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기회
(실존 인물, 단체, 사건등과는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임상 시험을 주관한 O&C 임상센터라는 곳, 알아봤는데 제대로 된 영업을 한 건 회사 설립 초기인 일년 전 잠깐뿐이었어요.
그 후론 내내 문을 닫은 상탠데, 그 상태에서 소망 노숙인 센터 지하에서 임상 실험을 진행한 거죠.
즉, 이금동씨를 비롯한 분들이 받았던 임상 시험은 불법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에요.”
김종숙이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확인 결과, 정부 승인이 난 합법적인 임상시험인 건 맞았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O&C에 발주를 넣은 곳은 인도에 있는 발렌제약사라는 곳이었는데, 그곳 역시 실제 존재하는 곳이었다.
문제는 인구 많고, 임금 싸기로 유명한 인도야말로 세계 많은 제약사들이 임상시험을 의뢰하는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인도에 있는 제약사가 굳이 인건비 비싼 우리나라에 임상시험을 발주한다?
복제약의 생산 판매가 전문인, 신약개발을 한 전력은 전무한 제약사에서?
어디로보나 의심스러운 정황들이었다.
물론 그런 세세한 사항들을 반상규에게 모두 설명해 줄 필요성을 김종숙은 느끼지 않았다.
“임상 시험의 부작용으로 이금동씨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비슷한 다른 사건도 있고요. 확인 중에 있는데···.”
김종숙의 말 중간에 느닷없이 반상규가 씨익, 입술을 가로로 길게 찢으며 웃었다.
야비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 사이로 주름을 잡히며 김종숙이 인상을 썼다.
“좋은데? 마음에 들어. 완전 새로워!
약의 부작용으로 사람을 죽였다? 신박하기는 한데, 근데 그게 받아들여질까?
하긴 뭐, 아줌씨야 상관 없지? 그걸로 사람들한테 돈이나 뜯어내면 장땡인 거니까."
"반상규씨, 도대체 무슨....?"
"나도 시민단체나 하나 만들어 볼까? 뉴스 보니까 데모 한판씩 해주면 몇백씩 받고 그러더라고? 그게 돈이 돼. 아주 쏠쏠해!"
“반상규씨, 제 말을 좀···”
"보자. 나도 실은 소소한 송사건이 몇 개 걸려있거든? 그래서 개고생을 좀 하는 중인데, 아줌씨 어때?
그 쌈박한 머리로 나도 좀 도와줘보는 게?
아,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거지. 그래야 나도 뭔 말을 좀 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안 그래? 어때? 콜?”
“···가령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다는 거죠?”
반상규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풀어주기보다는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는 일, 이익이 나지 않는 일따윈 일절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은 자였다.
그런 사람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끌어내자면 약간의 편법은 필요했다.
참고로 김종숙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이 온통 뿌연 먼지 속인데 그런 삶은 가능할 리 없었다.
물론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평생을 누군가를 밟고 그 위에 설수 있다면 가능한 삶이기는 했다.
푹푹 발이 빠지는 진창길도, 구멍 패인 아스팔트 길도 모르고 사는 자들.
서리 내리는 추위도, 쏟아지는 땡볕도 모르는 자들.
온실 속 화초의 삶을 사는 소수를 위해 누군가는 밟힘을 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며, 치욕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구제책이 필요했다.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했다.
금전적 보상이 됐든, 처벌이 됐든, 상황에 따라 대가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기 위해 누군가는 행동을 해야 했다.
비록 편법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게 김종숙의 지론이었다.
“뭐가 궁금한데?”
“반상규씨도 소망노숙인 센터에 있었다고 했죠?”
“그래서?”
"입소자 명단에는 없던데요?"
"그래서?"
"왜 없을까요, 명단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센터 놈들한테 물어 봐야지?"
"센터엔 얼마나 계셨어요?"
