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과거를 알게 되다.
평강공주의 며칠간에 걸친 출궁은 고승을 비롯해 공주에게 관심을 두던 귀족 자제들에게 경고성 메시지와 같았다.
상부의 고승이 군사를 이끌고 공주를 찾아오겠다며 난리를 떨었으나, 이후 퍼진 괴소문은 그를 더 난처하게 만들었다.
귀족들의 눈에 공주의 가장 유력한 부맛감이었던 그가 탈락하면서 이후부터는 모두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덕분이라고 할지, 때문이라고 할지 귀찮게 구는 이들이 적어지자 공주는 더없이 편하게 온달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공주는 입궁한 후부터 외출을 금하며 방에 처박혀 온달과 자신을 위한 수의를 만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신과 함께 살아갈 낭군이 온달이었으나 다른 고려인에 비해서 체격이 컸기에 예상보다 옷을 크게 만들고 있었다.
“음.. 이 정도 품이면 되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있었을 때 많이 안겨보기라도 할 걸..”
재료들을 자르고 한 땀 한 땀 열심히 꿰매고 있을 무렵 문밖에서 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태자 전하께서 드셨사옵니다.”
“으음~ 뫼시어라.”
방안으로 들어온 태자는 갖가지 재료와 실이 난무하는 어지럽혀진 방을 보고 입을 벌렸다.
“누님.. 이게 다.. 무엇이랍니까..”
“쉿. 처음이자 마지막 작업 치고는 아주 잘하고 있으니까 기대하라고~”
“그나저나 누님. 마방에서 말을 정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주 괜찮은 말을 정했어요. 이제 며칠간 굶기고 나면 난리가 날 거예요.”
“말이라는 동물은 무척이나 예민하니 굶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정말 쉽게 빼낼 수 있을지도 몰라. 말에게는 미안하긴 하지만.. 나중에 엄청 살찌워줘야지..”
“때가 되면 말은 반출에 성공하겠지만.. 서옥은 언제쯤 지어질까요?”
“음.. 장인들이 다 합심하면 늦어도 보름 이내로 완성되지 않을까?”
“그렇다는 건 누님이 다시 출궁하는 날도 그쯤 된다는 말이 되겠네요..”
“내가 다시 출궁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모든 게 다 잘 될 테니까. 우리 낭군님은 잘 계시려나..? 아참. 부탁할게 하나 더 있어.”
“뭔데요 누님?”
“서옥을 짓고 있는 내성에 쌀 한가마니를 좀 보내줬으면 해. 이제 가족이 될 아이가 있는데.. 을지문덕의 처가 될 사람. 그 아이와 약속을 했었어.”
“을지문덕의 처가 될 사람과 무슨 약속에서 지기라도 하셨어요? 쌀 한가마니라니요..”
“내가 낭군님을 만나러 갔을 때, 그 아이가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대접해줬던 적이 있었거든. 내게 얼마나 살갑게 대해줬는지 몰라. 그리고 너무 예쁘고.. 마치 귀족 같은 아이였어. 어머님도 그렇고..”
“우리 누님을 대접한 자라면 응당 보내줘야겠군요. 바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옥이 완공되는 대로 보고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낭군님을 훈련할 테니까. 아니다, 을지문덕에게 기별을 넣어서 보내면 좋을 것 같은데.”
“누님. 을지문덕은 중리부 소속이라 부왕의 명 없이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예요.”
“그래도 을지문덕도 처가 될 사람을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아버님께 잘 말씀드리면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음.. 말씀은 드려볼게요. 허나 장담할 수는 없다는 거 알아두세요.”
“그래. 알았어. 부탁할게.”
“그나저나 누님..”
“왜?”
열심히 수의를 만드는 누나의 모습에 초를 치고 싶지 않았던 태자 고대원은 흉흉한 소문이 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한숨을 내쉬고는 바느질 중인 누나의 손을 잡았다.
