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부담감 폭발
날씨가 점점 후덥지근해지고 있었지만 그늘은 시원했다. 그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절로 몸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우리 누나가 너네 형하고 많이 친했던거 같던데."
눈을 감고 있다보니 문득 해성이의 형이 생각났다. 해성이가 조그맣게 음 소리를 내곤 말했다.
"형에게 가끔 듣긴 했었다. 채아 선배에 대해서."
"오, 그래?"
"자세하게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느끼기로는 형은 채아 선배를 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오......"
보고싶다라는 건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 지 미묘하다. 해성이는 그저 자기가 느낀 걸 표현한 거겠지. 하지만 보고싶다라는 건 평범하게 할머니가 손주들을 보고싶어 하는 그런 건 아닐 것 같다. 그것이 피 안 섞인 남자와 여자 사이라면 말이다.
"아주 똑똑하고 잘 따라주는 좋은 후배라고 했지. 게다가 채아 선배가 무사를 지원하게 되면서 더 친밀해 졌다고 들었다."
"그렇구나... 누나는 애초에 무사 체질이라고 생각하긴 했어."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게 일이었던 게 누나의 하루 일과였으니까 말이지. 그런 짓은 체력이 버텨주지 않으면 못 한다.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였다. 하지만 채아 선배를 보면 느끼는게 있다."
"뭔데?"
"채아 선배는 형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해성이도 형 얘기가 가끔 나올 때마다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는 얘긴가. 해성이의 말이 이어졌다.
"굳이 얘기를 더 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다. 형 얘기를 하면 서진 선배나 소윤 선배가 채아 선배의 눈치를 보는게 느껴졌으니까 말이지."
"그, 그랬어?"
해성이는 주변에 신경 안쓰고 명상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도 세심하게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구나. 나도 주변에 신경 좀 쓰고 살아야겠다. 나는 해성이를 잠깐 바라봤다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좋아, 이제 방해하지 않을게. 명상 하자."
"그래."
그늘 밑으로 시원한 바람이 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잠도 오는 것 같고 아주 기분 좋은 점심 시간이다.
* * *
방과 후 학습이 끝난 하교 길.
이젠 꽤 낮이 길어져서 날이 여전히 밝았다. 그 길을 유나와 함께 걷고 있다보면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하게 된다.
"주호 선생님이 새로운 부적술을 알려 줬다니까?"
"아, 점심 시간에 수린이하고 갔다온 거?"
"응. 아무래도 지난 번처럼 네 영력이 모자라는 경우가 생기면 안되니까."
유나의 말에 볼을 긁적였다. 내 영력이 모자라다는 건 신수를 소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타개하려면 영력 자체를 많이 모을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 했다.
"명상이 답 아냐?"
팔을 뒤로 넘겨 깍지를 끼며 말했다. 유나는 나보다 한걸음 앞으로 나와 내 앞에 섰다. 유나는 손가락을 하나 펴보이며 말했다.
"아니, 한 가지 더 있어."
걷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서면 부딪친다고. 나는 멈춰서며 말했다.
"뭔데?"
"'전영부' 라는 거야."
"전영부?"
유나는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걷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걸었다.
"영력을 전달 해 주는 부적이야. 붓으로 바로 그려서 사용할 순 없고 부적을 따로 준비해야 해."
"호오, 신기하네."
"그렇지? 선생님한테 문양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말이 끊기자 유나를 바라봤다. 유나는 축 처져 있었다.
"엄청 어려웠어. 하여튼, 이 부적을 영력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붙여 두고 부적 위로 손을 대면 본인의 영력을 전달할 수 있대."
"흥미롭네, 영력 전달을 해주는 부적이라..."
츠쿠모가미 사건 이후 영력이 부족했던 내 상황을 기억해뒀다가 대책을 찾아 온 모양이다.
