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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lanche
작품등록일 :
2021.01.03 23:30
최근연재일 :
2023.05.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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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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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1. 조우 - Closed

DUMMY

동인은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봤다. 군데군데 몰타르가 떡진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손에 묶인 수갑을 풀고, 자신의 옷과 여분의 옷을 받은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앞에서 흐느끼며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던 베를란의 모습이 유독 머리속을 스쳤다.


낯선 장소와 낯선 세계에서 가진 익숙한 느낌이었다.


“기디언씨?”


문이 벌컥 열리고 델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살짝 들어 문쪽을 확인한 동인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델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어딘가에서 황급히 뛰어들어온 듯 보였다.


“델핀 수사관님?”


“현장검증 끝났어요. 그것도 굉장히 잘요.”


델핀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동인은 마음이 놓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기디언씨 덕분이죠...”


델핀은 천천히 방으로 걸어들어와 책상에 털썩 걸터 앉았다.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며칠 전 동인을 처음 체포했을 때 굳어있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방은 어때요?”


“아... 음...”


동인은 방 안을 살짝 둘러봤다. 유럽의 오래된 집들에서 볼법한 풍경은 낯설기도 했다.


“감방이나 취조실보다는 훨씬 낫죠. 여기 이렇게 침대도 있구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델핀은 팔짱을 살짝 끼고는 바닥을 툭툭 차기 시작했다.


“뭐... 그렇죠. 파발들이 쉬어가는 방이라 많이 누추하긴 하지만... 베를란 그새끼가 썩을 감옥보다는 훨씬 나은건 맞겠죠.”


“그러고보니... 그놈은 어떻게 됐나요?”


동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백이 끝난 이후 끌려간 베를란의 소식이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흠... 어디부터 이야기 할지도 고민되네요...”


델핀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현장검증을 처음부터 쭉 따라갔는데 볼만했거든요.”


“볼만했다는건...”


“진짜 피해자들이 자기 눈앞에 있는거처럼 분노하면서 칼을 쥐더라구요. 막 찌르고 나서는 갑자기 눈물을 퍽 터트리고 말이죠. 정신이 나간 놈 같았다니깐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보았던 모습들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 해도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래도 어느 경로를 통해서 침입했고, 어떻게 증거를 인멸했고... 또 누구를 먼저 죽였는지도 싹 다 재현을 하더라구요. 어떻게 탈출했는지 까지요.”


“모든걸 자백한거네요.”


“그렇죠.”


델핀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동인과 했던 현장검증때 늘어져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다행인 듯 미소를 짓는 동인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말이죠, 기디언씨. 하나는 좀 물어봐야할거 같아요.”


“음... 어떤걸 말이죠?”


편하게 몸을 기대고 있던 동인은 관심이 있는 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대화들 말이에요, 기디언씨. 그 범인놈이랑 나눴던 그 가족 이야기라든가... 그 모든것들요.”


델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


동인은 공감한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의 머리속을 스치는 기억속에는, 범죄자들과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냐는 형사의 투덜거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인거도 이해가 안되거니와... 증거를 들이밀어도 아무리 인정을 안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하셨던거에요?”


델핀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녀와 캔터가 여덟번을 신문했을때도 나오지 않던 자백은, 동인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갑작스레 터져나왔었다.


“흠...”


눈썹을 으쓱거린 동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속이 복잡한 듯 얼굴을 찡그리는 델핀에게 설명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제가 동기가 없는 범죄에 대해 이야기한거 기억나세요?”


“나죠. 그때도 지금처럼 머리 꽤나 아프게 하셨거든요.”


“수사관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전혀 본 적이 없으실겁니다. 전... 상대적으로 많구요.”


동인은 양반다리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만 같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어릴적부터 쌓여온 분노가 마음속에 있어요. 그리고 어릴적부터 사회와 법칙에 관련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수 없는 환경에 있던 사람은, 어른이 되었을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한다고 표현해야겠네요.”


“그럼 그 분노는...”


