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입술의 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현대판타지

Myhershey
작품등록일 :
2020.12.01 04:36
최근연재일 :
2021.02.17 10:37
연재수 :
84 회
조회수 :
6,592
추천수 :
20
글자수 :
402,363

작성
20.12.12 06:08
조회
82
추천
1
글자
22쪽

11. 북촌집 소란 - 영어하는 할머니

DUMMY

11. 북촌집 소란


성주댁의 말처럼 누이는 금방 왔다. 한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지만 한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있었다.

"바나나하고 파인애플이야. 할아버지 할머니 좀 갖다 드려."

명이가 달려들어서 보따리를 안아들며 말했다.

"길죽하길래 난 또 핫되긴 줄 알았어. 냄새 좋다."

성주댁이 채갔다. 명이는 상에 오르기 전에 맛볼 양으로 성주댁을 따라간다.

누이는 안방을 향해서

"할머니 저 다녀 왔습니다."

하고는 바로 자기 방으로 갔다.

부억에서는 명이가

"와! 경성에는 과일 든 간주메(통조림)도 있네. 난 꽁치 간주메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집이 부산해졌다.

누이는 방에서 고함쳤다.

"금단아. 발 씻게 물 좀 가져와!"

"저녁 준비 하는 거 보고도 몰라?"

성주댁이 소리치고,

"아! 몰라. 그럼 석기가 가져와라."

하고 누이가 또 소리쳤다.

안방에서 할머니가 벌컥,

"저 년이!"

하고 조용해졌다.

"야, 너 어릴 때 나도 여러 번 네 발 씻어 줬어. 물 떠오면 내가 좋은 거 줄게."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또 소리쳤다.

"너는 발 없냐?"

손 없냐 소리를 해야하는데 발 없냐고 하신 할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누이가 대꾸했다.

"발 아프잖아요. 맞아서 다리가 퉁퉁 부었는데 동생이 그거 좀 해주면 어때서요. 요새 경성에서는 남자들이 밥도 한다고요."

석기는 분주함에 동참했다.

"먼저 씻고요."

하면서 우물을 길어 발을 씻고 대야에 담아서 가져 갔다.

누이는 자기 방문 앞 마루에 얄망스럽게 걸터 앉아 있었다.

석기가 대야를 발 밑에 내려놓자 석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네가 좀 씻어봐. 허리 숙이기가 영 불편하네."

석기가 멈칫하자 누이는 뒤에 숨겼던 오른손을 앞으로 꺼내며

"짠!"

했다.

"만년필 갖고 싶지 않아? 이거 큰 맘 먹고 산 거야. 미젠데, 멋지지 않아."

석기는 빙그레 웃었다.

"이러는 줄 아시면 할아버지께서 누님한테 회초리를 드실 걸요."

하고 석기가 대답했다.

남자인 석기한테 발 씻기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할아버지가 용납할 리가 없었다. 직접 회초리를 들지는 않겠지만 할머니가 몽둥이라도 들게 시킬 거다.

누이가 쳇 하면서 만년필을 옆에 놓고,

"그럼 옆으로 비켜 서있어. 공짜 절 받을 생각 말고."

하고는 허리를 숙여 발을 씻었다.

누이는 작은 소리로

"할머니 뭐 좀 드셨어?"

"저녁은 드실 것 같았는데 명이가 망쳐 버렸어요."

"고 되바란진 게 너무 설치네."

"혼을 좀 내줘야 누님처럼 안 될 거 같아요."

하고 석기가 말했다.

누이가 발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거야. 난 남이 안 건드리면 아무짓 안 하잖아."

누이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내려와 얼굴이 다 가리웠다.

"이러고 겁 한 번 줄까?"

"소용없어요. 간이 배 밖에 나온 걸요. 오냐 오냐 하니까 할아버지 할머니도 안 무서워해요."

"뭐..... 할아버지 할머니야......흐....."

하며 누이는 말을 슬그머니 흐리고 멋쩍게 웃었다. 얼굴이 동그란 누이는 참 이쁘다. 엄마도 얼굴이 동그랐고 명이도 동그랗다. 그러나 가장 이쁜 동그라미는 누이 얼굴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슨 바람이 들어 너 미국 보내려는거야? 평생 손도 안 놓을 거 같이 끼고 다니더만."

