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혼사의 허락.
"이른 아침부터 왕후께서 나를 찾으신다고?
"그렇습니다. 장군. 정원 터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함께 가시지요.
“알았네. 바로 채비할 테니 잠시 기다리게.”
이른 아침부터 고승의 거처로 향했던 내관은 곧 그를 데리고 왕후가 있는 정원 터로 향했다.
왕후는 정원 터에 자리한 연못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과 깃털로 장식된 조우관을 쓴 고승이 왕후 앞으로 다가가 호궤했다.
“소신을 찾아계시옵니까. 전하.”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연유로 부르셨사옵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 장군께 민망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말씀드려야 하니 참으로 참담할 따름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전하?”
먹이가 담긴 상자를 내관에게 건넨 왕후는 내관들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내관들이 묵례하고 거리를 두자 그녀가 곧 말을 이었다.
“명림(明臨)씨가 저물고 난 뒤, 우리 대실(大室)씨에서 태왕 폐하의 은덕을 받게 해준 그대의 상부에 보답하고자 저 역시 그간 공주와의 혼사를 주선하지 않았습니까.”
“예. 전하. 항상 망극하게 여기옵니다. 헌데 공주님과의 혼사 문제 때문에 부르셨사옵니까?”
“그래요. 헌데 장군께 차마 말씀드리기 민망스러운 상황이 발생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전하, 민망하다니요? 무슨 일이시기에..?”
“하아.. 참.. 이를 어찌해야 할지..”
젊은 왕후가 한탄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십 대의 젊은 장수 고승은 왕후의 근심을 덜어주고자 애써 미소 지으며 에둘러댔다.
“전하께서 소신에게 여러모로 관심 가져주신 점 크게 황공할 따름이옵니다만 혼사 문제라면 소신 역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사옵니다. 공주님께서 스스로 저를 간택할 수 있도록 날마다 정진을..”
“고승 장군, 애석하게도 그대의 그 정진이 헛수고가 될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대실진은 뒷짐을 지고 연못의 다리를 배회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공주에게 그대를 주선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그러하옵니다. 전하.”
“저 역시 재차 고승 장군과의 혼사를 주선하고 강조했습니다만 공주가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더니 급기야 어제 출궁을 했다고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공주님께서 출궁을 했단 말이옵니까?”
호궤하고 있었던 고승이 흥분하며 벌떡 일어서자 대실진은 고개를 저으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 혼사 문제로 제가 야단을 좀 쳤었지요. 우리 고승 장군만 한 사내가 또 어디에 있다고.. 이후 폐하와 아웅다웅하던 공주가 글쎄 달랑 시위 하나만 데리고 출궁을 했다고 하니.. 황실에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입니까.”
“하오나 공주님께서 어떻게 출궁을 하셨단 말입니까? 도성의 수문장들이 결코 출궁을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옵니다.”
“시위인 표영을 데리고 나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성문 밖으로 나가게 된 건지는 저도 알 수가 없군요.”
“어찌 공주님께서..”
고승이 이를 악물고 침울한 표정을 짓자 대실진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짐작건대 공주에게 미리 점쳐둔 외간 사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전하! 외, 외간 사내라니요!?”
“공주의 행실을 보아하니 분명 외간 사내가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전하, 그 외간 사내가 오부 귀족의 자제라면 정당히 겨루어서 간택을 받으면 되는 일 아니옵니까?”
“그 외간 사내가 오부의 귀족이었다면 굳이 공주가 출궁을 했겠습니까?”
“하.. 하오면?”
“태왕 폐하께서 심란한 공주가 머리를 식힐 겸 출궁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공주가 나들이하러 간 것이라면 응당 호위군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시위인 표영만 데리고 출궁했다고 하니 놀러 나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부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면 대체 공주님께서 어떤 자와..”
“어미 된 저 역시 그게 궁금하단 말입니다. 불쌍한 우리 공주가 시위 하나만 대동하고 출궁했는데 장군은 걱정이 되질 않나 보군요..”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소신이 속히 군사들을 이끌고 공주님을 찾아 모실 것이옵니다!”
“암요. 공주님께서 어떤 위험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을지 모르니 장군께서 속히 움직여주셨으면 합니다.”
“전하, 지금 당장 군사들을 꾸리겠사옵니다!”
“그러셔야지요. 공주와 시위를 안전하게 모시면 태왕 폐하께서도 그대를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고승은 부랴부랴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찰갑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공주님께서 어느 모리배의 농간으로 출궁하셨다고 한다! 서문, 북문, 동문으로 각 이백 명씩 출궁해 수색하고 나머지는 남문으로 출궁한 뒤 수색을 시작할 것이다!”
고승이 사병을 이끌고 출궁했다는 소식은 곧 평원왕 고양성에게도 당도했다.
“고승 장군이 공주를 찾기 위해 사병 천명을 동원했다고?”
“그러하옵니다. 폐하. 동문 서문 북문으로 각 이백 명의 군사가 출궁하였고 나머지는 남문으로 출궁했사옵니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가는구나.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고승 장군이 정원 터에서 왕후를 알현하고 난 뒤에 사병들을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
“왕후를 알현했다? 음.. 알았다. 수고했다.”
“폐하..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시옵니까?”
왕후가 고승을 두둔하며 혼담을 주선하는 것을 좌시하던 평원왕은 공주의 호위를 위해 이미 보낸 을지문덕을 믿고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이른 아침에 온달을 포함한 사내들은 새로운 귀한 손님들을 위해 욕조에 물을 길어오느라 여느 때보다 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찍 기상한 고담현은 표영과 함께 부정주와 으리가 있는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틈으로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니 부정주의 곁에서 으리가 상처로 실명한 눈을 덮기 위한 천을 동여매고 있었다.
