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저씨를 슬프게 했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완결

무명귀
작품등록일 :
2020.12.26 15:25
최근연재일 :
2021.02.0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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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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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과거 -

DUMMY

마리아는 마을회의장을 뛰쳐나왔다. 모두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죽도록 싫었다. 로위를 이대로 못 볼까봐 두려웠다. 공포는 삽시간에 불안으로 번졌다.


“ 괜찮아? ”


누군가가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에밋이었다. 회의장에서 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밋은 어디서건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이었다. 존재감이란 것을 최소로 정해놓은 것처럼 그는 어디에서건 조용하게 지냈다.


그와 한 공간에 있었더라도 인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에밋은 마리아의 이마에서 낙하하는 땀방울을 제 소매로 닦아주었다. 순수한 호의. 에밋은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아이다.


“ 괜찮아. ”


마리아는 그런 호의를 뿌리쳤다. 자신의 생각보다 심한 거부반응이라서 당황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에겐 모든 마을 사람들이 적처럼 보였다.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도 아닌데 에밋조차도 로위를 쫓아내는 데에 찬동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너무나 이른 의심이란 걸 알지만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로위는 사라졌고, 마을은 격변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 난 네 편이야. 그러니까, 로위 아저씨 편이기도 해. ”


에밋이 경계심의 원인을 알겠다는 듯 설명했다. 에밋의 눈이 신뢰감을 심어주려 애쓰는 듯 진지했다. 에밋이 따뜻하게 웃었다. 그날의 하늘은 무척이나 우중충했는데, 그와는 대조되는 상쾌한 미소였다. 에밋의 힘은 이랬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모두를 밝혔다.


“ 너, 왜 그렇게 웃어? 재수없게. ”


그녀 스스로도 무슨 소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괜한 성질이고 폭언이었다. 굳이 자기변호를 하자면, 그저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고, 여기서 분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에밋의 웃음이 약 오를 정도로 따뜻해서 화가 났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로위가 듣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에밋은 말이 없었다. 그게 더 짜증났다. 무슨 말이라도 하길 바랐다. 같이 성질을 내고 자리를 뜨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리아는 온몸의 구멍이 물을 뿜기 직전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눈물이고 콧물이고 땀이고 금세 쏟아질 것 같았다. 모든 감정이 최고조가 되고 있었다. 그저 이유 없이 터지는 울분을 쏟아내고 싶었다. 이 바보 같은 투명인간에게. 내일이면 다시 아무도 모르게 살아갈 이 물러터진 놈에게.


“ 웃지 마! 내가 얼마나 슬픈데 웃음이 나와? 너까짓 게 내 편 들어준다고 뭐가 달라져? 누가 너따위가 하는 말을 들어줄 것 같아? 네가 마을사람들의 말에 반대표를 던진다고 해서 누가 거들떠나 봐줄 것 같아?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아저씰 데려올 수도 없으면서 웃기나 하고..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오늘도 평소처럼 잠자코 있기나 하지. 왜 말을 걸어서 사람 약 올리는 거야, 응? 정말.. 정말 싫어, 너 같은 놈. ”


마리아는 졸도할 듯이 몸을 뒤흔들었다. 슬픔이 차올랐다. 분노가 뚜껑을 걷어차고 터져나왔다. 두 주먹으로 에밋의 좁은 가슴을 가격하려고 했지만 작게만 보이던 에밋의 손에 팔목이 잡혀 제압 당했다. 마리아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너까짓 게 뭘 할 수 있어. 따지고 또 따졌다. 스르르 힘이 빠지고 분노가 슬픔과의 경주에서 밀리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에밋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결국 마리아는 에밋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 바보는 너야. 하나도 괜찮지 않잖아, 이 바보야. ”



*



미칠 것 같았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기억은 예상 외로 냉정하게 돌아왔다. 가차없이 돌아왔다. 로위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돌아왔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제기랄, 하고 욕지거리가 솟구쳤다. 이성이란 것이 단단해지고 물렁해지고를 반복했다.


기계장치를 조작하는 올시는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그리로 좋은 걸까. 고통에 절어가는 로위를 보는 것이? 마치 남에 고통을 즐기는 가학주의자처럼? 소름이 돋았다. 올시가 누군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쾌락에 집중하는 여자. 남들의 고통을 자양분처럼 빨아먹는 여자. 고통의 흡혈귀라 불리던 여자.


“ 이제야 좀 정신이 드나? ”


온몸이 축 늘어진 로위가 깨어났다. 마침내 모든 기억을 뇌라는 캡슐에 담아서. 돌아와봤자 소용없는 기억까지 모조리. 끔찍해서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봐 잊었던 기억일 것이 분명한 광경들.


“ 우리 인연이 참 질기지.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아. 모든 것은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의 눈알이 자초한 일이야. 네 과거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야. ”


올시는 그때를 생각하면 이가 잘근잘근 씹힌다. 이제 20년도 더 됀 일인데도. 참으로 질긴 원한이다.


“ 노인네 성깔 여전하네. 그러다 빨리 늙어요. ”


리노는 표정관리하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곤 한다. 선생에게 까부는 초등학생처럼. 사실 나이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올시는 확실히 노인네였지만 그건 리노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이었으므로. 오직 로위만이 세월을 뛰어넘어 압도적인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겉모습이 야수인 건 빼고. 그 영원한 젊음이 결코 고맙지 않았다.


“ 늙는 건 어쩔 수 없지. 다만, 예쁘게 늙는 거야. 그치, 로위? ”


올시는 동의를 구하는 의미로 윙크를 해보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상큼해지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음에 대한 집념은 상당했다.


