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개의 용의 발톱
무월 마을에도 달이 드리웠다. 아무리 밝은 달빛이라도 산 그림자에 가려 무월마을은 암흑 뿐이었다.
대장장이 석철은 화로의 불을 다독여놓고 방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 화마에서 살아남은 사내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를 안아드는 석철의 매무새가 어설펐지만 정이 어려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문득 몇 해 전 만삭의 몸으로 원인모를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아내 사월이 떠올랐다.
“헉헉... 여보, 아이 한번 안겨주지 못하고 이리 떠나게 되다니. 흑흑.. 나는 미련이 없으나 뱃속에서 세상 빛 한번 보지 못한 아이만큼은 구천을 떠돌지 않게 제대로 제를 지내주시오. 윽...”
뚝뚝한 석철에게 유일하게 웃음을 주던 곰살 맞은 아내였다.
사월은 열에 시달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렇게 석철의 품안에서 숨을 거뒀다.
한때 석철은 한양에 병기를 제조하던 군기시에서도 손에 꼽히던 야장이었다.
그의 손에 닿았다 하면 어떤 무쇠도 엿가락처럼 녹아내렸고, 그가 만든 검은 어떤 검도 부러뜨리지 못했다.
무관들은 앞 다투어 석철을 찾아와 무기를 청했다.
왜놈들이 쓰던 장총의 비법을 밝혀낸 이도 그였다.
하지만 그런 석철도 사월의 죽음 앞에서 무력했다.
병이 옮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관아에선 아내의 상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게 했다.
“천한 것이 천한 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제 명이 거기까지 인 것을, 혹여 병이 옮아 귀한 목숨들을 잃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당장 불에 태워라.”
“나으리, 아무리 천하다 하여도 나에겐 둘도 없는 배필이었소. 어찌 이리 무심히 보내라고 하시오.”
하지만 그들의 귀엔 석철의 울부짖음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내의 사체를 빼앗기고 불에 탄 뼛조각조차 안아보지 못했다.
“으아아악, 너희가 사람이냐. 아무리 천민이라 해도 너희와 다를 바 없는 목숨이다. 들숨 날숨에 어디 위아래가 있더냐. 사월아... 끄으으흑흑..”
“이런 무엄한 것을 보았나. 천한 재주를 귀히 여겨 대우를 해주었더니 주제를 모르고 제 명을 스스로 재촉하는구나. 안되겠다. 이놈을 가두고 태형에 처해라.”
결국 석철을 매타작을 당하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군기시에서도 상명하복의 죄를 물어 쫓겨났다.
고향에 내려온 석철은 몇 날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불현듯 일어나 화로에 불을 피웠다.
메질을 하는 이마 위로 쏟아지는 땀방울에 눈물이 섞여 내렸다.
몇 번의 담금질 끝에 완성된 것은 강철로 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미의 모습을 한 작은 동상이었다.
그제야 석철은 울음을 삼키며 제를 올렸다.
“사월아.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내 아이야. 너희를 지키지 못한 것은 모두 이 아비의 잘못이다. 천하디 천한 몸으로 태어나 너희를 이렇게 보냈구나. 절대 이 아비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렇게 석철은 삼일밤낮을 꺼억대며 울어대다 모자상을 뒷산에 묻고는 돌아섰다.
그 후로 이 집엔 쇠를 내리치는 메질 소리가 나지 않을 때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칭얼대던 아이를 어르다 석철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 너는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 이토록 모진 운명이라니..’
어느새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석철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에 표정이라곤 하나 없던 석철의 얼굴에도 순간 미소가 어렸다. 석철의 품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온기에 뜨거운 불 앞에서도 녹을 줄 몰랐던 석철의 시린 마음도 덥혀지는 듯 했다.
아이를 재우다 석철 역시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찬란한 빛이 퍼졌다. 뜨겁기도 차갑기도 한 빛이었다.
그 알 수 없는 빛에 석철은 불현듯 눈을 떴다. 눈앞에 한 단아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뉘... 뉘시오?”
“저는 연호라 하옵니다. 긴 말을 드릴 여유는 없습니다. 아이의 아호는 아정, 이름은 대룡입니다. 부디..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흑흑.. 그리고 이것을 아이의 몸에 지니게 하여주시오.”
그 여인은 아홉 개의 작은 뼈로 이루어진 장신구를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이오?”
“용의 조갑(발톱)입니다. 이것이 아이를 보하여줄 것입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여인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석철을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할 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어찌 이런 꿈이 있을 수 있는가 싶어 어리둥절하다가 자리끼에 손을 뻗는데 아이의 머리맡에 조갑 장신구가 놓여있었다.
‘아니, 꿈이 아니란 말인가.. 아홉 개의 조갑이라니... 임금도 오조룡의 호위를 받는데 아홉 개의 조갑이라면 구조룡의 호위인 셈.. 도대체 이 아이는 정체가 무엇이더냐..’
석철은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이의 목에 구룡조갑을 걸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 품에 온 아이다. 네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내 아들로 키울 것이야. 너만큼은 쉽게 보내지 않으마. 넌 오늘부터 대룡, 장대룡이다.’
아이는 석철의 손길에 뒤척이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어느새 달은 산에 가리어져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마을은 깊고도 깊은 어둠에 잠겼다.
*****
한편, 천궁을 찾은 비천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분위기에 괜히 역정이 났다.
‘지금 청룡이 몰살되고, 여의주가 적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리 태평하다니 도대체가...’