“베를란의 말을 들어보니... 그 분노는 자신을 방치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판단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쪽에 분노를 가졌고, 그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들거나 비슷한 역할을 하는 세상의 존재로 옮겨갔던거죠. 그리고 그 방치당했던 상황에서 자신이 원했던 모든것을 스스로 얻었던게 충동 조절 능력의 부재로 나타났을거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서 반사회적인 면모까지 합해진거죠.”


동인의 알수없는 말에 델핀은 그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인의 얼굴을 보던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동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가 말하는 내용은 사람의 마음속 이야기가 반이니까요. 확 와닿는 내용이 아닐수 있어요. 쉽게 이야기 하면 부모의 방치가 괴물을 만들어낸거에요. 자신을 무시하는 것같은 부모와 닮은 사람을 공격하는... 그런 괴물요.”


“허... 그런 괴물이 눈물을 흘리다니...”


델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괴물이라고 눈물 흘리지 말라는 법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동인의 사족에 델핀은 더욱 알수 없다는듯 얼굴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거기서 눈물을 흘린걸까요.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감정이라도 들었던걸까요? 아니면...”


델핀은 멍하니 취조실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녀의 머리속에 스치는 첫 모습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소리를 내던 베를란이었다.


“억울했던걸까요...”


델핀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이 되어야한다는 동인의 말처럼 그들이 되어보려고 해도 쉽사리 되지 않앗다.


“억울이라...”


동인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취조실에서 있던 대화를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왜 죽였습니까?”


베를란의 마음을 부순 한마디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던 베를란은 눈물이 멎은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년들 잘못이에요. 난 잘못 없어요.”


울먹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일그러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를 무시했으니까. 그래서 뒤진거에요. 난 잘못 없어요. 없다구요. 그냥 들어줬으면 되는건데 무시했어요. 그게 내 잘못이에요?”


베를란의 말을 듣고 있던 델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겨움이 올라오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토를 할 것처럼 속이 거북해졌다.


동인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베를란은 봇물처럼 터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말인 즉슨... 피해자들이 베를란씨에게 무언가를 했었던 것처럼 들리네요.”


“세상 썅년들은 다 우리 에미년이랑 똑같아요. 마음 열어줄 것처럼 하면서 결국은 단물 뱉고 버리는 그런 것들이잖아요. 걸레들이잖아요. 아닙니까?”


“베를란씨.”


“산장에 있던 년도. 그 여관에 있던 그 갈보년도. 다. 다 똑같아요. 알아요?”


베를란은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다. 애써 억누르던 감정들이 터져나온 순간, 그는 손마저 덜덜 떨며 화를 내고 있었다.


“베를란씨가 느끼기엔 어떤게 똑같았습니까?”


“그냥 그 끈을 그냥 줬으면. 그 년 안죽었어요. 우리집 갈보년처럼 똑같이 개무시하니까. 그래서 난 가르쳐준거에요.”


“흠... 그 끈이 왜 가지고 싶으셨던거죠?”


이미 흘러나오는 증언과 감정의 홍수를 조절하려는 듯, 동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보들보들 해보였으니까요. 그리고 가슴에 달린거라서 향기도 좋을거 같았으니까요. 한번은 엄마가 대충 벗어놓은 코르셋을 훔친적이 있어요. 냄새 맡아보니까 너무 독한데 향긋하더라구요. 그럴줄 알았어요. 근데. 그 썅년이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베를란씨는 아까 무슨 수를 써서든 원하는걸 얻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미행했어요. 어떻게든 그년한테서 가져오려고. 그리고 제가 비번일때 집으로 찾아갔어요.”


“그리고는 어떤 일이 있었죠?”


“집으로 찾아갔어요. 찾아가서, 그 끈 달라고 했었어요. 그 년은 미친놈이라면서 절 밀어냈죠. 그래서 문 열고 들어가서...”


베를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끝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개같은 년이 벌을 받아야하는거니까. 막 이렇게 찔렀어요 막. 배를 이렇게 찌르고 목도 찔렀어요. 손이 되게 따듯해졌고... 저는 계속 칼을 이렇게 잡고 배를 후볐죠. 그러니까 나중엔 바닥에 널부러져서, 죽었더라구요.”


베를란은 자신이 칼을 쥐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허공을 찔러대며 말했다.