석기가 실제로는 할아버지와 함께 다닌 것이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들 보기에는 늘 할아버지 옆에 붙어 다니는 걸로 보인 모양이었다.

누이 방에는 펼쳐지는 조선식 경대 외에도 큰 거울이 달려있는 양식 경대가 있었고, 긴 장농 하나와 모자걸이, 벽에 붙은 붙박이 옷걸이 따위가 있었다. 방 안쪽에는 장식이 요란한 침대가 있었는데, 북촌집에서도 유일한 침대였다. 침대 앞에는 네모난 양탄자가 깔려 있고, 양탄자 위에는 헝겁으로 만든 실내화가 있었다. 뒤로 나 있는 문에는 작 년에 만들었다는 신식 화장실도 있었다. 그것도 이 집에서 유일하게 신식 목욕탕을 겸한 화장실이었다. 명이는 이 화장실을 알고도 겁이나서 못 썼다.

누이는 양탄자 위에 앉았다.

"작은 아버지는 연락 자주 와?"

"가끔."

"사진 가지고 있어?"

"할머니가 가지고 계셔요. 가지고 오셨을 겁니다."

"그럼 잇다 보자. 난 니 억수로 보고 싶었는데 잘 왔다."

누이의 어투가 바뀌었다.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지만 양반들, 특히 양반집 여자들이 쓰는 말씨는 조금씩 차이는 있을 망정 부드럽고 온화했다. 상민들이 쓰는 말투와 달라서 음성만 들어봐도 쉽게 신분을 구분할 수 있었다.

누이가 씩 웃었다.

"우리 끼린데 어때. 말 놯뿌자. 난 이래 이야기 하는 기 좋다 아이가."

격식차린 말을 쓰지 않고 상민들이 쓰는 말을 편하게 쓸 때 말 놓는다고 한다. 그게 서로 반 말하자는 뜻으로 바뀐 건 이후 일이다.

"니가 말 끝마다 예, 예. 하고 구니까 간지럽다 아이가. 애 늙은이 같아서 징그럽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뷰익 센추리 이야기며, 고향의 이런 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에 명이가 바나나를 가지고 왔다.

명이가

"아까 영 위도우가 언니한테 “보고도 몰라” 하대."

하며 마치 기강이 무너진 것을 나무라듯이 말했다.

"쪼그만게 그게 뭐 어때서. 경성에서는 식모들이 다 그래. 금단인 나보다 한 살 많잖아."

쓸데없는 소리 한다는 듯이 누이가 짜증을 냈다.

명이가 엄하게 말했다.

"나한테는 안 그러는데."

"넌 촌놈이니까 촌놈 대접하느라고 그러는거야. "

하고 누이가 말했다.

명이가 지지않고 달려들었다.

"촌에 있을 땐 언니한테도 안 그랬잖아."

"그때는 다 촌놈이었으니까."

"와! 그럼 뭐 언니는 경성사람이야?"

"그럼."

"그럼 나도 경성사람이겠네. 이제 경성에 있으니까."

"경성에 있는 촌놈이지. 촌놈은 경성에 있어야 촌놈 티가 팍팍 나는 거니까."

"언니는 어떻게 경성 사람되었는데?"

"경성 사람이 되려면"

누이가 선심쓰며 큰 비밀을 알려준다는 듯이 뜸을 들이고 말했다.

"새 시대의 격변에 부응하면서도 즐길 줄 알아야 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명이는 억울하다는 듯이 석기를 보았다. 누이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골이 난 명이가 쟁반에 손을 대는데 누이가 밥먹고 먹으라며 못 먹게 했다.

명이가 눈을 치뜨며 말했다.

"나 이거 먹어도 밥 먹을 수 있어."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명이는 바나나를 두고 나가지도 못하고 옆에 앉아서 바나나만 노려 보았다. 자칫하면 들고 튈 기세다. 자기가 가져왔으니 일말의 거리낌도 없을 것이다. 석기는 자기 앞으로 쟁반을 당겨서 명이가 바나나를 덥치지 못하게 했다.

"한 입만 먹어보자."

