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이 돌아왔다 - 47화

서울 논현의 어느 스튜디오.
이른 아침부터 화보 촬영을 위해서 스탭들이 바삐 움직이며 의상을 체크 중이었다.
한 번 화보 촬영을 할 때면 의상 몇 벌만 가져와서 돌려 입고 끝나지 않았다.
의상에 따라서 헤어도 바꿔야 하고 또 주변 배경이 바뀌기도 했다.
게다가 의상은 상, 하의만이 아닌, 모자부터 시계, 반지, 신발, 가방, 스카프, 귀걸이 등 다양한 제품이 몸에 걸쳐진다.
그렇기에 하나하나 일일이 체크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걸 모두 모델이 걸칠 예정이었고.
그리고 그 모든 게 잘 살아나려면 모델의 몸 상태가 가장 중요했고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기도 했다.
주원에겐 아니었지만.
‘열심히 한 대가라고 해야 하나?’
현역 모델보다 더 몸무게가 낮았던 주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몸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저번 화보 때보다 더 쉬웠다.
빼는 게 아니라 역으로 살을 찌우면서 운동만 하면 됐으니까.
그리고 전문가의 관리를 받으며 일정 수준에서 더 이상 몸무게를 안 늘리고 유지시켰다.
덕분에 주원은 화보 촬영이 있기 전까지 화보에 아주 적합한 몸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매니저 이동식이 보기엔 그것도 그다지 쉬워 보이지 않았다.
“스케줄 다니면서 몸도 만들고··· 진짜 독하다, 독해.”
스튜디오로 가는 길, 동식은 주원을 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로맨스’의 촬영이 끝난 이후, 주원은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원래 있던 스케줄들을 뒤로 밀어놓은 게 많았던 터라, 초반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것도 소속사에서 거르고 거른 스케줄인데도 이 정도였다.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이 많았던 탓에.
그나마 한 달이 지난 지금은 그나마 조절이 가능해졌다.
그러면서 전보다 여유롭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초반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온 주원이었다.
“독하긴. 이 정도면 양호하지.”
“이 정도가 양호하다고?”
주원의 말에 동식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몸 만드는 기간뿐만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촬영에서 모습까지 생각하면 절대 양호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원은 고개를 저었다.
“형이 진짜 독한 걸 못 봐서 그래.”
주원은 그 말을 하며 옛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은 아직 만나지 못한 인연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했을 때 더 독한 배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 주원이 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더 고강도의 모습을 보여줬던 배우였다.
그 모습에 주원이 큰 자극을 받고 노력한 덕분에 한층 성장했던 기억이 있었다.
“뭘 못 봐. 지금 보고 있는데. 몸 상할까 봐 걱정이다, 진짜.”
그러나 동식에게는 이것만 해도 충분히 독한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담당 연예인이 배우로서 활약하는 건 참 좋은 일이지만, 몸을 너무 혹사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있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주원은 어느 때보다 건강한 상태였다.
제작자 존의 선물 덕분에.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됐고 얼른 들어가자. 민제는 벌써 와 있다며?”
사실, 오늘 촬영은 주원 혼자서 하는 촬영이 아니었다.
두 명의 모델이 촬영하는 화보였는데 나머지 한 명이 유민제였다.
잡지사 측에서도 될 거란 생각을 하지 않고 내민 제의였는데 주원이 한다는 말에 민제도 오케이를 했다.
그 덕분에 잡지사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응. 온 지 벌써 꽤 된 거 같던데.”
“그래?”
주원은 그 말을 하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스튜디오로 들어가자, 정신없는 내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아, 주원 씨.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일전에 같이 작업을 했었던 데코르 매거진의 이진희 편집장이 주원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주원과 악수를 나누며 정말 고맙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주원 씨는 워낙 잘하시니까요. 그리고··· 다른 곳보다 먼저 저희 매거진을 선택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편집장은 거듭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곤 이어서 사진작가도 소개를 해줬다.