‘아.. 어머님께서 한쪽 눈이..’
으리가 마무리 진 모습을 확인한 고담현은 긴장감을 풀기 위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어머님. 아침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아.. 일어나셨군요..”
고담현과 표영이 방 안으로 들어와 묵례했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낭자들께서 잘 주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누추한 곳이라 불편했을 텐데..”
“아닙니다. 어머님. 기분 좋게 잘 잤습니다.”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 말씀해주시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우리 낭자께서는 어찌 우리 온달을 만나러 왔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정주의 물음에 고담현은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님. 소녀 온달님과 혼인을 허락받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혼인이라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머지 눈동자가 하얀 부정주가 경악하는 모습에 으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이 아가씨가 정말 공주님이라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머님, 어제 온달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온달님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어머님께서도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고담현과 표영이 재차 허리 숙여 예를 표하자 당황한 으리가 부정주에게 속삭였다.
‘어, 어머니. 아가씨들이 어머니께 허리를 숙이고 있어요..’
“아가. 너도 방금 들었니? 혼인이라니.. 우리 아들이 무슨 생각으로 허락을 했단 말인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구나.”
으리 역시 당황한 표정을 하며 묵례하고 있었다. 부정주는 침상에서 나와 으리의 부축을 받으며 고담현을 향해 다가갔다.
“잠결에 꿈속에서 듣는 말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정주는 희미한 고담현의 모습을 향해 손을 뻗어 살며시 그녀의 팔을 잡고는 조심스레 더듬어 내려가며 곧 손을 맞잡았다.
따듯하고 가녀린 공주의 손을 쥔 부정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결한 비단옷에 가녀린 손만으로도 평범한 규수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데 어찌 우리 아들과 혼인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부ㅇ.. 아니 아버님께선 제가 어릴 적 늘 온달님에 대한 말씀 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낭군이신데 직접 뵙고 나니 소녀 확신이 들기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낭자의 아버님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하물며 제 아들은 고려에 지인도 많지 않은 사내인데.. 온달이 대체 뭐라고 대답했단 말입니까?”
“오히려 온달님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말씀해주셨습니다. 흔쾌히 허락해주었습니다.”
“온달이 먼저 기다리다니요.. 정말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낭자는 분명 귀한 가문의 규수일 텐데 저희가족은 모리배들을 피해 산속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머님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온달님의 가족분들 모두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생활하실 수 있도록 해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고운 분께서 가슴 벅찬 말씀을 해주시는데.. 두 눈으로 낭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안타까워하는 부정주의 표정에 고담현은 곧 굳은살이 투박한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아, 아가씨!!”
당황한 표영의 태도에 공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정주는 조심스레 고담현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형상을 손으로 느꼈다.
“이렇게 고운 분께서 어찌 우리 아들에게 찾아오게 되었는지..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온달이 그저 낭자에게 홀려서 대답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역시 거짓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맹세합니다.”
고려시대는 남녀 간의 혼인에 있어서는 서로의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집안이나 재력, 가문 같은 것보다도 남녀의 감정이 혼인을 결정함에 있어서 최우선으로 여겼던 가치였다.
“아들도 그렇고 낭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둘이 좋다면야 어미 된 자로써 어찌 부정하겠습니까..”
“어머님. 그 말씀은 허락을 해주신단 말씀입니까!?”
“진심이라 믿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저 낭자께서 저의 아들을 잘 보살펴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큰절 올리겠습니다.”
고담현과 표영이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자 부정주는 허리를 숙였고 당황한 으리도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저기.. 그럼 저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방문 밖으로 나서는 으리를 따라 고담현 역시 따라 나오며 말을 이었다.
“저기, 으리야?”
“예.. 아가씨.”
“저기 부탁이 하나 있어.”
“어떤 부탁이신지.. 말씀하세요..”
“보아하니 으리는 나와 체구가 비슷해 보여서 하는 말인데 으리가 입은 것처럼 나도 입을 수 있는 바지저고리같은 게 더 있을까? 지금 옷은 너무 불편해서 옷을 빌렸으면 하는데..”
“아.. 옷 말입니까? 그럼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으리가 준비해준 옷을 건네받은 고담현은 곧바로 비단옷에서 평민들이나 입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하. 으리와 비슷한 체구이니 내 옷처럼 딱 맞네. 고마워. 나중에 비단옷을 선물해줄게.”
“비, 비단옷이라니요.. 아가씨..”
“항상 다정하게 대해주는 으리니까 보답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머지않아 우린 곧 가족이 될 거잖아?”
“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가씨..”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될 테니까 혼자서 모든 일을 도맡으려 하지 말고 내게도 일거리를 맡겨줘. 누가 되지 않도록 도와줄게.”
“아.. 아닙니다. 어찌 객으로 오신 분들이신데..”
“괜찮아. 사양 말고 맡겨줘. 아침 식사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어떤 걸 도우면 될까?”
부정주에게 혼사에 대한 허락을 받은 고담현은 어느 때보다도 들뜬 기분으로 평민의 삶이라는 새로운 체험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
한편 고승은 사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안성터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공주님과 시위 표영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라. 결례가 되지 않도록 모셔야 할 것이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예! 장군!”
고승은 말 위에서 이를 빠득빠득 갈며 채찍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감히 어떤 놈이 내 허락도 없이 공주님을 농락하려 드는 건지, 간이 부어도 한참 부은 놈이로구나. 어떤 놈인지 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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