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입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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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hershey
작품등록일 :
2020.12.01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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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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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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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뱀을 잡다 - 흰 얼굴이 까매질까봐

DUMMY

2. 뱀을 잡다



할아버지의 학당은 광대산 줄기에 있었고, 앞으로는 광대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학당 이름은 처음에 석주학당이었으나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광대학당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렇게 바뀌고 말았다.

조선 각지에 여러 학교가 있었고, 광대학당은 그런 학교들 중의 하나였다. 학생은 적었고 교사들의 월삯은 광대벌에서 나오는 소출로 지급하는 구조였다. 낱낱으로는 얼마되지 않은 그 돈도 매달 나가면 적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게 나가는 돈이 많았다. 학당은 조선 청년을 길러내는 산실이고, 일본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학당들은 도처에 돈을 먹여서 학당을 지키고 있었다. 학당과 학당끼리 오가는 비밀스런 이야기들도 보호 되어야 했고, 뜻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학당에 머무르지 않는 이가 드물기에 그들 역시 보호 받아야 했다. 어이없는 말이지만, 돈을 받고 눈감아주거나 자기들이 정한,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원칙에 얽매여 눈감아 주는 것을 보면 가끔은 일본인들이 무척 관대하거나 공정한 게 아닐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세히 살피면 사익을 위한 부정이거나 좋게 봐주더라도 무언가를 고수하고 집착하는 그들의 민족성일 뿐이었다. 그런 점들이 조선인의 시각에서 보면 선의로 비치기도 한 것이다.

백정기는 아리요시 아끼라 공사를 죽이려다 발각 되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함께 했던 이강훈은 15년 형을 받는 데 그쳤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백정기가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할머니에게 전하며 탄식했다. 할머니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백정기는 정말 오래 살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래도 백정기에 대한 할머니의 평은 아주 후했다. 그가 석기 큰아버지와 연관있고 원망스러운 사람임에도 그러했다.

"내일 죽을 줄 알면 오늘이 더 아쉬운 법이지요. 더 아까운 삶을 불태우고 가려했으니 그도 참 난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도 그의 죽음 애도했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참 사람들이 나오니 망한 나라고, 참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니 선진하는 나라라고 하였다. 나라 잃고 나와서 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참 사람들에게 나라는 그리운 것이지만 기댈 수 없는 것이기 모든 권위와 압제에 저항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버리기 쉽다.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는,

"박열이도 그렇고, 똑똑한 놈들이 성미 급하면 다 아나키(아나키스트)가 되는가 보오."

하며 탄식했다.

박열의 집은 석기의 본가에서 겨우 몇 십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석기는 할아버지로부터 그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는 여러 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아내인 가네다 후미꼬와 함께 잡혀서 감옥소에 있었다. 부부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었다만, 부인 후미꼬는 감옥에서 죽었다. 후미코는 국적을 떠나 남편을 따른 참 열녀였다. 할아버지는 후미꼬가 일본 사람이면서도 천황가에 테러를 가하려는 조선인 남편 박열을 도왔기 때문에 감옥에 있던 다른 일본인이나 간수의 해코지를 받았을 가능성을 말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석기가 아는 아나키스트의 테러는 제대로 성공하는 것이 없었다. 성공하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알 수는 없었다. 이제 석기는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시도해보는 시기는 지났다. 그러나 꿈은 꾸고 했다. 꿈에서 석기는 자기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폭탄을 던져서 멋지게 성공했다. 누구를 향해서 폭탄을 던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성공은 했는데 폭탄이 어떻게 터졌는지도 말할 수 없었다. 석기는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몰랐다.

잠버릇 나쁜 명이는 뒹굴어서 방구석까지 가버렸고, 석기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길게 누워 있던 어느 나른한 오후였는데, 반공일(토요일)인지 할아버지가 일찍 와서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임자, 석기도 이제 글을 배워야 할 땐데 대체 뭘 가르쳐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오. 왜놈 말은 누구나 하니 안 할 수 없고, 차라리 왜놈 말보다 왜놈들이 배운 화란어와 영어, 불란스어, 도이치어 같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나 싶고. 요즘 만주니 연해주로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중국말이나 로시아를 배워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걱정도 팔자랍니다. 말이야 필요하면 지가 알아서 배우겠지요. 누가 숨쉬라고 일부러 가르친답니까. 나는 내일부터 석기 데리고 들에나 나가 볼랍니다."

할머니가 석기의 머리를 쓸면서 말했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말은 그렇다 해도 글은 가르쳐야 되지 않겠소?"

"사리분별 할 줄 알면 됐지 글 많이 배워서 어디에 쓴답니까. 나는 지긋지긋 합니다. 석기는 농사나 가르쳐서 조용히 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석기의 어린아이 같지 않은 총기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석기는 어른스런 말을 하고 행동도 단정하고 의젓했다.

