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선비는 죽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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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은 초특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세를 더해갔다. 태풍이 바로 선정을 통과하는 캠프 둘째 날 밤이 고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머지 두 명, 김선윤과 고신우에 대한 인터뷰는 다음날 오전으로 미뤄졌다. 인터뷰를 미룬 사람은 그들 자신이었다. 김선윤은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게 타이트하게 스케줄을 마감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고, 고신우는 백영미 선생을 불러 저녁 시간을 회의로 치장했다.
강선호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행보에 반발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신지와 식당에 앉아 먼발치의 소균을 쳐다보는 것으로 자신의 짜증을 해소했다. 소균은 아이들과 함께 입구에서 먼 쪽에 앉아 있었고, 신지와 강선호와 상영, 그리고 성낙은 입구 쪽의 자리였다.
식사 중에는 어느 누구도 사건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모두 뇌의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지독한 날씨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상영이 고요함 속에서 먼저 식사를 끝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한 다발의 종이 뭉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신지는 셋 중에 가장 나중까지 식사를 해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교정기 때문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합리한 음식 배치 때문이었다.
신지가 먹고 싶은 음식들은 넓은 식당에서 가장 끝머리에 위치했다. 마법사 천 명과 올빼미 천 마리는 앉을 수 있는 넓이에서, 정말 불공평한 처사였다.
“이런 식의 메뉴 배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 한식이 없어서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감자 으깬 것마저 저렇게 멀리 두다니,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금수저에게 생각을 바라면 안 되지.”
성낙이 우유와 빵만 트레이에 담은 채로 앉으며 달랬다. 그는 신지가 식당 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샐러드를 담으러 가는 동안 그 바로 앞에서 모든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신지가 원하는 음식을 다 담고 돌아올 때도 다시 뭐 먹을 게 없나, 하는 시선으로 또 돌았고, 가장 나중에 착석했다.
신지는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침도 점심도 모두 거른 상태였다. 괜히 소균이 남기고 간 식단표만 보며 하루 종일 군침을 삼켰다. 아침 메뉴에는 미국식과 영국식, 그리고 한식이 모두 있었다. 심지어 달걀도 후라이와 삶은 것과 스크램블이 따로 있었고, 소시지와 베이컨, 그리고 햄도 모두 구별하고 있었다. 감자 역시 튀긴 것과 으깬 것이 모두 있어, 굶주린 자에게는 희망으로 도배되는 로망의 식단이었다. 식단표의 점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은 박지양의 사건 때문인지 상당히 어수선한 메뉴였다. 그 많은 감자는 다 어디로 갔는지 미스터리였다. 뷔페식 식당의 테이블은 여러 국적의 음식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신지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많은 양의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했고, 원래도 먹는 속도가 느렸다. 그 덕에 가장 늦게 식사를 끝내야 했다.
식판이 빌 때쯤, 강선호가 카페인이 적은 커피를 건넸다.
“오늘 수고 많았어.”
그쯤에야 포만감이 주는 관대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 윤신지, 기분이 좀 나아졌냐?”
성낙이 뱅글거리며며 놀려댔다. 응, 신지는 시무룩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뭐, 밥 먹고 나니까 괜찮은 뷔페이기도 한 것 같아. 죽이나 샐러드가 저렇게 먼 건 좀 짜증나지만. 하긴 단식원 어딘가는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 그것도 몇 km를 달려가야 먹을 수 있는 곳에 식당을 둔대. 이것도 다 내 다이어트를 위한 캠프의 배려라고 봐야지.”
“대단히 긍정적이군.”
성낙이 웃으며 받아쳤다. 신지는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욕설이 섞인 한담을 나누었다. 오전에 있었던 엄청난 사건을 잊기에는 친구들이 제격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취침 준비를 하기 위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며 테이블을 지나쳤다.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오전보다는 회복된 기색들이었다.
식당의 불이 거의 꺼지고 한참 후에는 강선호가 일어섰다. 그는 그때서야 어두워진 주변을 의식한 듯, “우리도 가야지.”하고 눈짓을 보내왔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 백영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들의 회의 겸 식사에 불려갔던 그는,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다가왔다.
“저기, 실장님? 뭔가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강선호는 빈 컵을 든 채로 멈춰 섰다.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라도?”
