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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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코
작품등록일 :
2020.12.2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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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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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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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DUMMY

하지만 서큐버스는 의외의 말을 뱉었다.


“고마워요.”

로브 모자의 그늘 속에서 그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보였다.


“무엇이 고맙다는 거지.”

나는 의문을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고스트가 죽지 않고 계속 숨어있었더라면, 얼마안가 검은 사자들에게 붙잡힐 거였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고스트는 엄청난 벌을 받게 될 거에요. 저를 도왔다는 사실 때문에요···.”

“······.”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고스트를 죽이지 않고 달아난 것 하며··· 내게 모든 걸 털어놓는 모습까지.

그녀는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작은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달아났어야 했을 텐데···.


아니면, 이제야 던전을 벗어난 걸 후회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기 때문에 고스트가 죽은 게 결국 잘된 일이라 말하는 것일까.


서큐버스는 내 침묵에 아랑곳 않고 말을 다시 이었다.


“고스트는 날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내가 떠나기 위해 입구 앞에 섰을 때, 루어와 내 앞을 막아섰지요. 고스트는 그게 날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서큐버스는 상세히 말을 이었다.


“나는 날 위하는 존재를 해칠 수 없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큰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내 연인이여. 무슨 말을 나누는 거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분위기는 읽을 수 있는 거겠지.

루어는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선 서큐버스를 보며 애달픈 소리를 냈다.


게다가, 연인이라니.

그가 서큐버스를 구할 결심을 한 이유가 순식간에 이해되었다.

서큐버스의 본질은 이성을 유혹하는 데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도피를 위해 루어를 유혹했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성공했다.


서큐버스가 루어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리곤 그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건 단순한 애정행각이 아니었다.

그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이별을 암시하고 있었다.

서글픈 다정과 칼 같은 냉정이 동시에 밴 행동이었다.


결국 이 도주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서큐버스는 금세 포옹을 거두었다.

이어서 그녀가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서큐버스 에르제베트’가 ‘침묵의 검사 루어’에게 스킬 ‘침실 속의 최면’을 발동합니다. 》


안내와 동시에 루어의 몸 주변으로 붉은 오라가 새털구름처럼 감겼다.

저 스킬에 휘말린 테라리언은 서큐버스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보통의 경우, 테라리언이 동료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루어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눈이 희게 뒤집혀 있는 게, 혼미한 정신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 에르제베트라고?

서큐버스에게 그런 이름이 붙어있었던가?

나는 황급히 그녀의 정보를 조회했다.


[ 서큐버스 에르제베트 ]

[ 전체 LV. 85 ]

[ 힘 178. 민첩 302. 방어 258. 마력 304. 행운 42. ]

[ 등급: 전설 ]

[ 키워드: 꿈의 여인. 사랑꾼. 로맨티스트. ]

[ 기본 스킬은 생략되며, 특화 스킬만 표시됩니다. ]

[ 침실 속의 최면 LV.38 ]

[ 꿈의 노래 LV.51 ]

[ 교란의 주문 LV.29 ]

+

[ 특이사항: ‘진정한 부름’을 통해 이름을 획득하였습니다. ]


과연, 이 세계는 호명이 각별한 힘을 지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새롭게 부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나는 솟구치는 의문 속에서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정적을 깬 것은 서큐버스였다.


그녀는 최면에 걸린 루어를 내버려두고, 내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당신이 저를 죽이리라는 걸 알아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지요.”

그렇게 말하며 서큐버스는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 후드를 벗어젖혔다.


서큐버스의 얼굴이 어둑한 실내에서도 아름답게 빛났다.

은빛 머리칼과 붉은 두 눈. 그리고 머리 양 옆에 쌍으로 자리 잡은 커다란 검은 뿔까지.

기괴하기 그지없을 요소들이 그녀의 미모 속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화하고 있었다.


“다만··· 저를 죽이기 전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서큐버스가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엇이지.”

“루어, 저 사람만은 살려주세요.”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내 말에 서큐버스는 입을 조금 벌리고 잠시 놀라더니, 금세 희미한 미소를 드리웠다.

나에 대한 고마움보단, 자조가 담긴. 씁쓸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앞선 내 판단이 그릇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저 그녀가 죄 없는 남성을 꾀어내고, 뭔지 모를 악한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고 감히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섣불리 예상할 수 없는···

영겁의 회한 같은 게 그녀의 얼굴에 그늘처럼 드리웠다.


이 세계에서 몬스터들은 영원토록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

그 시절 속에서 몬스터들이 겪어낼 것은 비단 비탄만 있는 게 아닐 지도 몰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루어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로브 속으로 조심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내 허리춤에 걸린 ‘속박의 검’ 자루가 손끝에 닿았다.

이제 순식간에 검을 꺼내 서큐버스를 찌르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자꾸 망설이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나.”

내 물음에 서큐버스가 짧게 도리질했다.


나는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리고만 싶었다.

처음으로 표정을 지을 수 없는 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가없이 한심한 꼴이로군.

바보 같은 연민에 검 한번 내지르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이젠 정말로 용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스릉!