"똑똑하다고 다 가르치면 무슨 꼴 나는지 영감이 더 잘 알고 있잖습니까?"

석기는 자는 척 하다가 움찔했다. 글공부 안시키고 농사짓게 한다니까 겁이 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더 똑 부러져서 한 번 마음을 정하면 바꿀 것 같지가 않았다.

할아버지 학당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 상해에 있다가 온 사람, 그리고 포도아(포르투칼)에서 온, 수염이 꼬불꼬불한 선생도 있었다. 석기는 조금만 더 자라면 학당에서 그 선생들한테 배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농삿일을 배우게 된다면 마당에 있는 얼굴 시꺼먼 머슴들처럼 되고 말 거다. 늘 뙤악볕 아래 일하는 그들의 얼굴은 숯검점 보다 조금 나은 편이었다. 석기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는 건 싫었다. 동네 아이를 보면 멍청한 아이는 새까만 하루방이고, 똑똑하게 까부는 아이는 까만 얼굴에 눈만 반들거린다. 아이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얼굴이 까맣게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말도 흰말이 멋있고, 아버지나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성심 누이도 모두 얼굴이 하얗다. 할머니와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온 집안을 쏘다니는 명이만 빼고. 글을 못 배울지 모른다는 마음보다 어쩌면 얼굴이 새까맣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절박했을 것이다. 석기는 마음이 급해져서 눈을 떴다.

"할머니, 저 글 배울래요."

하자마자 할머니가 역정을 내면서 말했다.

"뭐할라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말 할 때만 나긋나긋한 말투를 쓴다. 이런 역정 섞인 말을 하는 경우는 없다.

석기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글 배울래요."

할머니하고 말로 주고 받아서는 안된다. 석기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집 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글 가르쳐 주세요."

할머니가 으르느라 주먹을 쥐고 쥐어 박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이녀석아, 요새 세상은 글 많이 배우면 죽는다 죽어. 안 무서워?"

"글 가르쳐 주세요."

석기는 반항하듯이 말했다.

할머니는 화가 끝까지 올랐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석기는 한 번 더 말했다.

"글 배우고 말 거예요."

할머니는 홱 돌아앉으며 말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아이구 이놈의 못된 김가. 어찌 그래 사내놈들은 전부 똑 같나."

석기는 할머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목에 매달리며 머리를 할머니 비녀 앞에 대고 문질렀다.

"할머니 글 가르쳐 주세요. 네."

할머니가 할아버지 한테 말할 때 같은 사근사근한 말씨를 썼다. 어른을 배우는 석기가 자주 할 짓은 아니지만 자꾸 매달리면 할머니의 마음은 결국 돌아선다. 할머니는 핏줄의 요구를 이기지 못한다. 마음을 바꾼 부담을 자기가 짊어지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석기는 꿀밤을 맞았지만 기뻤다.


작가의말

옛날에 아이가 언제부터 공부를 시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태어나자 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아듣든 말든 교육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장소에서 할 말과 아닐 말의 구분도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교육은 책 이전에 이미 말로써 이루어집니다. 사서삼경을 3살에 뗐다든지, 9살에 뗐다든지 하는 것도, 그때 책을 다 읽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반복해서 말로 사서삼경을 이미 배웁니다. 사서삼경인줄도 모르고 배웁니다. 그러다가 글자를 배우고 삼자경 같은 걸로 문장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내용이 대부분 자기가 배워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용에 깊이를 더해갑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는 이런 식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책을 통해서만 배워야 하고, 그러다보면 조기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더 우수하지 않으면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흔히 사극에 나오는 어느 집안 사람이다 같은 말은, 요즘으로 치면 명문학교와 비슷한 관념이라 보면 됩니다. 아무리 못해도 어느 이상의 기본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꼭 글과 벼슬에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면 좋지만 안해도 그뿐입니다. 이치를 경험에서 터득하여 경륜을 갖추게 되면 그걸로도 족합니다. 문장을 하는 것이 불교로 따지면 교종과 비슷하고, 경륜을 중시하는 것은 선종과 유사한 일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기본적인 토대는 다 가져야 합니다. 경륜에 집중하는 것은 가세가 몰락한 경우에 많이 나타납니다. 


당시 얼짱의 기준은 흰얼굴이었습니다. 흰 얼굴 때문에 쌀뜨물에 세수하고 밀가루 붙이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잘생겼다보다 허여멀겋다가 매력 포인트였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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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5. 고하 - 마라톤 20.12.14 66 0 9쪽
20 14. 스키마 - 금척 20.12.14 71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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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2. 아나키스트를 넘어서 20.12.13 75 1 21쪽
17 11. 북촌집 소란 - 오누이 20.12.12 74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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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다섯 살 석기 - 시대를 듣다 20.12.01 167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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