“꼭 죽여야만 했습니까?”


“그러게 왜 화를 나게 만들어요. 왜 그 년들은 우리 에미처럼 그렇게 날 무시하고 혐오한건데요? 그거 하나 달라고 하는 그게 큰 잘못이에요? 그거 가지고 싶은 그게. 그게!”


버럭 화를 내는 베를란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소리가 들리곤, 테이블 위에 있던 컵이 엎어져 바닥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분노를 터트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동인을 본 베를란은 숨을 씩씩대며 동인을 또다시 째려보기 시작했다. 냉철했던 그의 눈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울분에 찬 벌건 눈이 동인을 반기고 있었다.


“세번째 피해자... 산장에 계신 그분하고는 어떤 대화를 나누셨었습니까?”


“하하... 그년... 하.”


실소를 터트린 베를란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인부들 빵 심부름 갔다가 봤는데 이래저래 막 챙겨준거 아세요? 어짜피 남편도 없는 년이었다면서요? 얼굴도 예쁜년인데... 그래서 같이 살면 안되겠냐고 했는데, 자기는 결심한게 있다면서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다 챙겨주면서 그거까지 안주는건 뭐냐고 물었더니 제가 미친놈이라고 했죠.”


“그래서 라피나씨도 찾아가셨나요?”


“갔죠. 갔어요. 가니까 딸도 있는데 진짜 예쁘더라구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도...”


“마지막 기회를 줬는데 안들은건 그년이에요. 그 딸년도 마찬가지고. 애 몸 만져보려는데 자꾸 발버둥을 치는거에요. 발로 차고 그랬어요. 그래서 찌르고 나서 옷을 걷었는데, 그때 그 개새끼가 온거에요.”


동인은 문득 생각이 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다른때랑 다르게 딸은 완전히 죽이지 못한거 같았는데요.”


“그때...”


베를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못마땅한 듯 이빨을 뿌득 갈아댔다.


“그 이상한 털보새끼만 안찾아왔으면... 내가 그렇게 도망갈 일도 없었을거고 그 발자국도 안찍혔겠죠. 그 애 몸까지 만져봤을건데.


뜸을 들이던 베를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운이 없었던 거일 뿐이에요. 하필 그때 거기서 그렇게...”


“흠...”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 여관년 죽였고, 빵집년 죽였고. 네. 근데 살레이씨는 정말 제가 아닙니다.”


동인은 턱을 어루만졌다. 베를란의 증언에서 무언가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최소한 펠리스씨와 라피나씨는 죽이셨다는건데... 그렇게 칼로 수도없이 많은 공격을 했다면, 몸에 피가 엄청 묻었을건데요.”


“...”


“그리고 바닥으로 피도 상당히 많이 떨어졌을거고, 흩뿌려졌을겁니다.”


베를란은 점점 기어들어가는 듯 했다. 그의 몸은 점점 움츠려졌다.


“제 기억에는 살레이씨도 상당히 많은 공격을 당하셨었습니다. 그정도로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면, 특히나 여기있는 목부분까지 공격을 당했으면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는 아주 작은 방울로 바뀌어 곳곳에 묻어나죠. 그게 설령...”


동인은 천천히 베를란쪽으로 몸을 가까이 숙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동인의 모습을 본 베를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작은 나무 틈이라고 해도 말이죠. 치웠다고 생각하지만 곳곳에 이미 스며든거죠."


베를란의 아랫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점점 조여오는 동인의 한마디 한마디에 숨이 막히는지 숨을 참았다.


“당시 범인은 피해자들을 찌른 후 황급히 현장을 떠났습니다. 살레이씨 뿐만 아니라 펠리스씨도, 라피나씨도 모두요. 발자국이 제대로 남지 않게 신발을 리넨 천으로 감쌌지만, 그 천으로 감싼 발자국 자체가 남을거까지는 생각을 못했겠죠. 쉽게 말하면... 흔적을 완전히 지울줄 아는 범인은 아니라는겁니다.”


동인은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사관님. 살레이씨 집은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델핀은 예상도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주님도 모든 현장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죠. 모든게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모든게 남아있겠네요, 그 안에는.”