“아니, 그건 아닌데, 조금 전까지 이사님들의 회의에 참가했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백영미는 머뭇거리며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강선호는 원래의 자리에 도로 앉으며 건조하게 웃었다.
“저는 경찰이 아니니까, 여기서 편하게 말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서상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두 시간 가까이 서류만 보고 메모를 하던 녀석이었다. 신지와 성낙도 장난질을 멈추고 백영미를 응시했다.
백영미는 몇 초를 더 주저하더니 결국 털어놓았다.
“별 거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실 좀 전에 이사님들이 부르셔서 갔는데, 아이들이 식사를 빨리 끝내서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엿듣게 된 것같이 되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백 선생. 말해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강선호가 인내심을 발휘했다. 백영미는 입매를 굳히더니, 곧 “그게,”하고 말했다.
“저 사실은, 처음에는 두 분이 거의 다투듯이 말씀을 나누시고 있으셔서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도 고신우 이사님이 먼저 소리쳤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사람이 웃는 걸 너도 봤잖아! 알고 있는 거라고!’라고요. 그랬더니, 김선윤 이사님이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문제는 서상영이 있으니 됐어. 박지양의 문제도 서상영이 있으니까 됐고.’라고요.”
신지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포만감이 싹 가셨다. 서상영이 자신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졌다. 성낙 역시 손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열심히 털었다.
백영미는 상영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한 후 약간 울먹였다.
“죄송해요,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순박한 얼굴에는 당황이 역력했다. 강선호가 아닙니다, 라고 그를 위로했다. 강선호가 백영미를 배웅하고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성낙이 흥분하며 따졌다.
“방금 그거 뭡니까?”
재천이 먼저 샤워를 끝내고 식당에 나타났다. 그는 친구들의 테이블로 다가오다가 멈춰 섰다.
강선호는 조용한 얼굴로 “그렇군.”하고 눈을 깜박였다. 성낙이 다시 거세게 항의했다. 자식의 체벌에 항의하는 학부모의 태도였다.
“방금 그거 뭐냐고요, 선배!”
강선호는 묵묵히 버티다가 상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백영미가 한 말의 진의를 아는 듯이 담담했다.
“네가 먼저 말할래, 아니면 내가 말할까?”
영문을 모르는 재천이 “뭐야?”하고 끼어들었다. 성낙이 그의 어깨를 꾹 잡아 의자에 앉혔다. 둘은 고등학생 때처럼 행동했다. 둘 다 혈기로 왕성하고 몰려다니기 좋아하던 그때의 표정이었다.
강선호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상영을 주시했다. 상영은 오히려 별 거 아니라는 포즈로 대꾸했다.
“제가 이야기하면 오해만 쌓일 텐데요.”
지나치게 초연한 태도였다. 강선호가 미간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내가 말할게. 김선윤이 말한 ‘서상영이 있으니까 됐어.’라는 말은 말이지. 의미가 살짝 남다른 거라서 니들이 오해할 것 같기는 한데…….”
성낙이 툴툴댔다.
“뭐야, 서상영의 정체가 실은 우리가 아는 그런 게 아니라든지, 이런 건가? 신지가 16년 전부터 만날 저 녀석을 의심했는데.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뭐, 약간은 그런 의미지.”
강선호는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더니 툭 던지듯 고백했다.
“서상영의 전공은 범죄심리학이야. 유아심리가 아니라.”
놀랄 틈도 없었다. 특유의 느린 말투가 이어졌다.
“런던에서 범죄 심리를 전공하고, 현장 업무 격으로 실무도 좀 뛰다가, 금수저 녀석들의 제안으로 여기 돌아온 거야.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고 신지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 이유가 신지를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어. 금수저 멤버들의 부탁으로.”
“감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서상영은 재빨리 항변했지만, 파급효과가 거셌다. 신지도 놀랐지만 성낙이 먼저 일어섰다. 퉁-, 그의 몸에서 튕긴 의자가 쓰러지며 팽이처럼 돌아갔다.
“뭐라고? 그런 새끼에게 내가 이 친구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보호, 감시.
스파이 영화에서나 듣던 단어들이 마구 혼재했다. 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TV활극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노려보거나 경계했다. 신지는 왠지 모두에게 짐이 되면서도 사랑받는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서상영에 대한 자신의 음모 일부가 맞아 으쓱하면서도 섭섭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던 상영의 행동도 얼추 감이 잡혔다. 그는 지난 저녁, 이벤트 캠프의 관리자 중 하나인데도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지 않았다. 박지양의 피습이라든지, 오혜아의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몇 시간 전에, 그 자신이 강선호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선배는 전직과 현직에 걸맞게 과학수사를 하시죠. 저는 제 전공에 맞게 이 사건에 얽힌 심리적인 이야기를 풀어볼 테니까요.’
