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대학생은 다재다능 - 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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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런 말이 있다. 사회에서 자기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업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지만 연예계는 특히 더했다. 그나마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눈 뜨면 코 베이는 곳이지.’
그건 계약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일정 이상의 인지도가 있는 연예인이 아니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밀었으니까. 연습생이면 두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당장 도희가 받아든 계약서에 쓰인 첫 조항부터가 그러했다.
- 을(이도희)의 위치를 항상 갑(EM 엔터테인먼트)에 통보해야 한다.
다른 부문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조항은 전혀 문제가 될 것 없다고. 회장 김혁운은 생각하고 있겠지. 도희는 그렇게 판단하며 다음 조항을 살폈다.
- 을이 해외로 출국 시 무조건 갑의 사전 승인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조항들인가. 인간의 기본 인권을 하나도 배려하지 않는다는, 그런 거창한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사회생활을 해 보지 않아도 현대에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납득이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조항이 지금 연예계에선 평범하다는 것이지만.’
특히나 인지도를 쌓은 연예인의 재계약이 아니라 초기의 계약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뒤의 조항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 연예계 모든 활동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은 갑이 가져간다던가. 갑의 회사 홍보 및 광고 출연에 있어서 무상출연을 해야 한다.
- 을의 동의가 없어도 갑은 을의 권리를 제삼자에 양도할 수 있다.
- 계약 기간 을이 만든 미발표곡의 경우 갑이 소유한다. 단, 갑은 미발표곡의 향후 방향을 꼭 을과 논의해야 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미발표곡에 관한 것도 그렇지.’
나름 배려한답시고 뒤에 조건을 달았다. 그러니 본질은 미발표곡의 권리가 EM 엔터에 있다는 것. 물론 다른 엔터테인먼트는 그런 조건조차 없을 확률이 높지만.
‘의미가 없어.’
이후 내용을 살피는 건.
그냥 시간 낭비였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계약서에 드러나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라는 건 의미가 없었다. 도희는 평행세계 이수아의 기억 때문에 그걸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웃긴 건 더 교묘하게 악질적인 부분도 엿보인다는 거지.’
그러나 도희는 굳이 그걸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약서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EM 엔터와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군요.”
회장은 그런 도희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밀고 당기는 것 하나 없이 이렇게 끝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지 말씀을 좀 해주시죠.”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만약 연습생이라면 몰라서. 혹은 알아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입안이 썼다. 도희는 그래도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등을 돌렸다. 김혁운은 그런 도희를 급하게 붙잡으며 외쳤다.
“잠시만요!”
그리고 과장되게 고개를 구십도로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나봅니다.”
“아닙니다. 그럴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나름 고심하셔서 내민 계약서 아닙니까?”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던 김혁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엔······아니요, 의미가 없네요.”
김혁운이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계약서에서 이미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굳이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계약이야 하지 않는 거야 물론이었고 말이다.
“남은 프로듀서 계약 기간은 본분에 충실히 임할 터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니 그만 고개를 드시고 붙잡은 제 팔 좀 놓아주시죠.”
김혁운은 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따로 준비한 계약서를 내밀면 더 기분이 상하겠는데.’
원래는 계약서 조항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놀란 척을 한 뒤 이게 진짜 계약서라고. 적당히 어르고 달래며 진심으로 당신을 인정한다며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이게 김혁운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파토낼 줄은.’
도희는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 김혁운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회장님?”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김혁운이 반응이 없으면 그냥 몸을 억지로라도 빼내려고 했다. 그런 도희의 움직임을 느낀 김혁운이 다급하게 외쳤다.
“도희 씨가 계약서를 작성해 주시죠.”
“네?”
“법리적으로 꽤 밝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터이니 계약서를 써 주세요.”
“······.”
여기서 놓치면 이도희는 앞으로 EM 엔터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김혁운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건 오랫동안 한 회사를 경영해온 우두머리로서의 직감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떤 계약서를 내밀 줄 알고요?”