하면서 명이가 바나나를 덮쳤다. 하지만 허탕치고 엎어지자 누이가 명이의 머리를 쿡 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얌전히 있어."

"언니! 먹는 거 가지고 이러는 거 아니다. 치사하게."

"너 금단이 많이 괴롭혔다며."

하고 누이가 말했다.

"안 괴롭혔어. 내가 뭘. 오빠 치사해. 내가 초코렛 작게 줬다고 모함하는 거지. 반이나 줬는데."

명이는 눌린 채로 씩씩거렸다.

누이가 말했다.

"잘 들어. 여긴 경성이야. 지금은 이십 세기고. 신분 갖고 행세하는 때는 다 지났어. 다시는 그러지 마. 반상 구분은 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없어졌어. 이 꼬맹아."

"아 그럼 과부한테 과부라 못 하고 성주댁을 성주댁이라고도 부르면 안되는 거야? 그런 거야?"

"쥐방울 만한게 어디 어른한테 함부로 해? 여기선 신분 필요 없고 나이가 많으면 어른이니까 알아서 해."

"하! 말세다. 아래 위 분간도 없어졌구나."

하고 명이가 탄식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하는 말투를 그대로 내뱉었다.

누이가 화를 내면서 명이의 뒤통수를 때렸다.

"니가 그래."

명이가 발악했다.

"반상구분 없다면서, 그럼 언니나 오빠는 왜 성주댁한테 반말해? 성주댁이 나이 더 많잖아."

석기와 성실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 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반말하면서 자랐다. 그게 특별히 잘못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아직 완전 신식은 되지 못했다. 새로 무장하는 도리는 모두 계란껍질 보다 얇아서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지기 일수다. 이러다보니 어디서나 목소리 크면 이긴다.

명이가 꽥 소리쳤다.

"내가 틀린 말했어? 이십 세기라며! 언니가 더 나빠. 할머니 말도 안 듣고 고자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겠다 고집만 부리면서."

명이가 금도를 넘고 말았다.

"이게!"

누이가 벌컥 소리쳤다.

딴에는 언니면서도 제 편 안들어주고 성주댁 편 드는 누이한테 얼마나 미운 마음이 들었던지 멈추지도 않고 따발따발 주워섬긴 것은 더 나빴다.

"오빠, 고자가 뭐야? 감자 같은 거야? 그렇지? 그거 먹는 거 맞지? 언니는 뭔 감자 같은 거 하고 놀겠다고 그러는 그야?"

고자가 감자하고 비슷한 건지 고추하고 비슷한 건지는 석기가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누이로 하여금 이성의 끊을 놓치게 만든 것은 분명했다. 누이는 명이의 볼기짝을 사정없이 내려치며, 명이가 있어서 멈췄던 거친 어투를 그대로 무지막지한 상욕을 퍼붓고 말았다.

"X만 한 기 X도 모르고 고자 고자해? 너 맞아봐라. 요것아."

명이는 볼기짝을 맞으며 비명을 질렀고, 석기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에 놀라서 누이의 손을 붙잡았다. 분명 들었는데도 그 욕이 뭐였는지 머리가 잘 따라가지 않았다.

명이는 그 틈에 문을 열고 도망쳤다. 마루를 내려가면서 치맛단을 밟고 한바퀴 굴렀지만 멈추지 않고 안방을 향해, 치맛자락을 들어올리고 악을 쓰면서 후다닥 뛰어갔다.

"할머니..... 할머니...... 언니가. 언니가..... 내보고."

석기는 누이가 명이를 때렸다는 것 보다도 쌍스런 욕을 한 것에 화가 나서 말했다.

"누님 경성에서 이러고 살았습니까?"

"니도 화나봐라! 욕 안나오는지. 이젠 욕도 할 줄 알아야 사는 세상이야."

하고 누이가 반성없이 팩 소리 질렀다.

명이는 안방 앞에서 방성대곡을 했다.

"내보고 내보고, X만 한 기 X도 모르고 고자 고자 한다고 막 때렸어요. 내가 X만 하다고 막 때렸어. 언니가. 엉엉."

