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붉은 입술의 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현대판타지

아틀러버
작품등록일 :
2020.12.01 04:36
최근연재일 :
2021.02.17 10:37
연재수 :
84 회
조회수 :
3,422
추천수 :
20
글자수 :
402,363

작성
21.02.14 13:10
조회
20
추천
0
글자
11쪽

16. 전야의 반전주의 - 반전주의자 랜킨 의원

DUMMY

"오늘 이 자리는 여성의 권리와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는데, 자리의 반은 남성들이 차지했군요. 예, 그렇답니다. 남성들은 항상 여성들이 모이는 자리에 기웃거리지요."

하고 시작한 랜킨의 연설에 청중들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세계는 전쟁 속에 있고 전쟁은 이 순간도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주시하고 평화를 갈구해야 하는 것은, 역사 이래로 언제나 전쟁은 남성들의 문제였지만 평화 문제는 여성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순간에 가장 불쌍하고 고통 받는 것은 전사들이 아닌 여성들입니다. 정치가와 군인은 명예를 말하지만 전쟁 속에서 여성들은 인격을 박탈 당합니다. 저는 지난 세계 전쟁의 시기에 미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첫 번째 임기를 마쳤고, 다시 세계가 전쟁 속에 들어간 이때 두 번째 임기를 맡았습니다. 저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전쟁이 전쟁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빼앗아가는 때문 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아 살아도 인간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반대의 목소리는 우리 여성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성의 참정권 확대 운동(suffrage movement)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 누구를 선택하든 그가 남성일 경우에, 이 나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여성의 입장은 정치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단순한 참정권만을 가질 때, 여성들은 잘 생긴 후보에 인기투표하는 것으로 참정권을 소진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많은 여성들이 직접 공직에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어느 곳이 벗어나지 못할 억압 속에 있다면 그 사회는 균형잡힌 사회가 아니고 균형을 잃은 사회는 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부의 부패와 타락은 이러한 부작용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여성들이 공직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미국의 공직에 나아가 이 나라의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지네트 랜킨의원이 잠시 말을 멈추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랜킨의원은 박수가 멎기를 기다려 연설을 이어갔다.

"남성들에게 여자를 홀리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듯, 우리 여성들에게도 아이 낳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들이 말타고 쟁기질 하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여성들도 요리하고 빨래하는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남성들은 그들이 말타고 쟁기질 하는 능력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여성들은 마치 요리하고 빨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도 요리하는 가스 오븐과 빨래하는 세탁기를 여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성은 아이 낳고 빨래하고 요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볼 수 있고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글을 읽고 쓰고, 연설하고, 무엇이 옳바른지 말할 수도 있으며, 옳은 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 여성들은 경험하지 못하였고, 경험하지 못하였기에 두려워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용기로 맞서서 이 두려움을 극복할 때, 여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세계의 진보가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합니다. 모든 기회는 여성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간간이 터져나오는 박수 속에서 연설은 계속 되었다.

랜킨의원은 여성의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불이익과 고통에 대해 말했고, 이러한 고통은 여성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분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웬은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랜킨의원의 말에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들은 남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랜킨의원의 어투에서는 남성에 대한 적대감도 묻어있었다. 여성의 사회 참여와 여성 노동에 대해서 말할 때는 과연 공평한 노동을 원하는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바웬은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아마 줄리아 등도 열심히 뭔가를 해서 성공하고 싶겠지만 억압이니 평등문제에 관심을 가지진 않을 것 같았다. 바웬은 지네트 랜킨이 미국에 편하게 살아서, 또는 미국에서 짜증날 정도로 힘들게 살아서 정말 생존을 위해 사는 것이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옆을 보니 체스바와는 졸고 알렉산드라는 찌푸린 표정이었다. 줄리아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메모하고 있었지만 원래 줄리아는 그렇게 했다. 조피아는 어느 틈에 자리에 와서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연설은 전쟁이 나쁘다는 말들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주로 여성 문제를 40분 동안 주장하다가 끝났다. 질문을 받기 위해서 랜킨의원이 기다릴 때, 조피아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조피아는 랜킨의원이 도착했을 때부터 안내를 했기 때문에 랜킨의원이 금방 알아보았다. 랜킨의원이 손으로 조피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쁜 학생이군요. 말씀하세요."

조피아는 일어서면 치맛주름을 펴며 자세를 단정하게 했다.

"의원님께서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7년, 영국편에서 독일과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했습니다. 영국도 독일도 유럽 전체로 전쟁이 번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외교적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요?"

강당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랜킨의원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모든 전쟁을 반대합니다. 전쟁을 하는 노력의 백분지 일만 들여도 모든 전쟁은 외교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은 지금 유럽 전쟁이 확산된 것을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전쟁이 일어나면 더욱 필요한 것이 외교적 노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러시아의 침공으로 유럽 전역이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만약 루즈벨트 대통령이 1937년에 영국과 함께 독일에 맞섰더라면 독일이 지금처럼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세요?"

조피아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랜킨의원은 당혹해서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은 지금과 달라졌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나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은 용납되어선 안됩니다. 제 입장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참전이 아니라 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럽의 전쟁은 눈먼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산물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보다 인간이 더 소중합니다."

랜킨의원은 말을 끝내며 이만하면 됐지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곤 다른 질문자를 찾았지만 조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의원님은 맹목적인 반전주의자로 보입니다. 맹목적인 민족주의들이 일으킨 전쟁에 맹목적인 반전주의로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랜킨의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두가 조피아의 지나친 직설적 공격에 긴장했다. 졸던 체스바와까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인간을 위한 반전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조피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의 반전주의가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반대하여 미국이 독일에 일찍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수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까?"

