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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붉은 입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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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러버
작품등록일 :
2020.12.01 04:36
최근연재일 :
2021.02.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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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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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살 석기 - 눈을 뜨다

DUMMY

1. 다섯 살 석기



석기는 다섯 살, 동생 명이는 두 살이었다. 얼마 전부터 길에는 어둠이 깔렸다. 당산나무에 걸려 흔들거리는 천조각들이 무서웠다. 석기는 명이를 업고 쪼그려 앉은 채 당산나무는 보지 않으려 했다. 큰 눈을 뜨고 동내 입구만 바라보았다. 명이는 잠이 들었다. 가을 바람에 흠칫하다가 새근거리기를 반복한다.

석기는 나이에 비해서 키가 크고 힘도 샜다. 아버지를 닮았다. 명이는 엄마를 닮아서 작고 연약하다. 그래도 명이를 업고 나오는 게 힘들었다. 띠를 묶는 게 가장 어려웠다. 넙적한 띠는 석기의 작은 손으로 매듭을 만들기에 너무 컸다. 단단하게 조이지 못해서 석기는 명이를 받치다 시피 하면서 동구까지 왔다. 등을 앞으로 많이 굽혀서 명이가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다 보니까 마치 기어서 오는 것과 비슷하게 왔다.

고개가 아파서 머리를 잠시 들고 말았다. 당산나무가 덮어 놓은 밥소쿠리 같다. 급히 머리를 더 들었다. 작은 별과 기울어지고 있는 달이 산등성 위에 있었다. 그래도 사방은 어두웠다. 석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명이의 체온이 석기의 등을 따스하게 했다.

동내 어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석기는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명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다시 숙인 채 반쯤은 기어서 길로 나왔다.

"아부지."

하고 석기가 불렀다.

"응?"

하고 아버지가 놀라며 뛰어왔다. 흰색 두루마기가 바람에 뒤로 밀리고, 검정색 갓이 춤을 추었다. 석기의 아버지는 글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달려와 석기의 등에서 명이를 빼내 안으며 물었다.

"네 엄마는?"

"아부지, 엄마 죽었습니더."


석기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무슨 말이든 들으면 자기도 해보고 싶어서 안달하던 개구지기였다. 한 시라도 몸이 가만있지 못했고, 움직이더라도 걷기 보다는 뛰어다녔다. 말귀 알아 듣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가 토끼전을 이야기해줬기 때문이었다. 토끼처럼 달리며 까불다가 어떤 때는 남생이처럼 목을 빼고 엎드려서 언덕을 기어 오르기도 했다.

그가 사는 동네는 겨우 대 여섯 집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각성받이(성씨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 이웃간의 왕래도 빈번하지 않았다. 특히 석기네 집은 다들 어려워하며 거리를 두려는 게 어린 석기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석기가 무엇을 하든지 이웃들은 보고도 별 말이 없었고, 석기는 제 내키면 무슨 짓이든 아무 제제없이 천방지축으로 할 수 있었다.

석기는 춘향전 이야기를 듣고 엄마를 졸라 집 앞 나무에 그네를 달았고, 심청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심봉사가 되어 눈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서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사고가 났고 심봉사처럼 개울을 건너다가 난간 없는 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뻔 하기도 했으나 석기는 며칠 후면 다시 타지도 못할 송아지를 타고 나폴레욘 흉내를 내려고도 했다. 이순신 장군도 해보고 김유신 장군도 해봤다. 엄마는 언제나 석기가 따라 해볼 만큼 멋진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만 해주었다. 석기의 세계는 모두 엄마의 이야기에서 나왔고, 석기가 그 세계를 쓰는 방법도 그 이야기를 몸으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으면서 엄마가 해주었던 이야기도 죽었고 석기가 살던 세계도 죽었다. 석기는 엄마 이야기 없이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엄마가 죽고 석기는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엄마는 스물 두 살이었다. 열 일곱 되던 해의 정월에 시집와서 이듬 해 정월에 석기를 낳았다. 꽃상여가 나갈 때 석기는 따라가면서 엎드려 울고, 또 따라가면서 엎드려 울었다. 엄마가 죽은 그날 이후 석기에게는 낮이 없었다. 검고 우중충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귀신 같았다. 무덤으로 가는 엄마를 놓치면 영원히 그렇게. 어둠 속에서 귀신들을 보면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석기는 엄마의 관이 무덤 속에 내려졌을 때 따라 들어가려 했다. 흙이 관을 덮을 때는 몸이 따르르 떨리면서 자지러지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통곡, 통곡, 엄마 죽었을 때의 통곡은 어린아이도 할 줄 알았다. 아버지가 석기를 따라서 통곡했다.