석기는 이마를 부여 잡았다. 경성에 올라 온 후로는 한 순간도 조용할 때가 없는 것 같았다. 경성이 분답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일이 너무 크져 버렸다 싶은지 누이도,

"아씨...."

하고 있었다. 누이는 집안에서 천 것들이 하는 육두문자를 동생한테 퍼부어버렸으니 후환으로 앞이 캄캄했다. 할머니 입에서 계집애 공부 시킨다고 밖에 내놨다가 다 버렸다는 욕을 들을 게 뻔했다.

누이는 거칠기가 사포자락 같다. 옛날부터 양반집에는 거친 여자들이 종종 있었다. 씨앗과의 싸움을 해내고 종이며 하인들을 다루다 보니 엄하다 못해 때로는 거칠어지는 경우도 있고, 타고난 성정이 거친 경우도 많았다. 평민들 집에서는 여자가 거칠면 남편한테 매를 맞기 때문에 그런 일이 드물지만, 양반가에서는 거꾸로 마누라한테 뺨을 맞거나 수염을 뽑히는 양반들도 심심치 않았다. 어느 영감이, 어느 대감이 공처가라서 마누라 한테 맞는다더라 하는 소문이나, 어느 집 마누라는 무섭다는 소문에 벗들이 그 집에 가서는 술도 못 청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서민들에게서는 아니겠지만, 양반가로 비쳐 본다면 조선은 여자 천국이었다. 시집 갈 때 한 살림 미리 받아가거나, 그런 후에도 상속을 받아서 남편 보다 더 부자인 부인들도 많았고, 아들만 낳고 나면 세상 천지에 무서울 것도 없었다. 남자의 반항은 기껏해야 기생집에 다니거나 큰 마음 먹고 첩을 들이는 정도였다. 첩도 마누라 허락없이는 못들인다. 아무리 마누라가 미워도 이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임금 조차도 마누라가 불러서 퇴청해야 한다는 신하를 붙잡아 놓기 어려웠고, 남자가 이혼하려고 하면 재판이 심히 어렵고 복잡했다. 그렇게 하고도 이혼이 성사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명이는 욕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언니가 욕한다고 했지만 욕도 모르고 있었다.

지난 밤부터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걸렀던 할머니가 명이의 통곡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민망한 욕설에 참다 못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 명이는 성주댁이 방문 앞에 가져다놓은 바나나를 껍질 채 입에 넣으려던 중이었다.

"할머니 안 드실 줄 알고....."

명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바나나를 주무르며 우물쭈물했다. 하여간 할머니의 단식이 끝났다.


저녁 상은 대청에 마련 되었다. 성주댁 혼자서 차리긴 버거웠는지 간주메가 여러 개 사용되었고, 두부와 상추가 상에 올랐다. 할머니나 누이는 두부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는다. 할머니는 촌에 있을 때도 명이에게 조차 꼭꼭 두부를 챙겨 먹였다. 여자는 두부를 먹어야 피부도 희고 고와지며 머리카락도 윤기가 난다고 했다.

할머니는 명이를 옆에 앉히고 꽁치 간주메 국물을 떠주며 누이를 탄핵했다.

"여자가 입 걸면 남정네가 거칠어진다. 처신 알아서 잘 해라."

"평소엔 안 그래요."

하고 누이가 천연덕스럽게 받아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는 그 외엔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누이를 이미 내 논 자식 취급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상추잎에 두부를 싸서 드시고는 명이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이도 상추잎에 두부를 싸서 꾸역꾸역 먹는다. 성주댁은 할머니가 들어가고 나서야 누이 옆으로 와서 두부를 먹기 시작했다. 석기는 약간 비린내가 나는 꽁치국을 먹는 것으로 그쳤다. 초코렛을 먹던 입에 꽁치국물 맛도 이상했다.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니, 할머니는 저고리를 벗고 속치마만 입은 명이를 앞에 앉히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었다. 맞은 궁둥이를 할머니가 호야 호야 해주며 어루 만져 주었던 모양이다. 명이가 꽁한 표정으로 석기를 보고도 못본 척했다.

"난 그래도 누이 말렸다."

하고 석기가 말했다.

명이가

"미리 못 때리게 말렸어야지...."

하고 시컨둥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석기에게 물었다.

