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엘리샤
(실존 인물, 단체, 사건등과는 무관한 창작물입니다)
룸살롱 로즈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손무현은 솔직히 이거다 싶었다.
한상학의 말대로 강의원이 로즈의 실제 주인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연관성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강의원이 유력 인사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로즈를 사용했다던가?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고, 로즈의 지배인 박승훈이 그걸로 강의원을 협박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박승훈씨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젭니까?”
“누구?”
“박승훈 말입니다. 로즈의 부지배인.”
“내가 그딴 놈을 왜 봐?”
“본 적이 없다?”
“없다니까? 용건이 있어야 보지.”
“그럼 박승훈씨가 살해된 것도 모르십니까?”
술술 나오던 정운택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죽어? 살해됐다고?”
정운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연기일까? 연기라면 배우 뺨치는 연기력이었다.
정말 몰랐던 거라면? 박승훈의 죽음과 정운택은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되는데?
강동열의원의 오른팔이라는 정운택이 결백하다면, 강의원 역시 결백하다는 얘긴가? 적어도 박승훈의 죽음에 대해선?
**
강동열의원 지역구 사무실을 나와 시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손무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도시경 강력팀의 팀원이자 선배인 한유건 형사였다.
할 얘기가 있으니 지금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다.
한유건은 오늘 아침에 출근하지 않았다.
서울 출장을 마치고 어제 자정을 넘긴 새벽 시간에 현도시에 도착한 탓에, 시경에는 오후가 되어서야 출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무슨 일로 시경 강력팀 사무실이 아닌, 굳이 커피숍에서 얼굴을 보자 하는 걸까? 손무현은 의아했다.
한유건이 말한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유건 옆에 앉아 있는 이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죽은 임준석의 오두막을 뒤지던 박경사였다.
“인사해. 박중기라고, 지금은 어윤파출소에 있는데, 차형사는 알지? 손형사는 처음, 아니 한번 봤다며?”
“또 보네요.”
히죽 웃으며 박경사가 손을 내밀었다.
도리 없이 손무현도 오른쪽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맞잡았다.
“나랑 동기야. 손형사한테 해명할게 있다고 해서 불렀어.”
시작하라는 듯 한유건이 고개 짓을 해 보이자,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박경사였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 아는 동생이 서울서 주류도매상에 다니거든.
영업부장으로 있다 보니 업소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데, 그 중에 박승훈이라는 사람이 있는 거라.
맞아, 이번에 한천저수지에서 발견된 그 사람.
어쨌든 그 박승훈이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을 좀 빌려준 모양이야.
주류도매상하고 업소는 철저한 갑을 관계거든.
그래서 없는 형편에 자기 돈 천만 원하고 빌린 돈까지 해서, 전부 이천만 원을 빌려줬대.
그 중 오백은 돌려 받았는데, 나머지 천오백을 받지 못한 상태야.
그 상태에서 이 박승훈이란 놈이 사라져버린 거지.”
“········”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돈 천오백 갖고, 경찰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질 않잖아?
그래서 나보고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는데, 나라고 별 수 있어? 그래서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말았지.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전화가 온 거야. 그 박승훈이라는 놈이 비솔나무지기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고···.”
“어디서 들었답니까, 그 얘긴?”
손무현이 물었다.
말이 끊긴 것이 기분이 나빴는지. 박경사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히죽 웃어 보였다.
“천오백이나 날렸으니 포기가 되겠어?
있는 놈들한테는 하룻밤 술값이지만, 없는 놈들한테는 큰 돈인데?
동생 놈이 여기저기 묻고 다닌 모양이야. 그러다 주워들은 거지.
박승훈이 주변 지인들 여럿한테 애기를 했대.
강의원을 직접 만나 오해를 풀겠다, 안되면 현도시로 찾아가 비솔나무지기라도 만나보겠다. 둘이 절친이라고 하니, 강의원한테 직빵으로 얘기가 들어갈 거다, 그런 식으로 말이야.
너도 들었다며?”
박경사의 말에 한유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했다.
“박승훈이 주위에 그렇게 말한 거 맞아. 서울서 나도 확인 했어.”
“그래서 오두막을 뒤졌다는 겁니까? 오두막에 뭐가 있다고 뒤지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아까와는 달리 박경사는 더 이상 언짢은 기색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같은 경찰끼리, 그것도 네 선배의 동기면 당연히 나도 네 선배가 되는데, 이 자식, 버르장머리 좀 봐라···. 뭐 그런 표정이었다.
“영 그러네? 오해 풀자고 나왔더니 완전 잡범 취급이고···. 후배 교육 제대로 안하냐, 너?”
대신 화살을 받은 한유건이 인상을 썼다. 손무현을 보는 눈이 사나웠다.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손무현은 일단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의심을 해서가 아니라,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건데···.”
좁은 동네였다. 어차피 단기간 내에 이 현도시를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선 꼬투리를 잡을 부분이 딱히 없기도 했다.
내내 아무 소리 없이, 옆에서 듣고만 있던 차병석이 벌떡 일어나 구십 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미안하다. 내가 개좆같이 후배 교육을 시켰다. 내 얼굴 봐서 한번은 넘어가줘라.”
질타와 화해의 말을 교묘히 섞어 말을 하는 한유건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서. 선배님이 이해해 주십시오.”
손무현이 다시 사과를 했다.
마지못한 듯 박경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밑 공사 현장에 아는 사람 있다는 거, 진짜였어. 그 사람 만나러 간 것도 사실이고.