사회자가 급히 마이크를 들었고 학교 선생 중 한 명이 조피아에게 달려왔다. 다테우쉬가 벌떡 일어서 조피아의 앞을 막아섰다. 누구든지 때려눕힐 기세였다. 몸이 큰 다테우쉬가 노려보자 선생은 움찔하며 멈췄다.

"조피아 학생, 진정하세요. 의원님에 대한 예의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줄리아가 조피아를 달랬다.

"결례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의원님."

조피아가 음성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제서야 급박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저는 폴란드에서 독일과 러시아의 침공을 겪고 도망쳐 미국으로 왔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의원님께 오늘 오빠를 대신해서 질문했습니다. 제 오빠는 의원님과 마찬가지로 반전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전주의자인 의원님을 만나보게 하려고 오빠를 오게 하였습니다. 오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의원님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오빠가 의원님에게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의원님께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힘들 오빠로 오라고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의원님, 반전주의 뒤로 양심을 숨긴다면 공산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반전주의라는 말로 그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앞에 언제까지 의원님은 당당할 수 있습니까?"

나직하면서도 또렷한 조피아의 말에 랜킨의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회자가 다른 질문자를 찾았다. 조피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앉아서 흐느꼈다.

"다른 질문이 없으면 오늘 강연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하는 사회자의 말이 나오고 랜킨의원은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서 강당을 빠져 나갔다. 지네트 랜킨의원의 강연은 조피아가 망쳐버렸다.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고 사회자가 말했지만 의원이 빠진 자리에서 누구도 다과를 먹으면서 겨울 저녁시간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두 침울했다. 독일과 소련이 아니라 지네트 랜킨의원 조차 미웠다. 바웬은 그와 한 마디도 해보지 못했지만 이제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오히려 조피아가 말한, 반전주의가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피아는 그 사이에 랜킨의원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그에 대한 기사나 자료들을 찾아본 모양이었다.

"미안해. 오빠."

하고 조피아가 사과했다.

바웬은 뒷자리를 향해, 하지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잘했어."

"잘했어. 나도 지루해지던 판이었어."

하고 타테우쉬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41년 12월 7일 정오무렵, 텔레비젼에서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했으며 교전 중이라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붉은 입술의 바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2부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21.02.16 39 0 -
공지 약간의 해설 21.01.19 45 0 -
공지 붉은 입술의 바다에 대하여 +1 21.01.04 109 0 -
84 붉은 입술의 바다 연재가 끝났습니다. +2 21.02.17 43 0 1쪽
83 20. 세일렌 - 세상의 이면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 (2부 끝) 21.02.17 33 0 7쪽
82 20. 세일렌 - 뜨게질 하는 짐승들이 있는 바다 가운데 섬 21.02.17 31 0 6쪽
81 20. 세일렌 - 진리나 신에게도 지지 않는 길 21.02.17 28 0 8쪽
80 20. 세일렌 - 길은 자기 속에. Nosce to ipsum (나 자신을 알라) 21.02.17 27 0 9쪽
79 19. 구조와 한계, 그리고 방식 - 지혜의 문을 지나서 21.02.17 26 0 7쪽
78 19. 구조와 한계, 그리고 방식 - 칸트의 몽상 21.02.17 24 0 10쪽
77 19. 구조와 한계, 그리고 방식 - 집으로 들어온 전쟁 냄새 21.02.17 21 0 8쪽
76 18. 중역회의 - 노동과 자본의 관계 형성 21.02.16 30 0 13쪽
75 18. 중역회의 - 사업에서 성공하는 법 21.02.16 22 0 8쪽
74 18. 중역회의 - 흥겨운 크리스마스 21.02.16 20 0 10쪽
73 18. 중역회의 - 나무 같이 자라는 아이들 21.02.16 68 0 9쪽
72 17. With Peace and Hershey - 착한 부자, 착해서 부자가 된 사람 21.02.16 21 0 10쪽
71 17. With Peace and Hershey - 학업 중단, 어떤 사람들의 이상한 성공 조건 21.02.16 19 0 11쪽
70 17. With Peace and Hershey - 미국이 두려워 하는 것 21.02.16 26 0 11쪽
» 16. 전야의 반전주의 - 반전주의자 랜킨 의원 21.02.14 21 0 11쪽
68 16. 전야의 반전주의 - 사탕이 좋아 21.02.14 25 0 9쪽
67 16. 전야의 반전주의 - 프린스 바웬 21.02.14 23 0 10쪽
66 15. 철학하는 침대 - 데카르트의 연인, 여자 왕 크리스티나 21.02.12 31 0 14쪽
65 15. 철학하는 침대 - 모순 덩어리 철학자들 21.02.12 16 0 11쪽
64 14. 테이블 위의 전쟁 - 자유와 정의, 그리고 반전 21.02.12 21 0 10쪽
63 14. 테이블 위의 전쟁 - 이유 21.02.12 21 0 12쪽
62 12. 유혹하는 진리들 21.02.11 19 0 12쪽
61 11. 아사신 - 거래 21.02.11 25 0 13쪽
60 11. 아사신 - 암살교단의 우두머리 21.02.11 24 0 7쪽
59 10. 크리스마스의 거미 21.02.11 20 0 18쪽
58 9. 위대한 독재자 - 비극도 행운도 언제나 옆을 스치는 세상 21.01.23 35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아틀러버'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