"영어가 어렵더니?"

"똑 같아요. 소리내는 법 몇 십 개만 알고 나서 천자문처럼 읽으면 금새 뜻이 통하는 걸요. 뜻부터 통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작은 이치들은 금방 알 수 있어요."

하고 석기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내일부터 명이 한테 영어 좀 가르쳐라. 미국 가기 전에 몇 마디라도 배워서 가면 좋겠다."

명이가 벌컥 소리쳤다.

"할머니, 나 오빠한테 안 배울래요."

"왜?"

"꼭 지만 다 아는 것 같이 굴고 모르면 바보 취급해서 기분 나빠요. 비슷한 거 하나 가르쳐 놓고 딴 거 물으면 그것도 모르냐며 화내요."

"니가 바보니까 그렇지."

하면서 누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명이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있던 참빗이 바닥에 떨어졌다. 할머니는 못 마땅한 듯이 누이를 노려 보고 혀를 찼다.

누이가 말했다.

"명이 저거 아기 아니예요, 할머니. 지가 머리 빗을 줄 알면서 할머니 귀찮게 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다."

누이가 말했다.

"전 미국 못 가는데, 석기하고 명이 누구하고 미국 보내요?"

"네 할아버지가 알아보러 갔다."

"뭘 믿고 애들만 보내요?"

"네가 가기 싫다며."

할머니가 원망하듯이 말했다.

명이가 힐끔 보면서 또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깟 고자가 뭐 좋다고."

누이가 벌컥 했지만 할머니 앞이라 명이를 때리지는 않았다.

꾹 참고 있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맡길 만한 사람 못찾으면 내가 갈거다."

"할아버지 혼자 두고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이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할머니 영어는 할 줄 알아요? Can you? 영어 안 쉬워요."

"입 다물어라."

할머니가 말했다.

"까짓 배우면 되지. 석기가 금방 배울 수 있다 그랬다."

"아하! 할머니 석기한테 명이 영어 가르치라는 게 실은 할머니가 배울려고."

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요 년이....."

할머니가 누이를 노려 본 후에 명이 머리를 빗으며 말했다.

"배울 게 있으면 삼척동자 한테도 머리 숙이고 배우는 법이다."

누이가 말했다.

"할머니 꿈도 꾸지 말아요. 할머닌 혀가 굳어서 영어 안 된다구요."

누이는 어쩌면 자기 딴에 무슨 궁량이 있는 듯도 보였다.

할머니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혀가 굳어? 내 혀 안 굳었다."

혀를 입속에서 움직여 보기도 했다.

누이가 말했다.

"아! 그 말이 아니고. 다른 거라니까. 할머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제일 쉬운 거니까 따라해봐요. She sells seashells by the seashore."

"뭐 뭐라고?"

"She sells seashells by the seashore."

누이가 천천히 두 번 반복했다.

"이게 제일 쉬운 거니까 못하면 영어 배워 미국갈 생각도 마요."

할머니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말했다.

"쉬세쉬세바이더시쇼."

"어!"

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머니는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했다.

"쉬 세르스 시쉐르스 바아 더 시이쉬오."

누이는 이게 웬일이냐는 듯이 석기를 보았다. 할머니는 두 번 더 해보더니 물었다.

"비슷하냐?"

명이가 대답했다.

"똑 같았어요, 할머니. She sells seashells by the seashore."

"아! 뭐야 이거. 이게 아닌데."

하고 누이가 떫떠름하게 말했다.

석기가 대답했다.

"할머니하고 명이 매일 개표 축음기 소리판 들어요. 서양 노래도 좀 듣고요."

명이가 목을 뽑으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land that I’ve heard of once in a lu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돈 맥클린이 부른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할머니는 대견한 듯이 명이를 보고 흥얼거리며 박자를 맞췄다. 명이는 노래를 그치며 말했다.

"할머니, 전 이 노래가 제일 좋아요. 할머니도 그렇죠?"

"그래. 우리 이쁜 것."

하고 할머니가 명이 볼에 뺨을 비볐다.

누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뭐야. 벌써 영어 할 줄 아는 거였어?"

"응. 할 줄 아는데, 그런데 영어 몰라."

하고 명이가 말했다.