장례가 끝난 날부터 석기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엄마의 베개를 안고 울었는데 어른들이 빼앗아가 불태워 버렸다. 저러다 애 죽는다는 소리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석기는 아프기 시작했다. 열이 나고, 먹은 것 없이 설사를 했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읍내 의사가 와서 보고 장질부사라고 했다. 진사댁이 또 아이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석기는 한 달 쯤 후에 몸을 추스렸다. 한 밤중에 몸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가 석기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섬망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아서 석기 눈에는 방문에서 빛이 거품방울처럼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석기는 그때부터, 엄마가 죽은 후에 보이던 회색 세상이 투과되어 사물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 앞을 보아도 뒤가 보이고 옆을 보아도 전체가 동시에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빨간색도 회색을 입은 빨간색이고 노랑과 검정도 회색을 입었는데, 자세히 봐야만 그 원래의 색을 알 수 있었다. 석기는 엄마가 죽고 나면 누구에게나 세상은 그렇게 보이는 줄 알았다.

운명이라는 말도 모를 때였다. 그럼에도 석기는 살아있는 사람과 살아있던 사람을 가르는 죽음을 보았고, 생사 뿐만아니라 각 사람에게 닥치는 또는 주어지는 개성 같은 운명의 존재를 느꼈다. 죽은 엄마 찾는 아기들에게 들려주는 말들, 저 세상, 하늘, 좋은 데, 이런 말들과, 복 없는 사람, 저 핏덩이들 놔두고 갈 때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같은 소리.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게 사람이라는 필멸성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석기는 생명 이전과 이후, 그 사이를 관장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본 적도 없는데, 보지도 않고서 어른들이 말하는, 엄마를 데려 갔다는 그것은 또 무엇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석기는 어른들이 모르면서 잠꼬대하듯이 주워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물어보지는 않았다.

한 밤중에 아버지가 죽을 끓여다 떠먹여 주었다. 가을이 깊어져 문틈으로 드는 밤바람이 찼다. 석기는 숟가락을 헤아렸다. 많이 삼키지 못하니 조금씩만 먹었는데, 동짓날 팥죽에서 나이만큼 새알 건져 먹을때처럼 따박따박 받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몇 숟가락을 먹는지 저절로 헤아리게 되었고, 딱 백 숟가락이 되었다. 석기는 속으로 자기는 백 살까지 살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1932년 그 해 여름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더웠다. 더워서 말 그대로 쪄죽은 사람이 많았다. 몸이 허약했던 석기 엄마는 그 여름에도 옷을 많이 입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양반집 여인으로 갖춰 입어야 할 것은 다 입었기 때문이었다. 석기는 엄마가 배 아파서 죽은 게 아니라 더워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석기와 명이를 잘 먹이려다 엄마는 굶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해가 바뀌어 1933년에 석기는 여섯살이 되었다. 설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서 본가에 갔다. 처음 가는 사십 리 길을 석기는 수레에 올라앉아서 명이가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고 갔다. 명이는 조금도 크지 않았다. 엄마가 죽는 바람에 젖을 뗀 명이는 젖살이 빠지며 더 마른 것 같았다. 가는 내내 아버지는 본가에 가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 것인지, 사양하는 법이며 대꾸하는 법 같은 것을 가르쳤다.

"알아들었냐?"

하는 아버지의 물음마다 석기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불손한 행동이었으나 아버지는 꾸짖지 않았다. 석기는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새해 인사하러 간 본가에서 석기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한참을 이야기했고, "그 집안으로 보내는 건 안돼!" 하는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와 다른 누군가와 아버지 사이에 고성이 오간 후에 나온 결정이었다. 석기는 명이의 손을 잡고, 솟을 대문 밖에 서서 아버지가 떠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았다. 아버지는 가다가 돌아보기를 여섯 번 반복했다.

명이가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야, 아부지 운다."

명이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석기의 손을 힘주어 꼭잡고 있었다.

"응."

하고 석기가 말했다.

명이는 말이 빨랐다.

앞에서도 뒤를 볼 수 있었고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어도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석기는 아버지를 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석기와 명이가 안보이는 데서도 돌아보고, 가슴도 몇 번이나 두드렸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석기는 여느 아이들이 그러하듯 어른들을 관찰하면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운명이라는 말을 알고, 별똥별을 쫓아가는 사람처럼 운명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작가의말

1932년, 조선은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당시에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은 땅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도시에 살아도 지방에 기반이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방에 기반이 없는 도시의 토박이들 생활은 상업에 종사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웠으나 신문물과 신교육의 유입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시대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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