"뭐 좋은 데라고 며칠씩 있어? 몸이 근질근질 하길래 목욕이나 하고 왔지."
“센터 지하에서 임상시험이 있었다는 건 아세요?"
"알지. 삼백 준다길래 나도 갔었으니까.”
"그래서 하셨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임상 시험에 응하셨냐고요? 먼저 그걸 확실하게 얘기해 주셔야....”
“싫은데? 뭔 줄 알고 내 패를 다 까 보여? 내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으로 보여?"
"............."
"딱 보아하니 요점은 그 임상시험이네, 맞지?"
"............."
"그래, 그럼 받았다 치고 얘기 계속해 봐.”
“몸의 이상이 있나요?”
“이상?”
“성만호씨처럼 불면증이 왔다든가. 아니면 기억이 끊긴다든가. 그게 아니면 확 젊어진 느낌? 한 이십 년쯤 젊어진 느낌이 든다던가.”
“젊어진다고?’
“네.”
“그런 사람이··· 있어?”
반상규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의 표정이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요? 반상규씨도 혹시 그런 사람 알고 있어요?”
“골골하던 육십 노인네가 하늘을 날아다니더란 애기를 듣기는 했지... 그 얘기가 사실이라고?”
“그 사람이 누군데요? 연락 돼요?”
“.............”
“반상규씨, 연락이 되냐고요?”
“아하! 이거였어! 이거였네!”
반상규가 혼자 박수를 치고, 혼자 고개를 끄덕여댔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의기양양한 표정도 지어보였다.
“그깟 후원금 나부랑이가 목적이 아니란 말이네? 그지?”
“?”
“하기는 나 같아도 귀가 번쩍 뜨일 얘긴데, 돈 있는 놈들이야 아주 환장을 하겠지? 왜 아니겠어? 하핫.
돈 가지고도 못 사는 게 딱 하나가 있거든! 금뱃지도 사고, 여자도 사고, 세상을 다 주물럭거릴 수 있는데, 세월만은 막지를 못해.
그런데 그걸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일보직전이다 이 말이지? 응?”
“?”
“그래서 뭐? 주식이라도 사둘 셈인가? 상장회사인 건 맞아?
아니지, 부작용이니 뭐니 이 생지랄을 하는 걸 보니, 협박해서 한 몫 뜯어낼 셈이야, 맞지?
그럼 나는? 설마 쌩깔거야? 알맹이만 쏙 빼먹고 나는 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안되지, 안돼! 이거 왜 이러셔? 아줌씨, 사람을 잘못 봤어.
내 밥그릇 하나는 내가 또 귀신같이 챙겨먹는 스타일이거든!”
드르륵, 의자를 또다시 뒤로 밀며 반상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다른 오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오해를 바로잡아줬어야 했나,하는 생각을 하며 김종숙이 다급하게 말을 했다.
“임상 시험 응했던 건 맞아요? 사실이면 정밀 진단을 받아봐야 해요!”
“왜? 내 몸뚱아리 이용해서 협박 재료로 쓰실려고?”
“자살했어요. 임상시험 대상자였다가 살인자가 된 또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어떻게 죽었는 줄 알아요?”
“...............”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졸랐어요. 죽을 때까지.”
반상규가 콧방귀를 뀌고는 하하하 웃어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김종숙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생존본능이라는 건 대단해서 자살하는 사람에게는 주저흔이라는 것이 남는다고 한다.
목숨을 끊는게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 그게 가능한가?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건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자살자는 홀로 독방에 있었다. 그 상황에서 기도폐쇄성 질식사를 했다.
시신의 목에는 손에 눌린 흔적이 확연했다고 한다.
“아까 말했던 이금동씨란 분의 죽음도 과정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같은 죽음이었다고 봐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자해를 하죠. 주위에서 제지하지 않으면 자해로 죽는 거에요.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공통점들을 보이고 있는 거죠.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폭력성이에요."
".............."