"For twelve years, our nation was afflicted with hear-nothing, see-nothing, do-nothing Government. The Nation looked to Government but the Government looked away. Nine mocking years with the golden calf and three long years of the scourge! Nine crazy years at the ticker and three long years in the breadlines! Nine mad years of mirage and three long years of despair! Powerful influences strive today to restore that kind of government with its doctrine that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is most indifferent..... I welcome their hatred."

"하!"

하고 누이가 기막혀서 탄성을 발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936년 연설이었다.

명이가 말했다.

"다 외우고 있는 건데, 무슨 뜻인지 몰라. 오빠가 안 가르쳐줘. 끝마디 빼고. I welcome their hated. 이것만 가르쳐 줬어. 나는 적들이 미워하는 것을 겁내지 말고 환영해야 한다. 남이 나를 미워하면 나를 더 미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래. 딱 내 맘에 들어."

누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설마 오버 더 레인보우 듣고 애들 미국 보내려 한거야? 뜻도 모르고?"

할머니가 말했다.

"뜻을 왜 몰라? 왜놈 글로 해석된 게 있어. 나도 왜놈 말은 좀 한다."

누이가 신경질을 부렸다.

"하여간 안돼요. 아씨. 그 나이에 뜻도 모르면서 어떻게 영어를 배워. 미국 꿈도 꾸지 말아요."

할머니가 천연득스럽게 말했다.

"조선 땅에 있으면서 왜놈 말도 절로 배웠는데 미국 가서 영어를 왜 못할까."

누이의 화살이 석기를 향했다.

"넌 영어를 어떻게 배운 거야?"

"그냥 배웠어요."

누이가 고개를 까딱했다.

"학당엔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없는데. 포도아 말이면 몰라도."

포도아는 포르투갈이다. 광대 학당에서 수학 가르치는 선생은 포르투칼 사람이라서 아예 이름처럼 포도아 선생이라고 불렸다.

명이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오빠는 못하는 거 없어. 모르는 것도 없고. 휙휙 날고, 도술도 막 부린다."

석기의 눈을 마주치고 명이가 합! 하며 입을 다물었다.

"죽이가 됩니다. 합."

누이가 성미를 부렸다.

"하여간, 그래도 난 미국 못가요. 할머니도 못가요. 그렇게 아세요."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그거나 말해라."

하고 할머니가 말했다.

"흥 다 깼어요."

하고 누이가 방을 나가 버렸다.

할머니는 빗어 묶은 명이 머리를 다듬으며,

"저 말하는 뽄새하고는....."

하고 중얼거렸다.

명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할머니도 미국 갈거예요?"

할머니가 말했다.

"똑똑한 내 새끼, 까짓 똑똑해도 되는 데서 한 번 살아보자."

반쯤은 진심이었다.


작가의말

형제 자매 간에도 존대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어른이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동생이 열 두 세살이 되면 그때는 바로 위의 형제나 누이에게 존대말을 써야 합니다. 한 살이 아니라 하루라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존대를 받는 사람도 막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말에 더 신중해야 합니다.