또한 그는 말했다.
‘선배에게 16년 전 사건의 의문에 대해 먼저 제기한 건 저였는데요. 거기에 신지 선배의 남다른 능력을 보고 여기까지 초대한 것도 저인데.’
서상영이 강선호의 추궁 중에 했던 모호한 표현들도 납득이 갔다.
강선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의 입장은 항상 미묘하기 때문에…….’
강선호는 유독 서상영과 16년 전 범죄 이야기를 나눌 때 함께했고, 박지양의 사건이 일어날 때 주변에서 이상한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는지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한마디로 서상영 스스로가 말했듯이 과학수사를 전문으로 해야 할, 한때의 경찰과 일선에서 일하던 범죄심리학자의 앙상블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은연중에 나누던 시선의 교환 역시 같은 의미였다.
그러니 상영이 자신의 정체를 아주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성낙과 재천은 얼굴을 붉힌 채 따졌지만, 상영은 생글거렸다.
“내가 심리학을 공부했고, 일선에서 일했고, 어린이 영재 캠프에서 일하니까 그냥 유아심리 전공이라고 생각했던 건 선배들 아닙니까. 지금 화를 내는 것도, 제가 금수저 선배들의 부탁을 받고 여기에 와서 그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해서니까요. 아니, 신지 선배가 16년 전을 조금이라도 기억해내면 내가 그들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거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시는 겁니까?”
신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그 웃음을 지켜보았다. 녀석의 웃음이 주는 의미를 명확히 깨닫는 중이었다.
서상영은 웃으면서 화를 냈다.
“감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다들 알잖아요. 런던에서 범죄에 대해서 공부했고, 일했고, 그리고 어느 날부터 다시 16년 전 사건에 대해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마침 선윤 선배도 그때 런던에 들렀고요. 16년 전의 저는 어렸고, 증거를 모은다든지,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16년 후에는 이야기가 다르죠. 그렇다고 수사권도 체포권도, 그럴 자격도 없는 제가 금수저 선배들을 추궁하거나 발 빼게 할 수도 없고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금수저 선배들이 영재를 위한 캠프를 운영하고 있고, 거기에 알맞은 명문대 학위증을 가진 심리학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온 겁니다. 그게 고작 4개월 전의 일이에요. 돌아와서 강선호 선배랑 계속 16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요.
뭘 의심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지 선배가 돌아온 후에, 금수저 선배들이 나에게 신지 선배가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 알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죠. 가리파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신지 선배를 보호해달라고 했고요. 나는……, 그래서 그러기로 한 겁니다. 도대체 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제 3자의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가 애당초 금수저 선배들에게 협력할 생각이었다면 왜 이곳에 오자마자 강선호 선배와 16년 전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선배들이 이러는 거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박지양 씨가 죽은 이후로 뭐가 변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요.”
신지는 식은땀이 났다. 눈앞이 흐려지고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상영에 대한 불쾌감 때문은 아니었다. 다른 원인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성낙의 고함소리가 그 원인을 찾기도 전에 연거푸 이어졌다.
“하지만 금수저 선배들에게 부탁받은 걸 우리에게도 말했어야지! 그쪽은 감시해달라는 거고, 우리는 보호해달라는 건데!”
“금수저파든, 가리파든, 어느 쪽에도 서로가 저에게 부탁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지금 제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예요!”
갑자기 쾅, 하고 탁자가 흔들렸다. 신지는 그것이 자신이 일어서며 내는 소리라는 사실을 한참 후에 깨달았다. 상영이 “괜찮아요?”하고 같이 일어섰다. 재천이 오랜만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말을 꺼내며 다가왔다.
“아냐, 서상영, 넌 닥치고 앉아 있어.”
“아, 나……, 미안한데 정말 어지러워. 토하고 싶어.”
정말 어지러웠다. 가까스로 상태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옆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뿌옇게 변하는 눈앞으로도 몸을 던지듯 안아 올리는 상대가 느껴졌다.
모두를 밀어내고 다가온 사람은 스파이 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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