동인은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그는 무엇인가 확신이 차 있는 듯 보였다.


“그렇죠.”


델핀의 답을 들은 동인은 다시 베를란을 쳐다봤다. 베를란은 아무말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들으신 것처럼 모든 것이 남아 있습니다. 현장이 남아있다는 건, 범인의 흔적 모두 남아있는 것이지요. 베를란씨, 그렇다면...”


베를란은 또다시 침을 삼켰다. 그는 또다시 동인과 델핀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기 시작했다.


“방문자의 흔적도 남아있을겁니다.”


“... 네?”


베를란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두 사람만 번갈아 바라볼 뿐,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진실은 반드시 나올겁니다. 베를란씨. 뒤늦게 발견된 진실이 어떻게 닥쳐올지는 그 어떤 누구도 모릅니다. 그 전에...”


동인은 델핀이 가져온 끈을 다시 베를란의 앞으로 밀어줬다.


“털어낼건 털어내야죠.”


그의 말이 끝나자, 델핀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차와 3차 피해자에게서 이렇게 증거를 발견한 상황이라 살레이씨 집도 다시 대대적인 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기디언씨 말대로 진실은 반드시 발견 될겁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베를란은 말없이 끈을 집어들고 만지작거렸다. 베를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책상 밑으로 머리를 파묻고는 꼼지락대기만 했다.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펴며 머뭇대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풀이 죽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뱉는 베를란의 한마디는 공허했다. 그는 모든것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힘없이 말을 건넸다.


“흠... 그것도 베를란씨에게 달린거 아니겠습니까.”


동인은 또다시 팔짱을 끼웠다. 흔들리고 있는 베를란의 마음을 더욱 열고 싶었다.


“어짜피 저잣거리에서 목잘려서 죽을건데... 뭔 상관입니까.”


베를란은 투덜대듯 말했다. 그는 눈을 살포시 감고는 미간을 움찔거렸다.


“지금은 그 생각 하지 말고, 이 대화에 집중합시다.”


동인은 또다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숨어드려는 베를란을 잡아야만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말을 하고 말고는 베를란씨 선택이죠. 다만... 지금처럼 계속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거나 회피하는 반응을 택하다가 살레이씨 집에서 증거가 나왔을때... 그때는 어떡하실겁니까?”


동인의 말이 끝나자, 베를란의 눈이 휘둥그레 커져 동인을 바라봤다.


“살레이씨를 죽인건 내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증거가 나왔을때 누가 그 말을 믿어줄까요?”


“...”


“그러면 자연스레 앞에 했던 모든 말들, 앞으로 할 모든 말들이 부정당할겁니다.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거짓말쟁이라고 할거구요. 베를란씨가 무슨 말을 하든 또다시 무시당하지 않을까 싶군요.”


베를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을 들썩거리지도 않았고, 다리를 떨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동인의 말을 듣고 또 들을 뿐, 아무런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털건 털자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한번 곰곰히 생각해주십쇼. 무언가가 있다면 차라리 말하는게 베를란씨에게 더 이득일겁니다.”


동인의 말은 베를란의 마음을 깨부순 듯, 베를란은 손에 쥐고 있던 끈을 내려뒀다. 뜸을 들이고 머뭇대던 그는 깍지를 끼곤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뒀다.


“... 여기 온지 얼마 안됐을땝니다. 살레이씨가 저를 집으로 부르더군요. 그래서 갔더니 밥을 줘서 밥을 먹었습니다. 거기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이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살레이씨가 죽어있었습니다. 저는 손에 칼을 들고 있었구요.”


“그게 말이...”


델핀이 어이가 없어 또다시 윽박을 지르려는 찰나, 동인은 그녀의 허벅지를 꽉 잡아 말을 멈추게 했다.


“그렇습니까. 어떤 대화였는지 기억 나시나요?”


“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되서요. 화가 났던것만 기억합니다.”


“흠...”


곰곰히 생각하던 동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제 죽은 그 가족들도...”


“그 가족은 좀 다릅니다. 그 살레이인지 뭔지랑은 달라요.”


“그럼 어떤거 때문이었습니까?”