김혁운이 고개를 들며 도희를 빤히 바라봤다. 팔은 여전히 붙잡은 채. 그러다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든지 좋습니다.”
도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게.’
이미 도희의 마음은 EM 엔터를 떠난 상태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김혁운이 자신을 쉽게 놓아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냥 뿌리치고 나와도 되기는 하지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도희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노트북 한 대를 빌렸다. 그리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걸 받아들이면 호구지 호구.’
그것도 상 호구.
‘톱스타하고도 이런 계약은 안 맺어.’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월드 스타 정도랄까. 세계에 엄청난 인지도를 얻은 연예인 정도라면.
‘또 모르겠네.’
하지만 월드 스타가 이 계약서를 내밀었다고 해도 한참을 고민하고 회의를 엄청나게 거치지 않았을까 싶었다.
“여기 프린터 있죠?”
“물론입니다.”
도희는 비서를 부르려던 회장에게 고개를 저은 후 노트북을 프린터에 연결했다. 그리고 두 부의 계약서를 인쇄한 다음 김혁운에게 내밀었다.
“만약에 이 계약서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신다면 사인하겠습니다.”
김혁운은 도희가 작성한 계약서를 읽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한 마디로 이건 계약을 하지 말자는 소리였다. 아무리 이도희가 탐나는 사람이고 다른 회사에 뺏길 수 없다는 욕심이 크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무어라 김혁운이 한마디 하려던 순간.
“방금 말했듯이 수정이 없어야 합니다. 아까 분명히 회장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무조건 수용하겠다고요. 그게 힘드시다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고민하는 김혁운을 바라보며 도희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정말 만약에 이 계약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도희로서는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계약 해지의 시점 및 권리가 온전히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수틀리면 그냥 바로 계약을 끝내면 되었다.
‘수익 배분이나 다른 조건도 그렇고.’
예컨대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초고가의 그랜드 피아노를 마련해 줘야 한다던가 등. 그러니 받아들일 리가 없지. 도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봐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네?”
“사인하죠.”
“?”
도희가 처음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사인하겠습니다.”
“아, 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머리라도 다쳤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
도희와 계약을 끝마친 후 김혁운이 한숨을 푹 내쉬며 김신혁 비서에게 말했다.
“내가 잘한 것인지 모르겠어.”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김신혁이 계약서를 다시 한번 훑으며 말했다.
“이건 완전히 저희를 등쳐먹겠다는 계약서 아닙니까.”
“맞지.”
“그러니까 왜 그러셨어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계약을 물리시는 게 좋다고 봅니다만.”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사인했겠나?”
김혁운이 도희가 내민 계약을 받아들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접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 도희라는 사람 자체. 둘은 아까 읽었던 김신혁의 보고서였다.
“하지만 회장님. 이건 제가 보기에 당장 소송을 걸어서라도 파기해야 하는 계약서가 맞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이도희는 음악이란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수도 있다고. 하다못해 최소한 세계에 이름은 날릴 거라고 말이야.”
김신혁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설령 그런 월드 스타라도 이 계약서는 좀 과합니다.”
“아니지, 아니야. 그런 월드 스타라면 애초에 우리 회사와 계약할리가 없지. 안 그런가?”
아무리 EM 엔터가 잘 나간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안에서 이야기였다. 하물며 대한민국에서 일 등도 아니었고 말이다.
‘잘 해봐야 3, 4등 정도.’
그러니 여기서 이도희를 붙잡아야 했다. 지금이 이도희라는 사람의 가치가 제일 가려진 시기가 아니던가. 하다못해 원래 준비했던 두 번째 계약서라면 높은 확률의 투자라고 했겠지만.
‘이건 뭐 도박이군, 도박이야.’
그러나 도박을 하지 않고서는 이도희와 계약 할 수 없다고 김혁운은 판단했다.
“자네 눈은 항상 옳았지.”
“회장님.”
