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선비는 죽었다 (5)
어린 학생들의 모의직업학교는 신지가 현장에 도착하기 1시간 30분 정도 전까지, 제 2학습동의 홀에서 열렸다. 규모가 큰 행사였다. 소균과 같이 쓰는 방에 붙은 스케줄에 의하면, 4박 5일 동안의 행사에서 모든 참가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행사가 오전과 오후마다 하나씩 있었다. 직업학교는 그 중에서도 두 번째 날 열리는 행사였다. 이것은 커다란 홀에 간이로 만든 마트나 백화점이나 병원, 학교, 우주선 등등을 세워놓고, 아이들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해서 소꿉놀이로 즐기는 행사였다.
박지양은 그 안에서도 대형마트로 꾸며진 코너에서 공격을 당했다. 규모가 조금 작을 뿐이지, 거의 실재實在와 가까운 마트였다. 진열대 10개 정도가 실제 마트처럼 쭉 서 있고, 계산대 서너 개가 입구 쪽에 위치했다. 아이들은 원하는 물건을 담아 계산을 할 수 있었고, 카트를 밀며 쇼핑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계산을 하는 쪽도, 카트를 미는 쪽도 모두 아이들이었다. 부모들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소위 ‘바르게 돈을 쓰는 법’을 알려주고 상거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놀이처럼 가르칠 수 있었다.
물론 신지는 이 경우의 상거래라는 건, ‘가진 사람들의 돈 쓰는 재미’라고 여겼지만, 어쨌든 캠프를 주관한 사람들의 의견은 ‘올바른 상거래 관습’이라는 쪽이었다.
현장에는 이미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강선호가 라인 안쪽에 있다가 인사를 건넸다.
“아, 신지, 왔구나. 보시다시피, 박지양이 공격을 당한 것 같아.”
‘공격’이라는 단어가 그보다 더 어울리는 경우는 없어 보였다. 확실히 현장은 부상이나 사고라는 단어보다는 ‘공격’이 어울렸다.
박지양이 쓰러진 위치는 어떤 바보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건물들처럼 네모반듯한 타일들을 이어붙인 바닥에는 핏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때까지도 핏물은 생혈生血처럼 심하게 반질거렸고, 경호팀의 일곱 정도가 라인 주변을 에워싼 상태였다.
강선호가 폴리스라인을 들어 가까이 오도록 허락했지만, 신지는 거절했다. 무엇보다도 피 냄새가 굉장했다. 기숙사와 옛 학교 건물을 제외한 학습실의 모든 바닥은 방수타일 소재였다. 물기를 많이 흘리고 오염을 시키는 아이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타일 바닥은 빠르게 잘 닦인다는 습성이 있는 반면, 반대로 흡수가 전혀 안 된다는 특징도 있었다. 냄새 역시 흡수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덕에, 흥건한 혈액으로부터 엄청난 피 냄새가 풍겼다. 신지는 상영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코를 막았다. 상영이 눈썹을 밀어 올렸지만, 그의 목을 조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야.”
강선호가 라인 밖으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갈색의 다정한 눈동자는 우울해 보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곳이라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현장은, 사건 당시 현장이 얼마나 빨리 수습됐는지 보여주는 단서들이 수두룩했다. 의외로 박지양이 쓰러진 공간을 제외하고는 매우 얌전했다. 그토록 얌전한 게 희한할 정도였다.
“아침은 먹었어?”
강선호가 다가오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때 재천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홀Hall로 들어섰다. 소균과 성낙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성거렸다. 옛 가리파 멤버들과 강선호, 그리고 서상영까지 모인 현장은 아이러니했다, 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이런 앞날을 예상한 적이 없었는데-.
“아침이고 뭐고 속이 안 좋아요.”
신지는 넥타이 속에서 웅얼거렸다.
“원래도 위가 안 좋은데, 이제는 뇌에 공급하려 했던 모든 당과 단백질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소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지어 앞으로도 몇 끼는 거뜬히 뛰어넘을 수 있을 거예요.”