하지만 올시는 그곳까지 닿진 못했다. 실험을 견디지 못하는 약한 정신력 탓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는 그녀는 다른 이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 아직 힘이 잘 안들어오지? 약을 주입한지 얼마 안 돼서 그래. 우리가 너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어. 첫째는 소중한 너의 기억, 그리고 둘째는 막대한 힘. 기뻐하라고. 곧 엄청난 힘을 주체할 수 없을 테니. ”


정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이 마비가 된 것처럼.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생각만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의 권리였다. 그것도 20년이란 세월 동안 소실되었던 악몽 같은 기억과의 전투만이.


가만히 의자에 묶여서 그 잔인한 기억의 현장들을 쭉 훑어봤다. 로위는 자신의 진짜 가족을 생각해냈다. 아들인 배런과 사랑하는 아내 유나. 왜 그걸 여태 몰랐을까. 더 깊은 기억으로 들어갔다. 마치 다시 살아보는 것처럼 뜨문뜨문 기억이 끊기기는 했지만 순차적으로 기억을 재생시켰다.


배런에게 공놀이를 해주었던 기억, 가족소풍을 갔던 기억, 집을 보수공사했던 기억, 둘째를 임신했던 기억. 둘째의 태명을 곰곰히 생각했다. 데이였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하루를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아빠의 손가락을 있는 힘껏 잡았다는 기억은 없었다.


그런 기억은 훗날 마리아가 대체했다. 데이. 내 아들 데이. 행복했던 로위의 세상은 어느 분기점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기억이 그를 덮치듯 쏟아져내렸다.



*



로위는 거친 숨을 내뿜었다. 높은 산지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이 신기했다. 저만치에 아버지가 보였다. 자신보다 두 배는 늙은 아버지였지만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로위는 아내를 살폈다. 아내는 배가 불러있었다.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해도 굳이 따라가겠다고 우기는 아내였다. 로위는 아내의 뱃속에 있을 아이도, 아직 어린 아들인 배런도 걱정이었다. 배런은 씩씩하게 고개를 넘었다. 빈민촌의 첫인상은 아무 느낌도 없었다.


훗날 생각해보건데 로위는 가족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며칠 묵을 숙소를 정하고, 식량을 챙겼다. 다른 누구보다 아내와 배런, 그리고 데이가 편안하기를 바랐다. 어떤 불편도 없길 바랐다.


아버지는 빈민촌에 온 뒤로 표정이 밝아지셨다. 우리들은 한동안 눈코 뜰 세 없이 바빴다. 이곳은 무법천지였고 병의 본산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넘쳐났고, 약탈이 빈번했으며 부랑자들이 넘쳐났다.


거리는 지저분했고, 건물 안엔 병균들이 득실거렸다. 아버지는 이곳의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대체로 순수했다. 더러운 거리에 적응해 난폭해진 아이들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아버지는 그 아이들을 위해 이곳으로 오기라도 한듯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랬다. 아버지는 세상을 치유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있는 사내였다. 수도에서 제일 가는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꿈은 달랐다.


“ 수도에서 치료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


어릴적 로위를 무릎에 앉히고 집에서도 의사가운을 벗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자주 해준 말이다. 아버지는 병원을 탈출하고 싶어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아버지는 실제로 그랬다. 말로만 떠들지 않았다.


행동으로 옮기는 사내였다.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건 이루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어린 로위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랐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서기 시작한 건 열 일곱 무렵이었다. 유나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유나는 그런 그를 존중해주었다. 늘 그는 유나를 두고 떠났지만 이젠 달랐다. 아내가 되고 아이의 엄마가 된 유나는 그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다며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따라왔다. 그는 그런 그녀가 고마웠다. 아버지는 빈민촌의 아이들을 진료하는 일을 했다. 그는 아직 풋내기 의대생이었으므로 거드는 일만 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이곳에 거주하며 아이들의 건강을 돌봤다.


아버지가 온 뒤로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기침이 일상이던 아이는 기침을 멈추었고, 피골이 상접하던 아이는 부쩍 살이 붙어 갈비뼈가 사라져있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아이들의 부모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부모들도 아버지에게 진찰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진료는 빈민촌 전역으로 번졌다. 아버지는 쉬지 않고 그들을 돌봤다. 날마다 주사를 놨고 약을 처방하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밖에서 돌아오더니 급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


아버지가 그렇게 다급하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불안해보였고 겁에 질린 것도 같았다. 옷가지를 집는 손이 연신 헛돌았다. 그의 입에서 연신 욕지거리가 나왔다. 자신의 손이 말을 안 듣는 것이 화가 난 듯했다.


인자한 의사였던 아버지가 그렇게 흐트러진 건 처음이었다. 로위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했고, 무슨 일이냐며 따져물으려 했으나 아내는 아버지가 허투루 말할 사람이 아니라며 뜻에 군말없이 따르자고 했다.


아내는 처음 빈민촌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임산부로선 최악의 조건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로위는 아버지의 무리한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후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그날의 기분을 느낄 세도 없이 그의 집이 불탔다. 안에서는 잿빛 살점의 아내와 아들이 발견되었다. 그날, 로위의 기분은 슬픔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준을 넘어서있었다. 절망도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져버렸다. 불행은 휘몰아치는 폭풍이다. 화염이 내뿜는 저주를 바라보던 그는 예고도 없이 붙잡혀 이곳으로 왔다. 그저 꿈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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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화 - 컴 백 홈 - 21.02.01 20 1 20쪽
14 14화 - 잘 가 - 21.01.29 20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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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화 - 세상에게 물리다 - 21.01.27 2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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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화 - 모두의 마을이니까 - +1 21.01.16 26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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