사진작가는 저번 촬영 때 인연이 있었던 신연석 사진작가였다.
짧게 인사를 나눈 주원은 대기실에 있는 민제에게 갔다.
“민제야.”
“주원이형!”
주원을 본 민제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연말 시상식 이후로 서로 바쁜 스케줄을 보낸 터라, 거의 만나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본 주원에 민제는 유독 더 반가워하고 있었다.
“잘 지냈지?”
“그럼요. 형 덕분에 좋은 작품 들어가서······.”
민제는 주원을 만나자마자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주원은 민제의 말을 들어주며 바로 메이크업부터 받았다.
“너무 아침이라 힘드시죠?”
민제가 메이크업을 받는 주원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침 스케줄이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로맨스’ 때부터 계속 주원이 무리는 하는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아침보다 예리가 더 힘들어. 지 빼놓고 찍는다고 아주 난리를······.”
주원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침 일찍 촬영이야 흔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이 자리에 없는 예리 때문에 골치 아팠던 주원이었다.
“이거 남자 패션 잡지인데······.”
“걘 상관없대. 남장하고 찍으면 된다고.”
“···근데 예리 누나는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그건 인정.”
민제의 말에 주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마스크가 좋아서 뭔 짓을 해도 잘 어울릴 거 같은 예리였다.
“아, 맞다. 형, 제가 간단하게 먹을 것 좀 싸 왔는데 드실래요?”
민제는 그 말을 하며 뒤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꺼내놓은 건 도시락 세트였다.
그런데··· 그 양이 그냥 일반적인 도시락 세트가 아니었다.
“···이게 간단한 거야?”
주원은 대기실에 놓인 테이블이 꽉 차도록 펼쳐놓은 음식들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한 종류씩 맛만 봐도 금방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그것에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짝만 맛봤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화보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났다.
“굿! 포즈 계속! 둘이 같이 고개만 돌리고··· 굿굿!”
화보 촬영이 시작되고 사진작가 신연석은 전보다 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둘 중 한 명과 작업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모델보다 더 모델 같은 주원도 좋지만, 아이돌로 활동하며 카메라에 많이 노출된 민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게다가 누구 하나 외모가 딸리는 사람이 없었다.
비율도 둘 다 우월했고.
그런데 지금 그 둘을 한꺼번에 찍고 있으니 더 없이 만족스러운 연석이었다.
“그냥 모델 하시라고 하면 안 될까요···?”
결과물을 보고 있던 편집장은 저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저번보다 더 적극적으로 어필을 했다.
“···따로 얘기 해보겠습니다.”
동식 역시 편집장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어차피 주원이 거절할 걸 알고 있는 동식이었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그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예의상 대답을 해줬다.
“좋아요! 홀드! 조금만 더!”
그러는 와중, 연석은 사진작가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면서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더 긴 촬영 시간을 가졌다.
그 때문에 매니저들이 나서야 했다.
둘 다 다음 스케줄이 있었기에.
“라스트!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후, 한참 동안 이어진 화보 촬영이 모두 끝났다.
사진작가, 편집장부터 다른 스탭들까지 모두 만족한 촬영의 끝이었다.
“형은 못 하시는 거 없는 거 같아요.”
촬영이 끝나고 민제는 존경스럽다는 듯 주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주원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있어. 못하는 거.”
“네? 어떤 거요?”
“예리 컨트롤.”
“하하.”
주원의 말에 민제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맞다. 형, 혹시 남감독님한테 연락받으셨어요?”
“연락? 무슨 연락?”
“아직 안 하셨나 보네요. 아마 곧 연락이 올 거예요.”
“···?”
민제의 알 수 없는 말에 주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의문을 풀기도 전에 재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원아, 인터뷰 늦었어.”
“민제야, 빨리 가자. 퇴근 시간 걸리면 제시간에 방송국 못 가.”