강선호가 그래, 하고 중년의 부드러움으로 웃어넘겼다. 신지는 코를 막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선생님의 죽음에 관한 금수저 멤버들의 이상한 코멘트를 마주한 터였다. 오혜아, 박지양, 고신우, 김선윤. 그들에 대해 반감이 가득하고, 또한 16년 전의 정황상, 그들 말고는 아무도 선생님을 해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 직후였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충격이었다. 유혈이 낭자한 흔적을 보자, 금수저들에 대한 반감을 제쳐두고 동정이 먼저 갔다. 도축장에서나 볼 수 있는 핏자국이 온 현장에 엉켜 있었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은, 박지양이 그 속에서 몸부림 친 궤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잔혹했다. 금수저가 선생님께 무슨 짓을 했건, 앙갚음 역시 잔인했다. 오혜아 다음에 박지양이라니. 그것도 사람이 가득한 모의학교에서!
“이놈의 모의학교에는 모의 경찰도 없대요? 모의 의사는? 이런 곳에서 그럴 듯하게 연기라도 보여줄 사람들 말이에요.”
신지는 상영의 넥타이를 몇 번이나 접어 코를 막았다. 상영은 그냥 포기한 얼굴로 태연히 서 있었다. 성낙이 “없어.”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재천이 막대사탕을 빨며 거들었다.
“그런 거 없어. 실제 경찰도 없고, 실제 의사도 없어. 그런 집안의 아이들이나 보모들이나 학부모들은 있지만, 실제로 법조계 인사들이나 의료계 학부모들은 지금 한창 일하는 중이니까.”
상영 역시 느긋한 얼굴로 재킷 앞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내 물었다. 그는 신지가 비난하듯 노려보는 눈길에도 뻔뻔했다.
“저도 냄새가 싫으니까요. 사탕향이 더 낫잖아요.”
넥타이 덕에 개처럼 끌려 다니던 상영은 아예 그것을 풀어 건넸다. 신지는 투덜거렸다.
“아니, 근데 왜 나는 여기에 불려 와야 하는 거죠? 박지양은 어떻게 됐어요?”
강선호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모형 의자에 걸터앉았다. 거대한 영화 세트 같은 내부는 외국의 거리처럼 보였다. 조형화된 풍경 속에서, 강선호의 모습은 흡사 관광객처럼 보였다.
“네가 불려온 이유는 간단해, 윤신지.”
강선호가 대답했다.
“박지양이 쓰러졌을 때 거의 모든 참가인과 스텝이 여기에 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었지. 요리팀과 외부 경호팀, 관리팀, 그리고 몇몇의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현장에 있지 않았어. 따지면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는데, 그들 모두를 조사하는 것은 자체적인 경호팀으로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내부 통신마저 거의 안 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박지양과 가장 먼 거리에 있던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몇몇의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
신지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한마디로 나는 용의자의 선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군요, 오빠. 나는 이 일을 내일 오전까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겉으로는 일단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알리바이가 정확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혐의를 벗어났다는 것이 또한 역설적이다. 대개의 영화나 소설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강선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길이었다. 그는 태블릿을 꺼내며 메모로 남긴 몇 가지를 읊어갔다. 경험상 몇 번은 겪기라도 한 듯, 평상시 같은 어투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적어도 박지양의 이동 경로상으로 봤을 때 박지양 씨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었지. 행사는 조금 전까지 열리고 있었어. 아이들의 일정은 오전 8시부터 아침 식사부터 개별 놀이 시간을 갖고, 아침 9시 30분쯤에 전체 행사를 갖는 것으로 이어질 예정이었거든. 오늘 오전과 오후까지 이어지는 전체 행사는 이 직업학교였어. 참가하는 아이들은 이 이벤트 캠프에 참가하는 아이들 모두였고……, 음, 전체가 40명, 아이들의 학부모와 보호자로 등록한 사람들이 39명, 스텝이 76명인데 스텝 중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40명, 나머지는 번외로 돌고 있거나 식사 등을 준비 중이었지. 그리고 윤신지, 너와 같이 별도의 참관인으로 등록한 사람들이 세 명. 이 중에서 두 명은 아직 캠프의 정식 스텝으로 등록이 되지 못해 인턴으로 참가하는 직원이야.”