영력이 부족할 때 급하게 나눠 쓰는 용도로 나쁘지 않아보이지만, 넘겨주는 사람의 영력도 충분해야 할 것이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문제가 있다면,
"그런데 위급한 상황에서 그렇게 부적 붙이고 여유롭게 영력 전달 할 시간이 있을까?"
내 질문에 유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곰곰히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나온 답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니.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인상을 찌푸린 유나가 말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을 걸?"
당장 영력을 늘릴 순 없으니 단기적인 대책으로는 괜찮으려나. 게다가 크게 위급하지는 않은 상황이라면 유나 말대로 꽤 도움이 될 순 있을 거다. 게다가 불꽃 도깨비를 부르면 금방 영력이 바닥나는 나와 달리 유나는 여유로운 편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알아보느라 고생했어."
"그렇지?"
그제서야 유나는 미소를 띠었다. 유나의 기분을 맞춰 줄 때는 칭찬이 직빵이지.
"그리고 하나 더 있어."
"뭔데?"
유나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뭐길래.
"보호부 말고도 너희들을 지킬 수단이 하나 쯤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오호?"
"귀신 덩굴을 불러내는 부적술을 배워 왔지."
"덩굴...?"
"나중에 보면 알아."
유나는 흥얼거리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뭐야, 그게.
* * *
해가 일찍 뜨기 시작하니 내 눈도 가끔은 저절로 일찍 떠진다. 시계를 보니 등교 시간까진 여유가 있는 것 같은데.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학교에 가 볼까?
생각을 마치자마자 씻으러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와 1층으로 내려가니 밖으로 나가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웬 일이야?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그냥 눈이 빨리 떠 졌어."
"그래, 아빠가 식탁 위에 샌드위치 만들어 둔 거 먹어. 엄마 나간다."
"응."
엄마는 말을 마치곤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 차 깜빡이가 켜져 있는거 봐선 아빠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아빠는 어떻게 매일 아침 일찍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거지? 난 아침에 일어나기도 바쁜데.
엄마를 태운 차가 떠나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찬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한 뒤 아빠가 만든 샌드위치를 한 개 집어 먹고 현관 문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등굣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매일 걷는 거리지만 계절이 바뀌면서 풍경도 조금씩 변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 와중에 한복을 입은 내 모습에 힐끗 눈길을 주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랜만에 일찍 나왔으니 천천히 산책 좀 하다가 갈까?
주변을 둘러보니 한창 이사 중인 집이 보였다. 이삿짐 차량에서 물건을 열심히 나르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어깨를 두들기며 지시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허이구, 어깨야... 아저씨, 그 물건은 나중에 빼 줘요."
아주머니가 이사하는 집의 주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옆에 뭔가가 있는데?
"이놈의 어깨는 언제쯤 나아지려나... 조심해요, 그거 유리 화병 박스니까."
아주머니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머니의 어깨에 잡귀 하나가 매달려서 히히덕거리는게 눈에 보였다. 저 녀석이 매달린 곳을 아주머니가 주먹으로 콩콩 칠 때마다 아주머니의 손이 녀석을 통과했다. 어쩐다.
담임은 분명 일반인들에게 도구를 사용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게 어디까지나 선한 목적으로 쓰는거라면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
좋아.
아주머니의 뒤 쪽으로 천천히 접근하면서 가방에 있는 부채를 꺼내들었다. 최근 츠쿠모가미 사건을 통해 나도 부쩍 성장한 것 같았다. 저런 잡귀 따위는 영력을 불어넣은 부채로 툭툭 쳐 주기만 해도 성불 시킬 수 있지.
아주머니와 한 걸음 정도 떨어져서 모른 척 아주머니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잡귀는 부채에 있는 퇴마의 기운을 느끼곤 발버둥치다가 펑 하고 사라졌다.
"뭐 하는 거니?"
아주머니가 이상함을 느낀듯 뒤를 돌아봤다. 나는 부채를 쫙 펼치곤 부채질을 했다.