“누님의 선택이 그릇된 선택이 아니길 바랍니다. 누님이 그 온달이라는 사내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해? 내가 사내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 봤었니? 나 지금 충분히 즐겁고 행복해.”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온달. 그자를 잘 육성시켜 주세요. 저도 항상 도울 테니까요.”
“으그~ 태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공주는 태자를 안아주며 고마움을 표했다.
평강공주의 작업실(?)에서 나온 태자는 곧바로 평원왕의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의 입구에 도착하자 티격태격하는 태왕과 왕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런 상황에 태자까지 등장하니 내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폐하. 대체 공주가 저리도 일탈을 벌이는데 좌시하시겠단 말씀이옵니까?”
“더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으니 부인께서는 자중하길 바라오.”
평원왕이 공주에 대한 말을 꺼내는 왕후를 피하려 들자 왕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오나 폐하! 공주가 일탈하고 난 뒤,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괴상한 소문!?”
“폐하! 고려의 공주가 평민과 맺어지려고 한다는 소문 말이옵니다! 이를 그냥 잠자코 지켜보실 것이옵니까!?”
“누가 그따위 소문을 퍼뜨린단 말이오! 감히!”
“황공하오나 퍼지고 있는 소문이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는 왕족인 계루부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치이온데 어찌 좌시하신단 말이옵니까!?”
“어허! 듣기 싫소! 그만 하라지 않았소!?“
입구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태자 고대원에게 내관이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태자 전하. 내전으로 드시겠사옵니까..?“
”그래. 지금 부왕을 알현할 것이다.“
”태왕 폐하~ 태자 전하 드셨사옵니다~!“
티격태격하던 두 부부의 목소리가 멈추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들라하라!“
태자 고대원은 두 부부를 눈으로 번갈아 힐끗 쳐다보고는 자세를 낮추며 예를 올렸다.
”마침 잘 오셨어요. 태자. 이 어미가 태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젊은 왕후는 조금 전과는 다른 나긋한 태도로 전환하며 말을 이었다.
”하문하시옵소서.“
”태자도 잘 알 것입니다. 공주가 입궁하고 난 뒤 소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 저도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 소문이 무엇이던가요? 태자.“
”부왕,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려의 공주가 한낱 평민 따위를 사모해 출궁을 했다..라는 소문이 도성에서 돌고 있사옵니다..“
”폐하. 이것 보시옵소서. 태자마저도 알고 있는 소문이지 않사옵니까.“
”하아..“
한숨을 깊게 내쉰 평원왕은 어좌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관에게 고했다.
”내관은 들어라.“
”예. 태왕 폐하.“
”다음 해까지 공주의 혼담에 대해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엄벌을 내릴 것이라는 어명을 내리노니, 막리지 연자유에게도 이를 전하여 공포토록 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태왕 폐하.“
”폐하! 어명이라니요!? 명을 거두시옵소서!“
”지금 이 순간부터요. 부인. 자중하지 않으면 부인도 엄벌을 받을 수 있음이오.“
”폐하! 어찌 그런..!“
”부인께선 그만 물러가시오. 왕후를 뫼시어라!“
”폐하!“
곧 궁인들이 몰려들어 왕후를 물리자 시끄러웠던 내전이 고요해졌다.
”태자는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예. 부왕. 누님의 혼사문제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뵈었사옵니다.“
”담현이가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은 몰랐다.“
태자 고대원은 옥좌가 있는 돌계단에 한층 올라가 호궤했다.
”너는 태자이자 훗날 태왕이 될 몸이거늘 어찌 호궤한단 말이냐?“
”부왕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부왕께서도 온달 그자를 만난 적이 있지 않으시옵니까? 소자에게도 그 온달이에 대해 부왕께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해주시옵소서.“
”아비가 온달을 만난 것에 대해 태자가 어찌 궁금해한단 말이냐? 하물며 온달에 대해 아비가 어찌 안다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냐?“
”부왕, 소자는 부왕을 이어 태자가 될 것이옵니다. 부왕께서 무언가 생각하신 이유로 지금 이 상황을 관망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되어 여쭈었사옵니다.“
평원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찡그린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부왕, 하물며 어머님의 말씀대로 괴소문은 분명 계루부와 절노부에 결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부왕, 아니 아버님의 의중을 소자에게도 알려주시옵소서.“
태자의 간청에 평원왕은 곧 손뼉을 크게 치며 주변의 내관과 궁인들을 전부 내전에서 물리쳤다.