상황이 설명되는 동안에도 피 냄새는 계속 풍겼다.
“동 시간대의 CCTV에 따르면 박지양이 여기 간이 전자물품 진열대 코너에서 쓰러진 건 오늘 오전 10시 13분, 그러니까 직업학교가 열리고 43분 안에 공격을 받은 거지. 자상은 총 3군데야. 허벅지에 한 곳, 옆구리에 두 곳이야. 여기 의사는 없는데 수의사 선생님이 학부모로 참가하고 있어서 잠깐 돌보고 있는 형편이고……, 공격을 당한 위치상 출혈이 심해 얼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것 같아.”
다른 친구들이 강선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신지는 상영의 어깨너머로 현장을 쏘아봤다. 박지양이 쓰러진 위치에는 변칙적인 선혈鮮血이 낭자했다. 진열된 전자물품 중 전투기 장난감 부분이 특히 흥건했다. 조립식 키트(미주15)근처였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 보았을 때, BO-105라고 적힌 박스 근처에 피 묻은 손자국이 가득했다.
“BO-105, 헬기입니다.”
어느 새 다가온 서상영이 말했다. 녀석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독일에서 만든 정찰헬기의 프라모델이죠. 저도 어릴 때 갖고 싶었는데, 요새 애들은 정말 좋겠어요.”
헬기 키트는 붉은색이었던 게 분명했다. 박스에 찍힌 사진에는 장난감 헬기의 적색赤色이 지양의 핏자국과 더불어 선명하게 드러났다.
상영은 「BO-105 」박스에서 「ah-1s코브라」,「CH-46E」, 그리고 「F-15J」라고 적힌 박스를 차례로 가리켰다. 그 박스들에는 피가 심하게 튀어 있었다.
“허벅지를 찔린 장소가 여기 「F-15J」 정도겠네요. 「F-15J」는 일본자위대 전투기 모형인데, 여기에 손자국이 가장 진하고 미끄러진 모양이 보이지 않습니까?”
녀석의 말처럼 핏자국이 번지고 튄 모양에 따라 행적이 그러졌다. 박지양은 아이들을 데리고 헬기 키트 코너로 와서 그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허벅지를 찔렸다. 신지는 자신보다 한 5cm 정도 큰 지양의 키를 생각하며 몸을 낮췄다. 현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모두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시작했다. 이런 식의 수사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강선호의 말이 맞았다. 현장을 보존하는 범위 내에서, 객관적인 기록이 필요했다.
박지양은 상영의 말처럼 「F-15J」부근에서 뭔가에 찔렸다. 지양의 허벅지 정도 되는 부근의 박스에 심한 핏자국이 있었다. 핏방울은 신지가 다가설 때까지도 진열장에 고여서 뚝뚝 떨어졌다.
“혈액은 물보다 점성이 강하죠.”
상영의 입에서 사탕 막대가 흔들렸다.
“선배가 보고 있는 그 부근에 수평으로 튄 혈흔들이 보이시죠? 상자에 튀었다가 흘러내린 그 자국들. 거기가 박지양 씨의 허벅지 부근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공격자는 거기서부터 공격을 시작해서, 박지양이 몸을 비틀거린 순간 오른쪽 허리를 두 번 찔렀습니다. 허리와 허벅지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박지양이 몸을 돌리는 순간에 찔렸다는 증거로 혈액이 포물선을 그리며 튀고 있어요. 봐요, 이렇게.”
“아까 사장 선배가 박지양이 허벅지를 찔렸다고 말했을 때, 너는 그 정도는 요새 인터넷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지? 무슨 의미야?”
신지는 상영의 넥타이에서 겨우 해방되었다. 상영은 “허벅지 말입니다.”하고 씽긋 웃었다. 피습 현장에 맞지 않은 청량한 미소였다. 놈이 빨고 있는 사탕에서 달달한 스트로베리 냄새가 났다. 성낙이 강선호와 이야기를 끝내고 다가오다가 그 질문을 들었다. 그는 상영에게 여전히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며 대신 대답했다.