동인의 질문에 베를란은 시선을 피했다. 그는 쉬이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으려 했지만, 머뭇대다 투덜대며 이야기했다.


“그 털북숭이 남정네때문에 내가 그 산장에서 일을 다 못끝냈잖아요. 그래서 전에 봐뒀던데 간거에요. 일 마치고 이 도시 떠버릴라고.”


베를란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는 체념한 듯 눈을 마주치지 않고,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그렇군요.”


“전... 어떻게 되는겁니까 진짜?”


베를란은 한숨을 푹 내쉬고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델핀의 눈치를 살피려 고개를 돌린 동인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델핀은 말없이 끄덕였다.


“우선은 재판관님이 오시기 이전에... 당신과 수사를 계속 진행할 것입니다.”


그녀는 차분한 톤으로 말했다. 냉랭함이 없는 건조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은 살아계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협조적으로 나오셨을때는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구요. 그렇죠, 수사관님?”


“아... 음...”


동인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자, 델핀은 눈썹을 으쓱댔다.


“네 뭐... 그건 가봐야 알겠지만 독이 되지는 않을거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베를란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나지막히 욕을 내뱉었다.


“씨발...”










델핀은 고개를 저었다.


“억울함의 눈물이라기엔 너무... 감정이 없어 보였어요.”


“억울함은 맞을겁니다. 자기가 운이 없어서 잡혔고, 잘못한건 그 피해자들인데 자기가 잡혀서 벌을 받는다는 억울함일지도요.”


“으...”


질색하는 델핀은 몸을 떨었다. 멀쩡히 숨쉬는, 혐오스러운 괴물을 눈앞에서 본 느낌이 자꾸 떠오르는지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떻게 그런 괴물들이...”


투덜대는 그녀의 모습을 본 동인은 씁쓸하게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보아왔던 많은 모습들이 머리속에 스쳐지나갔다.


“아 참... 저는 어떻게 되나요?”


동인은 문득 자신이 잡혔던 때가 생각나 물었다. 자신의 거취가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임이 떠오른 그는 델핀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아. 그거 관련해서는 곧 대장님이 오실거에요.”


델핀은 팔짱을 낀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는 알수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인명부 관련 회신이 오늘 왔거든요. 황성이든 어디든 다 결과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외계인 아저씨.”


“아저씨 아닌데...”


“암튼 없대요.”


델핀이 말을 자르자, 동인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함이 흐르려는 찰나, 굳게 닫혔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문 틈으로 금발의 남성의 머리가 빼꼼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동인의 멱살을 잡고 윽박을 지르던 남성이었다.


그가 보이자, 델핀은 황급히 자세를 다시 잡고 경례를 했다.


“대장ㄴ...”


“쉬어.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서류 하나를 허리춤에 끼고 들어온 캔터는 의자를 슥 뽑아서는 털썩 걸터 앉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동인 마저도 침대 턱으로 옮겨 왔다.


“흠... 우선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캔터는 다리를 꼬고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동인의 모습이 낯설고 탐탁지 않아 보였다.


“델핀 백부장에게 이야기를 들으셨겠죠?”


“아... 음... 네. 들었습니다.”


동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캔터는 흡족한듯 턱을 만지작대고는 품에 끼고 있던 서류을 끄집어 냈다.


“그 신문 덕분에 그 놈이 자백을 하게 됐고... 이 도시를 헤집던 미친놈 하나가 잡히게 됐군요. 이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대표로써 감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넨 캔터는 가슴팍에 꽂혀있던 깃펜을 꺼내고, 주머니에 있던 잉크통을 빼내어 탁자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거취에 대해서는... 우선 주변 도시든 황성이든 당신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법전을 뒤져보고, 무연고자나 미등록자에 대한 처리 방안도 이렇게.”


그는 자신이 가져온 종이를 흔들었다. 서류 위에는 줄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었다. 동인이 경찰서에서 쓰던 사건 개요서나 여타 서류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져왔습니다.”


캔터는 잉크통의 뚜껑을 열며 말했다. 그는 냉랭해보였고, 그의 말끝에는 사무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나왔다.