의심스러우면 가서 확인해 봐도 좋아. 신우건설 이반장이라고,
전화번호도 불러줘?”
손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유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죄송하다는데 뭘 자꾸 뒤끝 있게 구냐? 모양 빠지게?
같은 경찰이 안 믿으면 누굴 믿으라고?
그런 놈 보면 내가 먼저 나서서 조질 테니까 신경 끊고, 넌 마저 얘기나 끝내, 임마.”
갑작스런 전출 명령을 받고, 연고 하나 없는 이곳 현도시로 내려와 불만이 컸던 손무현이었다.
그래도 지난 몇 달 동안 큰 무리 없이 잘 지내왔다고, 나름 잘 녹아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새삼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것들이 혹시 다 짜고,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왜 영화나 소설 같은데 보면, 단골로 나오는 얘기 있잖은가?
외딴 섬에 어느 날 외지인이 찾아오고, 알고 보니 그 섬 사람들 전부가 하나의 비밀을 안고 있었다는.....
강동열 같은 위인을 무려 다섯 번씩이나 국회의원 뱃지를 달아준 사람들이었다. 어디로 보나 정상이 아닌.....
아니다, 손무현은 엉뚱한 상상으로 빠져드는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픽션일 뿐.
현도시는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었다.
전국으로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이 현도시를 오가는 사람의 수만 해도 하루에도 얼만데?
더구나 지금은 21세기였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경찰이었다.
한유건의 말대로 동료를 믿지 못한다면, 동료 경찰이 뒤를 받쳐준다는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직업이 바로 경찰이었다.
“동생놈 사정이 요즘 워낙 힘들어. 그래서 근처 간 김에 한번 알아볼까 하고 들른 거야.
근데 사람은 없고 문은 열려 있길래,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뒤져 본거지.”
“단서라면 무슨? 몇 달 전에 한번 왔다 간 사람 아닙니까?”
“그 단서 말고, 다른 거.”
“다른 거요?”
“처음 산을 올랐을 땐 한상학을 만날 생각이었어.
비솔나무지기는 죽고 없으니, 그 제자인 한상학이 혹시 뭘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
박승훈 행방에 대해서 말이야.
근데 문이 열려 있고 아무도 없는 걸 본 순간, 다른 생각이 든 거야.
아니, 까짓 거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다 말할게.
휴무날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간 이유가, 실은 하나 더 있어.
박승훈 행방에 대해 묻는 게 물론 본론이고, 이건 에피타이저쯤 되는 건데···.”
돌연 박경사가 비밀 얘기를 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를 지었다.
손무현은 물론 차병석까지 덩달아 진지해져 앞으로 몸을 숙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반면 선배 한유건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이미 들은 내용인 모양이었다.
“이건 소문으로 들은 건데, 한상학이 비솔나무지기하고 대판 싸웠다는 거야.”
“싸워요?”
“그래. 비솔나무 연구를 외부에 맡기는 거에 대해, 처음부터 의견이 안 맞았대.
그러다 점점 사이가 더 틀어졌다는 거지. 몸싸움 직전 수준까지 갔었다고 하더라고.
한상학 그 친구가 비솔나무에 미쳐있는 건 아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인데....
아무튼 저 혼자 독점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까 미쳐버린 거지.”
손무현은 이 비슷한 얘기를 방금 정운택에게서 듣고 오는 길이었다.
이게 우연일까? 박경사 뒤에 정운택이 있다는 처음의 가정이 맞다면?
그럼 두 사람은 지금 서로 짜고,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셈이었다.
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지 그 이유로 한상학을 범인으로 모는 걸까?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이 두 사람의 얘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손무현의 머리 속이 얽힌 실타래처럼 점점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손무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박경사가 씽긋 웃으며 말을 했다.
“물론 다른 얘기도 있고.”
“다른 얘기라면 어떤?’
“연구를 외부에 맡기는 걸 찬성한 쪽은 한상학이고, 반대한 사람은 비솔나무지기였다는 소리도 있어.
워낙 한상학이 강하게 나오니까 마지못해 찬성은 했지만, 비솔나무지기는 내내 후회를 했대.
그래서 뒤집으려다 이 사단이 난 거라는 얘기지.”
“이 사단이라면 한상학이 비솔나무지기인 임준석을 죽였다는 말입니까?”
“소문이 그렇다는 거야, 소문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도 몰라.
두 사람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는 건, 최소한 사실인 것 같아.
최근에 더 악화된 것도 사실인 것 같고.”
“·········”
“그래서 그 관련해서 뭔가 나올까 하고 뒤진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한상학을 용의자로 해서 조사 방향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
“쪽 팔리는 얘기지만 작년에 내가 징계를 좀 먹었어. 파출소로 간 것도 그래서고.
이번 건으로 점수 좀 따서 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고, 내 멋대로 조사를 좀 하려다 딱 걸린 거야.
어쨌든 월권이고, 헷갈리게 한 거 같아 미안해.
어때, 오해는 풀린 거지?”
**
저수지에서 사체로 발견된 로즈 부지배인 박승훈의 동거녀를 찾아냈다.
이름 엘리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인 동거녀는 부산의 한 클럽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클럽 매니저의 사무실에서 한유건 형사는 엘리샤를 대면할 수 있었다.
잔뜩 경계하는 한편, 겁먹은 표정인 엘리샤를 상대로 한유건이 질문을 던졌다.
“박승훈씨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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