“허벅지 대동맥 말이지. 어떤 의미에서는 치명적이라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하고 순간적으로 출혈을 심하게 만들거든. 심장보다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허벅지 쪽에서 출혈이 나는 순간, 압력이 더 거세져서 자세를 바로 잡거나 지혈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리를 못 쓰게 되거나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나 치명적이라고?”
“어. 흔히들 전문가들이 쓰는 방식이라고들 하더군. 흉기는 아직 뭔지 알 수 없어.”
소균과 재천이 “먼저 갈게.”하고 인사했다. 강선호가 그들을 일별하며 설명했다.
“오혜아의 딸도 큰일인데, 이제 박지양의 딸과 현장에서 목격한 몇몇 학생들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저놈들이 먼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일이라면, 전문가라는 서상영이 나서야 맞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캠프의 행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성낙이 눈치껏 에둘렀다.
“아이들을 담당할 상담 전문가들은 있지만, 소균이나 재천이가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봤던 놈들이라 좀 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거지, 뭐. 아까의 소동 때문에 여기 인력이 모자란다고.”
화제는 다시 박지양으로 돌아갔다. 강선호가 한숨과 함께 노곤한 어조로 밝혔다.
“허벅지의 공격은 깊지 않지만 허리 쪽이 문제야. 허리가 매우 깊어. 내장 쪽의 출혈이 의심된다고 수의사가 그러더군.”
“얼른 병원으로 이송하는 게 좋지 않나요? 경찰도 투입되고.”
“노력 중이야. 일단 여기 직원 중에 이런 악천후에 봉쇄된 계곡을 건널 만한 녀석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 원체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데, 외부로 이어지는 전화 같은 경우에도 문제가 좀 있어서 반대편 계곡에서 직원을 받아줄 준비가 필요해. 까닥하면 박지양을 구하려다가 우리 직원이 다치거나 하는 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
80년대에 다리가 생기기 전에 하천이 얼마나 급류에 위험한지, 많은 말이 돌았다. 당시에도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비가 많이 내리면 학교에 머무르거나 등교가 금지되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위험한데, 날씨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몇 분 간 멈추었던 것 같던 비도 어느 순간에 미친 듯이 쏟아졌고, 계속해서 컴컴했다. 잠겼다는 다리를 복구하거나, 산사태를 만회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오빠, 모바일은 잘 안 터져도 일반 전화기는 있지 않나요?”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캠프의 커다란 지도에는 관리동이 있는 본관이나 옛 학교 건물, 심지어 마구간에도 전화 표시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 전화가 더 유용했다. 그러나 강선호는 성낙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안 돼, 하고 대답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산사태 때문에 전봇대가 쓰러졌어.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면 정말 어이없지만, 강 건너로 사람을 보내야 해. 우리는 여기 갇힌 거야.”
홀 동쪽의 창문에서 바람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커다란 물방울들이 유리창으로 부딪히며 튕기기 시작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홀 안의 전등도 계속해서 흔들렸다. 틀과 합이 맞지 않은 창문들이 서로에게 동조하듯 움직이며 소란을 떨었다.
신지는 성낙이 몇 분 전에 한 말을 간신히 떠올렸다.
‘우리는 한마디로 고립됐어.’
현장의 사람들 역시 그 말을 떠올린 듯이 입을 다물었다.
전날의 엘러리 카페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섯 번째로 울리던 문의 차임벨 소리, 불어오던 바람과 내리치던 번개, 사신의 발자국처럼 추락하던 물방울들, 그리고 카페를 채우던 기묘한 침묵들.
그리고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서로를 향해 재빨리 돌리던 시선. 그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눈치 챘을 게 분명한 어떤 미소, 이어서 들리던 오혜아의 사고 소식.
며칠 동안 잊으려던 미소가 새로이 부상했다. 그때의 웃음이 선뜩하다고 느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산사태와 고립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모두가 예상한 이다음의 말 때문이다.
강선호가 ‘우리는 여기 갇힌 거야.’라고 말한 이후부터, 사람들은 다음에 올 말을 알아차렸다. 그때의 미소가 다섯 번째의 차임벨 직후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웃는 것처럼 보였듯, 제 2교육관 홀에서의 침묵도 역시 그랬다.