그때 대제를 모시는 팔상천녀가 다가와 비천을 불렀다.
“비천대주께 아뢰오. 대제께서 천궁 대정루로 들라 이르십니다.”
비천은 대답 없이 냉랭하게 돌아서 천궁으로 향했다.
비천의 귀골이 서린 몸놀림에 뒤를 따르는 팔상천녀는 금세 눈길을 빼앗겼다.
‘어찌 저리 여인보다도 곱고, 어떤 귀공자보다도 귀한 품새를 지니셨을까.. 이 달짝지근한 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대자 팔상천녀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추스르고 비천을 따랐다.
대제는 눈을 감고 대정루에 앉아있다 비천의 기척이 느껴지자 가만히 눈을 떴다.
대제의 개안에 주변이 환해졌다.
“들었느냐, 비천.”
“봉황신파 수장 비천, 대제를 뵈옵니다.”
잠시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대제는 비천에게 시선을 돌려 한참을 바라보더니 입을 떼었다.
“내 잠시 방심한 사이 귀한 이들을 잃었다.”
하지만 대제의 말에 비천은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대제였다.
‘그가 움직였다면 청루도, 청룡신파도 그리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에 다다르자 비천의 표정 없던 얼굴에 분노가 서리고 자신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졌다.
“청루가 대제께 그리 가벼운 존재였습니까. 천상계에게 난을 일으킨 지하계 수신 공공을 잡아 봉인한 이입니다. 대제가 그 공을 누구보다 기뻐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그리 황망히 보내셨습니까.”
비천의 날 선 목소리에 대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뭣이? 가볍다? 어째 네가 모르는 것 같으니 친히 다시 말해주마. 내겐 그게 너이든, 청루이든 한낱 미물인 인간이든 어떤 명이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하십니다. 대제..”
통탄에 잠긴 비천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매서운 비난의 눈빛이 대제를 향해 꽂혔다.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대제는 그런 비천의 소리없는 힐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비천! 감히 네가!!”
대제의 외침과 함께 벽력이 내리쳤지만 비천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냉랭한 기운에 천궁이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한동안 말이 없이 서로를 지켜보다 대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전하구나. 비천... 내가 어찌 너를 당하겠느냐.. 알았으니 이리 오너라.”
대제는 바닥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멎자 비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 너에게만 나눌 밀담이 있다. 좀 더 가까이 오거라.”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다가서자 대제가 말했다.
“아무래도 백일기도에 들어가야겠다.”
대제의 말에 비천은 다급해졌다.
“대제가 자리를 비우시면 그동안 천상계는 어떻게 하옵니까. 혹여 일이라도 터지면...”
“목소리를 낮춰라, 비천. 이곳에도 듣는 귀가 있다. 여의주를 잃어 천계를 받치는 사주대방의 기운이 기울고 있다. 하늘의 균형이 깨지기라도 하면 더 큰 재난이 닥칠 것이야. 그 전에 막아야 한다.”
비천은 원망에 가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어찌 이런 일이... ”
비천의 원망에 대제는 미간을 찡그리다 더욱 낮게 속삭였다.
“내 비록 말을 그렇게 하였지만 누구보다 청루를 아꼈던 것 잘 알지 않느냐. 다행히 청룡의 기운이 남아있다.”
“아니, 그렇다면... 아정이 살아있다는 말씀입니까?”
“아직 기가 약해 확실히 느껴지지 않지만 청룡의 기를 모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가야 한다.”
그러더니 품안에서 천상언월도를 꺼내 비천에게 건네주었다.
서늘한 달빛처럼 날이 빛나는 언월도를 보자 비천이 황급히 머리를 들었다.
“아니, 이건... 천상언월도 아닙니까?”
대제가 비천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내가 천궁을 비운 사이, 언월도를 지켜야 한다. 내 믿을 사람이 너뿐이구나.”
“대제시여, 언월도와 월석이 합체하면 어찌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모두를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위험이 가중될 뿐입니다.”
대제는 껄껄 웃으며 비천을 허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그걸 가장 잘 아는 너이니 그 어떤 이보다 잘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너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지.”
비천은 대제의 대책 없음에 골치가 아파왔다.
언월도와 월석이 합체해 월문언월도가 되면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비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 천하태평이라니 비천은 대제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자신을 안으려는 대제에게 역정이 나 밀쳐냈지만 대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비천의 허리를 더욱 꽉 안았다.
“내 백일기도에 들어가면 한동안 아무도 취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비천, 오늘 너를 안아야겠다. 너는 여인이더냐, 아니면 공자더냐. 내가 누구를 품어야 하느냐.”
대제가 비천의 목에 얼굴을 대고 숨을 들이키자 환각향이 퍼지며 눈앞에 모든 것이 어른거렸다.
그러자 비천의 모습이 농염하고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가 신비로운 용모를 지닌 귀공자로 보이기도 했다하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런 대제를 가소로운 듯이 바라보던 비천은 나긋이 말했다.
“대제시여,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 비천은 존이 원하는 대로 보일 것입니다.”
대제는 비천의 진홍빛 허리끈을 풀어냈다.
“내 오늘은 아름다운 여인을 안고 싶구나. 그리하여도 되겠느냐.”
비천은 고개를 돌려 대제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 넣으며 말했다.
“명이 그러하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대제는 비천에게 얼굴을 묻자 환각향이 더욱 진해지며 몽롱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더 이상 대제에게서는 신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여인에게 취한 사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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