나는 거칠게 속박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검 끝을 서큐버스를 향해 겨누었다.

검 주변의 희붐한 빛이 서큐버스의 낯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어주었다.

서큐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검에 죽으면 넌 네 스스로 부활할 힘을 잃는다.”

구차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서큐버스는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날 바라보기만 했다.


“검은 사자들이 네게 어떤 벌을 내릴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왜 함부로 그녀를 찌르지 못하는 걸까.


그때였다.


내 연인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내게 해답을 안긴 것은.


《 ‘이졸데의 속삭임’이 ‘마리언의 부름’하고 속삭입니다. 》


어느새 무거운 어둠이 깔린 이 흉한 폐가 안에서, 나는 이졸데 덕분에 검을 거둘 수 있었다.



* * *



나는 붉은 눈의 몽마(夢魔).

잠든 용사들의 꿈속을 헤집으며

정기를 앗아간다네.


내가 바란 건 사랑인데

날 가진 용사들은

나를 원망한다네.


날 가둔 방안에서

나는 홀로

꿈의 노래를 부를 뿐.


《 ‘서큐버스 에르제베트’가 스킬 ‘꿈의 노래’를 발동을 끝마칩니다. 》

《 ‘꿈의 노래’의 꿈-현실 경계 와해 효과로 모든 능력치 포인트가 10분간 –100포인트 떨어집니다. 》

《 ‘이졸데의 속삭임’이 연민의 미소를 띱니다. 》


나는 머리가 어지럽게 빙빙 도는 기분에 온몸을 움츠렸다.

몸이 휘청했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르제베트 역시 스킬 사용으로 인해 꽤 많은 마력을 소진한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내 옆에 힘없이 털썩 앉았다.

루어는 아직도 제 속을 헤매는 모양인지, 흐린 눈을 하고 우리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에르제베트가 방금 끝마친 ‘꿈의 노래’는 공격을 위한 스킬이 아니었다.

이는 서큐버스의 근간을 이루는 스킬로, 서큐버스가 시전 대상의 꿈속으로 들어가 무의식의 풍경을 마음대로 뒤바꿔버리는 스킬이었다. 또한 무의식을 관람하는 것도 가능해 전투 대상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챌 수 있는 스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꿈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서큐버스는 스킬 시전 대상의 머릿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이 스킬을 발동한 건 설명의 효율을 위해서였다.


마리언과 그녀 사이의 일을 모두 말로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길고··· 모호했다.

둘 사이에 형성된 감정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말로만 듣기엔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스킬 ‘꿈의 노래’를 발동하라고 제안한 건 나였다.

물론 스킬의 온갖 부작용들을 겪고 있는 지금은 아주 후회하고 있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경험을 통해 ‘진정한 부름’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옆에 힘없이 앉아있는 그녀, 서큐버스의 이름.

에르제베트라는 이름은. 그녀의 연인, 마리언이 지어준 것이었다.


그들 사이의 언어적 장벽은 언제나 견고했다.

하지만 ‘진정한 부름’은 그것을 뛰어넘었다.


나는 직감했다.

진정한 부름의 힘에 이 세계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이 세계를 존재케 하고, 동시에 뒤엎을 수 있는 것.

그 사실이 아주 강력한 암시처럼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르제베트를 쳐다보았다.

마력 회복이 더딘 듯 그녀는 거의 잠들 것처럼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서진 창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었고, 그녀의 검은 두 뿔이 야성적으로 빛났다.


이름을 얻은 에르제베트는 마리언과 함께 던전을 벗어나기로 했었다.

자유를 얻고, 더 이상 요망한 몽마 서큐버스가 아닌 삶을 꿈꾸었다.

마리언과 함께 탈주의 날을 기약했다.

하지만 그 날이 되어서도, 며칠이 지나서도 마리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마리언이라고 주장하는 거대 다이어울프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 테라리언이 몬스터가 되는 건 불가능하···.”

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에르제베트가 힘없이 답했다.


“연금술사가 내리는 징벌 중 하나에요.”

비극을 고하는 에르제베트의 목소리는 오히려 덤덤했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지만, 나는 차마 에르제베트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마리언의 결말을 알아버린 이상, 그녀 역시 징벌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였겠지요. 마리언은 던전 밖으로 날 꺼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수소문했어요.”

에르제베트가 혼잣말 하듯 말했다.

그리곤 잠시간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나는 그녀가 무엇에 대해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내가 아니라 내 로브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요. 그쪽이 걸치고 있는 로브 말이에요. 아마 그걸 찾았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


“그러다 검은 사자들에게까지 닿았던 거겠지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자의 덤덤함이었다.


“이젠 정말 날 죽여도 좋아요.”

에르제베트가 시선을 떨구었다.


“마리언에 대한 소식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내 손에는 여전히 ‘속박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내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이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마리언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젠 불가능해요.”

에르제베트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얼굴보다 더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을 더욱 세게 감아쥐었다.

냉랭한 기운이 손안에 은은히 감겼다.

그런 감촉 따위, 이젠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내 말을 뱉었다.


“널 죽이지 않겠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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