“오빠, 그 말은 그러니까 오전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나갈 수도 없고, 다리 건너편에서 이곳으로 들어올 사람도 없다는 말이니까, 결국은 박지양을 찌른 범인이 여기 현장에 있다는……”
신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고신우가 다급하게 들어서며 “강 실장!”하고 소리쳤다.
신지로서는 거의 한 번도 말을 섞어 본 기억이 없는 고신우였다. 고릴라 영화관, 멀티플렉스 시설의 완전한 소유자 고신우.
그는 피로 얼룩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상당히 다급하면서도 지쳐보였다.
“강 실장. 나 좀 봅시다.”
강선호가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듯 되물었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신우는 잘생겼지만 생명력 없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는 마치 강선호의 말에야 신지를 발견한 시선이었다.
“네, 같이 와도 상관없어요.”
곧 체념 어린 말투가 허락했다. 네? 강선호가 의외인 듯 되물었을 때도, 그는 지친 것처럼 대꾸했다.
“정말 상관없어요. 지양이가 지금 막 숨을 거뒀으니까.”
강선호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그것을 일시에 토하며 되물었다.
“죽었다고요?”
“……네.”
“방금?”
네, 고신우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금 죽었어요.”
씁쓸한 어조가 강조했다.
“수의사 여자 말로는 뭐라고 하는데, 나는 뭔지 모르겠고, 아무튼 지금 선윤이가 찾고 있으니까 가 봐야 해요. 당장.”
복도 쪽에서 바람이 패악을 부리며 지나갔다. 강선호가 착잡한 눈길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신지는 김선윤을 만나고 싶진 않았다. 한때 가장 믿을 만한 어른이었던 강선호가 말했기 때문에 현장에 남아 있을 뿐, 사건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서상영의 저주처럼 오혜아의 죽음 후에 곧이어 박지양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불길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금수저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강선호가 고신우 쪽을 향해 다가서자마자, 상영이 등을 밀었다.
“선배가 아까 하려던 말이 이제 바뀌었네요. 단순한 범인이 아니라 살인자가 함께 있다, 로.”
스트로베리 향이 가까이서 풍겼다. 상황에 맞지 않게 느긋하면서도 달콤한 향이었다.
“선배는 싫겠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풀어야 해요. 어쩌면 이런 식이면 경찰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신지는 불길한 예감을 부정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사탕의 막대가 난처한 기색으로 흔들렸다.
“아니, 사실이잖아요, 선배. 우리는 고립되어 있고, 내일 오전까지는 이 태풍이 머물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길이 복구되고 누군가 저쪽으로 건너가 사실을 전하기 전까지, 여기에 살인자일지 모를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요.”
까닥까닥. 막대사탕의 막대가 설득했다.
“박지양이 자기 허벅지와 허리를 마구 찌르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할 정도로 이상한 방식을 선택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아, 눈 돌리지 마세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제는 제가 보기에 선배도 여러 모로 위험할 수 있단 말입니다.”
“왜? 오혜아가 죽기 직전에 엘러리에서 본 미소 때문에?”
상영은 작아진 사탕을 꺼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소멸 직전의 영혼이라도 목격하는 눈이다.
“아시고 계시네요. 무엇보다도 16년 전 사건에 관계됐던 사람들이 죽고 있어요.”
신지는 엘러리에서 알아차렸던 미소를 다시 떠올렸다. 상영을 따라 김선윤의 사무실로 향하기까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6년 전 신병오 선생님의 사고사-라고 주장되던-에 관련되어 있을 네 명의 인물 중 둘이 죽었다. 그것도 둘 다 목격자가 많은 상태에서,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영의 말이 옳았다. 오혜아가 추락해서 죽고, 박지양이 허벅지와 허리를 무언가에 찔려서 죽었다. 모두 신병오 선생님께 일어난 일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 또한 그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작가의말
15) 조립식 장난감. 플라스틱 모델. 일명 일본식 영어로 프라모델プラモデル.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