“당신을 완전히 믿거나 뭐... 그런건 아닙니다만, 우선 당신이 어딘가에 적을 두고 있어야 활동하기 편하실겁니다. 진짜 저쪽 세상 사람이든... 아니면 이 세계 어딘가에 숨어있던 알수없는 현자든 뭐든요.”


동인은 불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방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캔터의 말을 무시한다는 선택지 자체는 진작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너무나 작았다. 캔터가 가진 대장이라는 직함이 이미 한번 그를 억누르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우선 경비대 기지를 거주지로 해서 당신을 파이안 시 시민으로 등록을 우선 시킬 생각입니다. 그건 괜찮으시겠죠?”


캔터는 확인을 요하는 듯 눈을 꿈뻑였다. 그의 시선은 동인쪽을 향해있었고, 동인은 선택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흠... 혹시 뭐... 마음에 두신 이름이라도 있으십니까? 등록하는김에 같이 등록하겠습니다.”


캔터는 종이의 이곳저곳을 적어간 후, 가장 상단에 펜을 멈췄다. 이름을 적는 칸에서 손이 멈춘 그는 동인에게 확인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인의 시선에 델핀과 캔터가 들어왔다. 뾰족 나온 귀와 금발, 그리고 그들이 입은 가죽 갑옷은 동인이 살던 세계에서 익히 보던 광경이 아니었다. 고개를 내린 그는 입고있는 옷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낯선 옷과 낯선 복식, 그리고 낯선 침대 모든 것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살아남아야한다는 생각, 받아들여야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속에 가득찼다.


입술을 굳게 문 그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디언. 기디언이라고 불러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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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Case 3. 욕망의 고리 - Closed 23.05.29 12 0 13쪽
37 Case 3. 욕망의 고리 - 11 23.05.25 8 1 20쪽
36 Case 3. 욕망의 고리 - 10 23.05.22 9 0 16쪽
35 Case 3. 욕망의 고리 - 9 23.05.18 9 0 13쪽
34 Case 3. 욕망의 고리 - 8 23.05.15 11 0 14쪽
33 Case 3. 욕망의 고리 - 7 23.05.11 11 0 13쪽
32 Case 3. 욕망의 고리 - 6 +1 23.05.08 15 1 14쪽
31 Case 3. 욕망의 고리 - 5 23.05.04 16 0 18쪽
30 Case 3. 욕망의 고리 - 4 23.05.01 13 0 20쪽
29 Case 3. 욕망의 고리 - 3 23.04.27 16 0 16쪽
28 Case 3. 욕망의 고리 - 2 23.04.24 15 0 22쪽
27 Case 3. 욕망의 고리 - 1 23.04.20 18 0 13쪽
26 Case 2. 악의 맨 얼굴 - Closed 23.04.17 19 0 20쪽
25 Case 2. 악의 맨 얼굴 - 12 23.04.13 17 0 26쪽
24 Case 2. 악의 맨 얼굴 - 11 23.04.10 21 0 21쪽
23 Case 2. 악의 맨 얼굴 - 10 23.04.06 23 0 25쪽
22 Case 2. 악의 맨 얼굴 - 9 23.04.03 19 0 22쪽
21 Case 2. 악의 맨 얼굴 - 8 23.03.30 21 0 24쪽
20 Case 2. 악의 맨 얼굴 - 7 23.03.27 20 0 19쪽
19 Case 2. 악의 맨 얼굴 - 6 23.03.23 21 0 22쪽
18 Case 2. 악의 맨 얼굴 - 5 23.03.20 20 0 18쪽
17 Case 2. 악의 맨 얼굴 - 4 23.03.16 21 0 23쪽
16 Case 2. 악의 맨 얼굴 - 3 23.03.13 23 0 21쪽
15 Case 2. 악의 맨 얼굴 - 2 23.03.09 25 0 21쪽
14 Case 2. 악의 맨 얼굴 - 1 23.03.06 25 0 19쪽
» Case 1. 조우 - Closed 23.03.02 34 0 23쪽
12 Case 1. 조우 - 11 23.02.27 30 0 25쪽
11 Case 1. 조우 - 10 23.02.23 32 0 23쪽
10 Case 1. 조우 - 9 23.02.20 30 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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