연석의 사진작가의 열정을 불태운 덕분에 시간이 늦어진 터라, 두 매니저가 다음 스케줄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주원은 오랜만에 만난 민제와 급하게 헤어져야 했다.
“민제야, 나중에 보자.”
“네. 오늘 정말 수고하셨어요!”
그 말을 끝으로 민제와 헤어진 주원은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했다.
LA 노스할리우드 근처에 위치한 아레나 스튜디오.
이곳은 무수한 역사를 가진 여러 제작사와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명작을 생산하며 단숨에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제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곳이기도 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건 이곳의 수장인 마틴 피크렌의 역할이 가장 컸다.
작품을 보는 눈도 뛰어났지만,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마틴 덕분에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빠르게 일을 진행시키는 능력은 미국 내에서 최고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후우······.”
마틴의 사무실 안.
최근 원하는 배우를 찾는 데 난항을 겪고 있던 마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사무실 안으로 그의 파트너인 제이 톰슨이 들어왔다.
“헤이, 마틴. 이것 좀 봐봐.”
“미안하지만, 난 뭔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제이.”
제이는 설명도 없이 마틴에게 본인의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러나 마틴은 볼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건 봐야 할걸. 네가 그렇게 찾던 원석을 내가 찾아왔으니까.”
“제이, 네가 나한테 그 말을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이것까지 포함하면······.”
“서른다섯 번. 잘 알고 있으니까 일단 봐봐. 이번엔 진짜야.”
제이는 마틴의 말을 자르며 다시 한번 태블릿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틴은 못 이기는 척, 태블릿을 받았다.
태블릿에서는 영화 ‘그 현장’에서 주원이 연기한 부분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음······.”
마틴은 이전의 심란한 눈을 버리고 어느새 집중하며 영상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충분히 훌륭한 연기야. 훌륭하긴 한데······.”
“왜? 어떤 게 마음에 안 들어?”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자 제이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틴은 태블릿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제이, 이런 크레이지 보이는 넘쳐난다고. 어딜 가도 충분히 구할 수 있어.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미친 인간들도. 그리고 난 이런 느낌과 이런 연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이것보다 더 복합적인 걸 원해.”
“아니라고? 그럼 이것도 한 번 봐봐. 이 배우가 가장 최근에 보여준 연기야.”
제이는 바로 이어서 ‘갑자기 로맨스’를 보여줬다.
그리고 곧 마틴의 눈이 달라졌다.
“···제이. 이 배우가 원석이라고?”
영상을 모두 본 마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봤다.
“원석이지. 정말 훌륭한 원석. 어때? 이번에는 마음에 들어? 정말 어렵게 찾았어, 마틴.”
“이건 원석이 아니야. 이미 가공되어 있다고! 이렇게 어린 배우가 이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니···!”
처음 사이코패스인지 소시오패스인지 모를 연기를 할 때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분명 연기를 잘하는 건 맞지만, 자신이 원하던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워낙 어려 보였기에 다른 쪽 연기는 기대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다음 영상에서 완벽히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모습에 다양한 연기까지 보여주는 걸 보고 눈이 돌아간 마틴이었다.
“오, 제이. 이 배우를 어디서 찾은 거야? 도대체 어느 나라가 이 배우를 숨기고 있던 거야?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마틴? 마틴?! 내 태블릿은 주고···! 저 도둑놈······.”
감탄를 거듭하던 마틴은 순식간에 외투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제이가 마틴을 애타게 불렀지만,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 작가의말
제목을 다시 원래 제목이었던 ‘악역이 돌아왔다’로 변경을 생각 중입니다.
현재 제목은 유입을 늘리고자 바꿨던 제목인데 영 안 맞는 느낌이 들어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대급 악역 천재’ / ‘악역이 돌아왔다’ 중 어떤 제목이 더 괜찮을지 독자님들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제목이 더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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