보유한 마나의 절반가량이 날아갔다. 코피가 흐르고 현기증이 났다.


수룡이 포효했다. S급 괴수의 원초적인 피어가 나약한 인간들에게 쇄도했다. 장막은 다시 피어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분명해, 장막은 사시나무 떨듯 대차게 요동쳤다.


단 두 번의 공격. 수룡이 앞발을 휘두르고 소리를 질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한계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쿨럭, 과도한 마나 소모로 인해 객혈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희미해진 정신을 따라 장막에 서린 기운 역시도 희미해졌다. 더는 막기 힘들다. 그러나 다리 위엔 여전히 많은 인원이 남았다.


수룡이 나를 노려봤다. 아마도 장막을 펼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래, 죽이려면 나를 먼저 죽여라. 나는 지지 않고 수룡의 눈빛을 응시했다. 내 몸뚱아리 만한 눈동자였지만 최후의 순간, 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수룡은 스프링을 감듯이 자신의 기다란 육체를 움츠렸다. 빠르게 돌진하기 위해 온몸을 수축시키려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이미 야생에서 증명이 끝난 사냥의 자세. 사냥감은 나.


그래, 막을 수는 없지만 이대로 곱게 죽어주는 것도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 들어와. 차라리 같이 죽자.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무형지독(모조)]

아이템 랭크: A급

전설의 독, 무형지독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 끝에 탄생한 모조품입니다. 아쉽게도 성능은 따라잡았으나 향과 색채가 독특해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이 독은 고위 각성자들이 비상시에 특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받은 것. 나는 작은 병을 입속에 머금었다.


과연 독으로 수룡을 죽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래도, 나의 선택으로 한 명이라도 더 살겠지.


수룡이 자신만의 사냥을 시작했다. 쐐애액 화살을 쏜 듯한 소리와 함께, 수룡은 찰나의 순간 동안 100여 미터의 공간을 뛰어넘었다.


죽기 직전에 경험하는 주마등은 1초에 10년을 훑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에게 회고는 사치다. 대신 나는 주마등의 시간을 현재에 쏟기로 했다


수룡의 움직임이 프레임 끊기듯 조금씩 끊어져 보였다. 수룡은 천천히 주둥이를 벌렸고, 거센 숨을 내뱉었다. 숨결만으로 위력이 상당했다. 태풍을 마주하는 느낌. 그러나 나는 각성자다. 태풍은 버틸 수 있다. 뒤로 쏠린 무게 중심을 억지로 끌고 와,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비릿한 혈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여태 피로 물든 바닷물 속을 살았던 수룡의 악취. 아득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무시했다.


나를 내려보는 듯한 눈동자가 드디어 나와 비슷한 크기로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날카롭게 갈린 이빨이 나를 노렸으나 잽싸게 피해 수룡의 주둥아리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작

깨진 작은 유리 파편들이 입속에 얇은 살들을 파고 들어갔다. 다행히 피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수룡의 입속에 혈향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베어진 입속 상처 사이로 무형지독이 스며 들어갔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나는 독이 가득한 모이가 되었다.


“인마, 이게 요즘 유행하는 환경호르몬이란다. 같이 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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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 - 누가 자꾸 회귀하냐? (1) 20.11.01 40 0 12쪽
17 17 - 강형욱의 시간 (5) 20.10.31 42 0 11쪽
16 16 - 강형욱의 시간(4) 20.10.30 52 0 11쪽
15 15 - 강형욱의 시간(3) 20.10.28 52 0 12쪽
14 14 - 강형욱의 시간(2) 20.10.27 48 0 12쪽
13 13 - 강형욱의 시간 20.10.26 66 0 11쪽
12 12 - 계획(5) 20.10.25 61 0 12쪽
11 11 - 계획(4) 20.10.24 5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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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 계획(2) 20.10.23 61 0 12쪽
8 8 - 계획 20.10.22 7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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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 진화 20.10.20 90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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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수룡 +1 20.10.18 11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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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 계엄 +1 20.10.17 19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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