“반상규씨가 임상 시험에 응했다면 똑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그런 순간이 온다면 스스로를 제어하는 건 불가능할 거고요.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타인을 살해하고, 결국엔 스스로의 목숨까지 끊어놓을 거란 말이죠!"
반상규의 얼굴에선 더디지만 분명하게 비웃음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김종숙은 최선을 다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반상규의 말이 맞았다. 김종숙에게는 반상규의 몸이 필요했다.
살아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제보자인 송재명의 도움을 받아, 소망노숙인 센터에 입소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얻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임상 시험에 응했던 사람들의 명단은 구하는데 실패했다.
임상 시험 대상자로 이름이 오르는 동시에 센터 입소자 명단에선 삭제가 됐기 때문이다.
성만호를 찾아낸 건 행운이었다. 그러나 만남을 가질 만큼 대운(大運)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건 앞에 있는 반상호 뿐이었다. 물론 그가 임상 시험 대상자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본인은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센터 입소자 명단에 반상호의 이름은 없었다.
제보자 송재명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센터에 정식으로 입소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끼 식사를 위해, 갈아입을 옷을 얻기 위해 오는 노숙인들이 종종 있다고 했다.
그들의 명단은 따로 작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임상 시험의 피시험자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송재명은 말했다.
반상호가 가능성이 있는 이유였다.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김종숙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상규는 히죽 웃어보였다.
여전히 반쯤은 심각하고, 반쯤은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나쁘지 않네.”
“?”
“이 놈의 세상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팔자려니 해야지 뭐 어떡해?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몇놈 죽이고 간다며? 그럼 뭐 억울할 것도 없네."
이 말은 임상시험에 응했다는 말일까?
김종숙의 눈빛이 반짝이는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바로 느물거리는 태도로 반상규가 말을 했다.
"왜? 이 몸뚱이에 점점 구미가 당기나 봐? 아줌씨, 아주 날 잡아먹을 태센데, 지금? 흐흐흐."
“농담을 할 때가 아니에요. 이건 심각한···”
“심각하지 않으면? 그럼 뭐가 바뀌어? 이제부터 쉽게 쉽게 가려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끝내 반상규는 몸을 돌려 카페를 나가버렸다.
설득에 반 협박까지 곁들였지만 그 어떤 말로도 반상규를 붙들지 못한 것이다. 실패였다.
김종숙으로서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되고 만 셈이었다.
**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카페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반상규는 김종숙의 연락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부터는 아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목소리가 나왔다.
또다른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소망노숙인 자활센터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었다.
**
“뭐해? 말씀 올리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바짝 주눅이 들려 있던 반상규는 다그치는 소리에 움찔했다.
내가 이렇게 쫄 이유가 없잖아? 되레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라는 거 아니야?
배짱 좋게 나가야 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처럼 되지가 않는 반상규였다.
오금이 저려오고 겨드랑이 아래로는 축축하게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젊음을 가져다 주는 약이라고 했다.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전 세계에서 돈 있는 부자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올 게 분명했다.
돈을 싸가기고 와 서로 사겠다 아우성을 치겠지?
여자의 말이 전부 사실은 아니라해도, 혹은 전부 사실이라 해도 상관은 없었다.
부작용이 좀 있다 한들 상관이 없다는 얘기였다. 중요한 건 입소문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옮겨지다 보면 살이 붙고, 있는대로 부풀려 질테고, 그럼 그걸 만든 회사는 노가 나는 것이었다.
상장 회사라면 주가는 하늘을 날 테고, 그럼 로또나 잭팟이 터지는 정도는 우스운 상황이 되는 거였다.
돈 액수가 크다는 건, 파리떼가 꼬이듯 온갖 놈들이 달려붙을 거란 얘기였고, 그중에는 만만치 않은 놈들도 끼워있을 거란 예상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역부족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반상규가 찾아간 사람이 같은 고향 출신의 아는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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