"아, 더워서 부채질 하다... 죄송합니다."
나는 재빨리 아주머니에게서 멀어졌다. 뒤로 아주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동네로 이사오는 거라면 한복을 입은 애는 처음 보는 걸지도 모르지.
"어라? 어깨가 좀 편하네?"
고개를 까닥이며 어깨를 주물거리는 아주머니의 혼잣말이 들렸다. 나름, 좋은 일을 하니 뿌듯하군.
* * *
천천히 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학교에 굉장히 일찍 등교해 버렸다.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앞에 계신 분은, 진아 선생님이잖아?
본관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다 만난 선생님은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인사하셨다.
"안녕, 동하가 이렇게 일찍 등교하는 줄은 몰랐는데?"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만 일찍 온 거예요."
"그렇구나, 요즘은 잘 지내니?"
"아주 잘 지내요."
진아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보니 예전에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던게 기억 난다.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그, 선생님이 예전에 한 번 찾아오라고 하셨던 게 이제 기억이 나네요..."
"이런, 정말 빨리 기억해 내는구나."
선생님이 살짝 눈을 흘기며 웃으셨다.
"죄송해요..."
"죄송할 것 까지야. 모처럼 시간도 꽤 남았으니 저기 벤치에 좀 앉았다가 갈까?"
"네!"
나는 선생님이 말한 벤치에 앉았다. 선생님도 옆에 앉으셨다.
"그래, 무슨 얘기를 해 볼까."
이 참에 궁금한걸 막 던지자.
"음, 삼사학 교과서에서는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궁금한 게 있어요. 특히 사신수사와 사흉수사들의 대결도 한 줄로 끝나버리고 왜 사무라이와 닌자들이 음양사, 주술사들과 함께 했는지도요."
진아 선생님은 인자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교과서에는 우리나라 위주로만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럴 거란다. 으음, 어디보자. 사흉수사는 시험에도 나왔으니 알고 있겠지?"
"그럼요."
사흉수사. 우리나라에 사신수가 있다면 일본에는 사흉수라 불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흉수를 다루는 음양사를 사흉수사라고 했지. 하지만 설명은 그것 뿐이었다.
"지금 교과서에 안 실려 있는 이유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란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건 전투 이후 사상자에 대한 것 뿐이지."
"그렇군요..."
전투니까 사상자가 나오는 건 당연한 얘기일지도...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 답해줄게, 왜 우리가 삼사라고 불리는 지 알고 있지?"
"신수사, 부적사, 무사를 합쳐서 삼사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러면 일본의 음양사, 주술사가 우리나라의 신수사, 부적사와 대응된다면 닌자와 사무라이는 어떤 역할일까?"
"...아."
그렇구나. 사무라이, 닌자는 무사 역할이구나.
"이해가 됐니?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가문 별로 인원이 배출 되지. 음양사 가문이라든지 주술사 가문이라든지 말이야. 그리고 그 가문들을 지원할 사무라이와 닌자 가문도 있단다."
언뜻 담임이 '야마모토 가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게 일본의 가문들 중 하나인 걸까. 게다가 백골 무장이 나를 목표라고 한 것도 다시금 상기하게 됐다. 그 백골 무장은 음양사 가문을 지원하던 사무라이였던 거다. 역시 일반적인 사무라이는 아니었어.
"그렇군요... 뭔가 재밌는 걸 알아버린 것 같아요."
"더 말하면 질려 할 것 같은 표정인데?"
"헤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론은 재미 없긴 하지. 그 이후로도 진아 선생님과 학교생활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나눴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자 학생들이 등교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럼 '예비' 사신수사님. 슬슬 자리로 들어갈까요?"
"으... 그런 말씀은 부담스러워요."
진아 선생님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동하는 훌륭한 사신수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선생님은 그렇게 내게 손을 흔들고는 벤치에서 멀어지셨다. 사신수사라니, 말만 들어도 부담감 백 배야.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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