”태자는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공하옵니다.“
돌계단을 올라 아들이 곁으로 다가오자 평원왕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가 하는 말은 절대 함구해야 할 것이다. 네 누나에게도 계모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대원아. 온달은 평범한 속특인이 아니란다. 그는 과거 황실 직속의 궁장이었던 부정웅의 딸 부정주의 아들이다.“
”부정 가문이라면..“
”부정(負鼎)씨는 오랫동안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맥궁을 제공했던 가문이었다.“
”아버님. 하온데 어찌 부정주라는 자의 아들이 온달일 수 있사옵니까!?“
”아비가 태자였던 시절에 온달의 부친은 평범한 속특인이 아닌 수우각을 제공하던 강국의 왕족이었다. 그자가 부정주와 눈이 맞아 온달을 낳았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아신 네 조부께서 그들을 좌시하지 않았다.“
”허면..“
”네 조부께서 부정 가문의 씨를 모조리 말려버렸고 가신들을 보내 온달의 부친까지 해하였지.“
”맙소사.. 그렇다는 건 저희 황실이 온달의 원수가 된다는 말씀이옵니까?“
평원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워낙 손을 쓸 틈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표영이 전의 시위였던 유수가 어떻게든 온달 가족만이라도 구해내려고 애썼건만 실패했었지. 그렇게 부정가문이 몰락하고 난 뒤 다 죽은 줄 알았던 온달과 부정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님께선 어찌하시려고 온달을 그대로 두신 것이옵니까? 온달이 왜 고려에 남아있는지 저는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사온데 설마 복수를 위해 남은 것은 아니겠사옵니까. 이 사실을 온달도 알고 있사옵니까?“
”온달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공주를 가만히 두었을 것 같으냐? 아마 온달은 아직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부정주를 만났을 때 그녀는 머리를 다쳤는지 기억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님.. 그렇다면 온달과 누님의 혼사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게 옳지 않겠사옵니까? 그 온달은 당장 강국으로 추방해야 할 것이옵니다.“
”온달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하오나 혹시라도 온달이 이 사실을 안다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그런 그가 부마라도 된 이후라면 권세를 등에 업고 반역을 꾀할 수도 있사옵니다.“
”반역은 이미 지금은 잠잠한 소노부에서 꾀하려 들었다. 막리지 연자유가 놈들의 기세를 꺾어놨지. 오부의 귀족들은 모두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네 계모 또한 마찬가지지.“
”아버님..“
”조부께서.. 양강상호왕께서 자비로우셨던 분이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아비의 부친이 온달 가족과 부정 가문을 해했지만 이 아비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기에 그를 살리고자 한 것이었다.“
평원왕은 아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과 경험했던 일들을 남김없이 모두 털어놓았다.
태자 고대원도 부친이 가지고 있는 마음 속 응어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론 온달이 행여 배신이라도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하고 있었다.
태자 고대원이 온달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을 무렵, 왕후 대실진은 고승을 불러 작금의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들었다.
”속특인이라 했습니까!? 감히 오랑캐 따위가 어찌 장안성에서 기거한단 말입니까?“
”전하..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놈임은 틀림없었사옵니다. 속특인이 고려인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폐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그 오랑캐 놈에 대해서 조사를 해봐야겠습니다.“
새로운 왕후 대실진이 장안성의 속특인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소문은 돌고 돌아 곧 서부의 해준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 빌어먹을 속특인놈이 이제는 왕후에게 밉보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나.. 조만간 왕후에게 사람을 보내야겠구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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