“월드 스타 하나가 우리 회사에서 나온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되겠나? 100억도 우스워.”
“하지만 그 전에 이도희가 계약을 멋대로 끝낸다면 정말 큰 손해를 볼 겁니다. 계약금만 해도 10억입니다.”
김혁운이 피식 웃었다.
“그래. 10억을 날릴 수도 있지. 아마 한동안 우리는 회사는 손해만 볼 거야.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자네 눈을 믿네.”
“······회장님.”
“자네가 판단했어. 30년 동안 자네 눈은 늘 옳았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이따금 틀리더군. 자네를 믿지 못한 경우도 많았고.”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자네도 내 꿈을 알지 않던가.”
언젠가 내 회사에서 세계를 울리는 스타를 배출하겠다. 그게 김혁운 회장의 꿈이자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한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세계는커녕 미국조차 정복할 수 없었다.
“내 꿈을 이룰 기회라고 생각했네. 그러니 앞으로 최대한 이도희를 배려하고 호감을 어떻게든 사. 그러면 돼.”
왜냐하면 그 조건. 다른 회사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그런 계약을 한 번 해봤다면 다른 회사로 이적하기 쉽지 않은 법이었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사비라도 털고 그것도 안 되면 비자금이라도 쓸 테니까 말이야.”
***
도희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장이 미친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기로 했다. 왜냐하면 보통 연예인들과 다르게 계약의 주체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연예계 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수라.’
돌이켜보면 큰 생각 없이 상황에 몸을 맡겼었다. 흘러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솔직히 몰랐으니까.’
죽은 뒤 과거를 거스를지도. 그리고 「내가 도와준 누군가의 기억과 재능을, 경험을 흡수 및 몸으로 재현하는 능력.」을 얻게 될지도 말이다. 그래서 좀 고민이 되었다. 앞으로의 미래에 관하여.
‘생각해보면 그래.’
공부를 잘하기 위한 것. 그건 아버지의 인정을, 집안의 행복을 원해서였다. 그렇게 된다면 부모님도 형과 누나도. 그리고 나도 행복하게 될 줄 알았다.
‘공부가 좋아서가 아니었어.’
공부는 수단이었을 뿐.
‘그나저나 행복인가.’
참 어려웠다. 행복이란 저마다 모두 그 크기와 형태 모양이 달랐으니까. 그렇게 행복에 관해 고민하던 도희는 스스로에게 툭 질문해 봤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솔직히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가까이 있는 평행선과 같았다. 눈에 아른거리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이번에는 잡고 싶어. 어떻게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하는 것.’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그건 자신이 진정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그러니 일단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었다. 마침 딱 좋은 능력도 얻고 상황도 마련되지 않았던가.
‘일단 당분간은 음악에 집중해보자.’
가수로서.
호기심과 흥미, 능력은 충분했으니까. 만약에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취미로 남겨두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전까진 최선을 다하고 말이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었던 대학 생활에 충실 하자. 머지않아 입학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도희는 그날 밤을 마무리 지었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공중누각입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는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제가 그동안 후원금 관련 외 따로 후기를 남기지 않은 것은 작가란 글로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굳이 따로 말을 남기는 이유는 최근 댓글에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입니다.(독자분들의 댓글은 항상 꼼꼼하게 챙겨 읽고 있습니다.)
글의 방향성이라거나 고구마 구간이라던가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심리 등. 충분히 독자분들에게 납득이 가게끔 썼다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건 제 글 솜씨가 아직 모자라서 그런 거겠죠.
좀 더 제가 노력해서, 그래서 독자분들이 최대한 읽으심과 동시에 납득할 수 있도록. 혹은 그게 정말 여의치 않으면 뒷편에서라도 이해가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편당 연재 시장인 이곳에서 독자분들이 바로바로 이해가 가게끔 제가 글을 써야하는데 제 필력이 충분하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좀 더 노력하고 고민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하고,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도희의 이야기를 지켜봐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추운 날씨와 코로나 조심하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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