작중에 필요한 부분에는 영어를 그대로 썼습니다. 번역은 짧은 건 해도 긴 건 귀찮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조는 계속 이어져서 폴란드어나 헝가리어, 라틴어 등도 그대로 쓰고 귀찮으면 번역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찮다는 의미는 굳이 번역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이렇게 불친절한 글을 누가 읽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이 소설보다는 이제 사라져가는, 또는 흔적만 남은 어떤 것들을 글로써라도 남겨 제 자식들이 훗날 참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등장하는 개표 축음기와 오버더 레인보우는 그 시절에 유행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신학문을 하는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지금 우리와 아주 다른 말을 썼습니다.
신물물의 대부분이 조선에 대응되는 말이 없으니까 원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썼는데, 그러다보니 있는 말조차 원어로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화 내용은 다국적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어와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가 단어 단위로 문장을 이루었습니다. 또 그런 말을 알아들어야 지식인이니까, 그런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말을 배웠습니다.
고종 때만 해도 영어 통역할 사람조차 없었던 조선이 불과 몇 십년만에 영어에 능통한 사람은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차대전과 일본 패망때, 미군이 들어와서 그런 사람들은 대거 미군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어는 그 이후에 학교에서 공통교육 과정에서 품질이 급락하고 공부해도 영어를 못하는 데까지 이르는 상황이 됩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다 보니 영어가 학문이 되어버렸고, 학문은 해도 영어는 못하는 사람들이 대거 배출되는 나쁜 순환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두부는 원래 고급음식입니다. 서민들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오래지 않습니다. 두부 먹으면 피부가 희고 고와진다는 것때문에(사실 여부는 모릅니다) 양반집에서 여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먹던 음식입니다. 물론 손님 상에서도 두부는 정성을 대변하는 최고의 요리였습니다. 소는 죽여서 고기를 취해 요리하면 소고기 요리지만, 두부는 콩을 두부로 만드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서민들 집에서는 두부틀 조차 없었습니다.
비슷한 걸로 따지면 소주가 있습니다. 막걸리는 쉬워도 그걸 소주로 만들려면 증류기가 있어야 합니다. 큰 질항아리 형태로 만든 소줏고리라는 게 있는데, 그 소줏고리로 증류시켜 소주를 얻습니다. 역시 뭐든지 과정이 길고 장비가 개입되면 비싸지고 귀해집니다.

이 글에 나오는 영어학습법은 실제 방법들입니다. 
석기가 말한 것 외에 성실도 말하게 될텐데, 큰 틀에서는 비슷합니다.
석기처럼 배울 때는 뜻만 대충 통하게 한 후에 각 단어들 간의 세세한 관계를 살피면 문법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붉은 입술의 바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 17. 화신의 종말 - 신들은 아바타를 만들지 못한다. 20.12.19 63 0 8쪽
26 16. 아이고 할머니 제발 - 할 건 다 하는 할머니 20.12.18 63 0 21쪽
25 16. 아이고 할머니 제발 - 내가 원래 좀 대단했어 20.12.17 66 0 10쪽
24 16. 아이고 할머니 제발 - 시집 살이 20.12.16 80 0 8쪽
23 16. 아이고 할머니 제발 - 여자가 최고 20.12.15 67 0 10쪽
22 15. 고하 - 사랑의 증인 20.12.15 70 1 14쪽
21 15. 고하 - 마라톤 20.12.14 66 0 9쪽
20 14. 스키마 - 금척 20.12.14 71 0 9쪽
19 13. 효에 대하여 20.12.13 73 1 21쪽
18 12. 아나키스트를 넘어서 20.12.13 75 1 21쪽
17 11. 북촌집 소란 - 오누이 20.12.12 74 0 20쪽
» 11. 북촌집 소란 - 영어하는 할머니 20.12.12 83 1 22쪽
15 10. 초콜렛 사기꾼 20.12.05 94 0 18쪽
14 9. 성실 누이의 케이윅스 - 혼란 시대의 사랑 20.12.04 82 0 10쪽
13 9. 성실 누이의 케이윅스 - 십면매복 20.12.03 72 0 8쪽
12 8. 경성 - 누이와 달아난 시골 미녀 20.12.02 81 1 11쪽
11 8. 경성 - 미래 도시로 20.12.01 78 1 11쪽
10 7. 영원한 생명 - 신들의 가약 20.12.01 91 1 14쪽
9 6. 모르페우스 - 도둑의 품에서 잠들다 20.12.01 99 3 11쪽
8 5. 신들의 이야기 - 아이들이 낳은 어른들 20.12.01 104 1 12쪽
7 4. 악의 시장 - 아이가 자라다 20.12.01 130 1 9쪽
6 3. 힘이 다니는 길 20.12.01 127 1 10쪽
5 2. 뱀을 잡다 - 뱀 키우는 꽃밭 20.12.01 152 1 10쪽
4 2. 뱀을 잡다 - 흰 얼굴이 까매질까봐 20.12.01 167 1 8쪽
3 1. 다섯 살 석기 - 아버지가 울며 떠나다 20.12.01 166 1 13쪽
2 1. 다섯 살 석기 - 시대를 듣다 20.12.01 167 2 9쪽
1 1. 다섯 살 석기 - 눈을 뜨다 +1 20.12.01 344 2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