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화. 오이소박이
"다 왔네."
우리는 미용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리를 돌아 본 미용사는 어느 쪽이 머리 하는 거냐고 물었다. 유나가 후드를 벗자 미용사가 감탄사를 내뱉더니 호들갑을 떨며 유나를 의자에 앉혔다.
대기 의자에 앉아서 유나의 머리카락이 다듬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싱숭생숭했다. 입학하고 제일 먼저 사귄 친구였는데 처음 이후로는 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있어서 이렇게 둘이서만 어디에 온 건 손에 꼽는 것 같았다.
조경용 가위에 마구잡이로 잘려버린 유나의 머리카락을 미용사가 길이를 맞추고 숱가위로 다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휴대폰이 울렸다. 누나가 웬 일로 전화를 한 거지?
"응."
[야, 너 어디야?]
"지금 유나랑 미용실에 왔어."
[미용실? 저녁은?]
"먹고 갈게."
[너네 뭐냐? 여튼... 알았음.]
짧은 통화였지만 도중에 유나 앞에 있는 거울을 봤다가 유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금방 피해버린 것 같지만.
아무래도 미용사가 내 쪽을 눈짓하면서 뭔가 말하는 것 같아서 날 본 거였나 싶다. 무슨 얘기를 하는거지, 들어 볼까.
"뒤에 남친이야?"
"그냥 친구예요."
"그래? 이렇게 미용실 같이 와 주는 남자애는 보기 드문데~"
둘이 대화하는걸 듣고 있자니 한마디 해주고 싶어도 못하겠네. 괜히 끼어들지 말자.
"머릿결도 좋은데, 어쩌다 이렇게 됐어? 혹시 누가 괴롭혔어? 저 애는 아니지?"
"아, 아니에요, 그... 실수를 좀 해서..."
"어머, 무슨 실수를 하면 이렇게 돼?"
유나는 굉장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가능한 대화를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미용사는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심심하신가 보다. 귀신들린 가위가 그런 거라고 할 순 없지만 괴롭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한데...
하지만 변명은 유나에게 맡기고 휴대폰이나 보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커트를 마친 유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머리가 꽤 짧아져 동글동글해진 실루엣에 목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오, 뭐야. 생각보다 잘 어울리잖아?"
"괜찮아? 단발은 처음이라 어색하네."
"어, 뭔가 엄청 달라 보이긴 한다."
내 말에 유나는 자신의 뒷머리를 몇번 손으로 만져보곤 말했다.
"제일 많이 잘린 머리에 맞췄더니 이 정도는 잘라야 한대... 내일 애들이 막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 가벼워서 좋긴 한데 그래도 다시 기를래... 으, 근데 배 고프다..."
유나의 말이 끊임없이 나오기 전에 끼어들자.
"그럼, 저녁 먹고 갈래?"
"그래, 엄마한테 전화 좀 할게."
휴대폰을 누르는 유나와 함께 미용실 밖으로 나오니 꽤 어두워진 상태였다.
생각보다 활동복이 편한 것 같은데, 앞으로 하교할 때 활동복으로 갈까? 일일히 검사하는 것 같진 않으니까 말이야.
이제 뭘 먹을지 고민 좀 해야 겠다.
"떡볶이 먹자!"
유나의 말에 메뉴는 정해졌다. 우리 돈도 많은데, 겨우 떡볶이로 되는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연스럽게 유나가 가는 방향을 따라 걷게 됐다. 이 근처에 자주 가는 분식집이라도 있나보다.
우리는 그렇게 떡볶이 세트를 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그간 쌓였던 이야기가 많았는지 쉬지 않고 얘기하는 걸 경청해 주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 먹었어? 이제 가야겠다, 시간이 꽤 늦었어."
"응, 기다려 봐, 내가 이걸로 계산하고 올게."
유나가 아저씨에게 받은 돈으로 음식값을 계산하고 남은 돈을 나눠 내게 건넸다.
"이번 달은 좀 펑펑 써도 되겠는데?"
"그치?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야하나~"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근처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전에 유나가 반지를 끼고 있던 게 떠올랐다. 흘끗 유나의 손을 보니 여전히 그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반지는 뭐야?"
내가 묻자 유나는 내 시선을 따라가 자신의 손에 있던 반지를 보더니 말했다.
"아, 이거? 수린이가 선물로 줬어."
해맑게 대답하는 유나의 표정에 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거였어?"
"응, 왜?"
"아니, 반지가 신기하게 생겨서 그냥."
"예쁘지?"
유나는 오른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줬다. 그런데 왜 헷갈리게 약지에다가 반지를 껴 둔거야. 착각할 뻔 했잖아.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 사슴 뿔 나온거 멋지다."
"그치? 그치? 앗, 버스 온다!"
유나의 말에 차도로 시선을 돌리자 우리가 기다리던 버스가 보여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같은 버스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먼저 버스에서 내려 들어갈 때 휴대폰을 보니, '빗자루 모임'방에서 유나가 다른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기분이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뒤에는 누나하고 한동안 얘기를 해야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적당히 대답해 줬더니 뭐 이렇게 속 좁은 놈이 있냐는 투로 쏘아붙이고 나를 놓아 줬다.
* * *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좋아, 가자.
중간에 유나를 만나 함께 교실에 들어가자 반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헐, 저거 유나야?"
"뭐야, 뭐야? 유나 머리 잘랐어?"
"남친이랑 헤어졌어?"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헤어져!"
여자 애들이 유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다가오는 통에 나는 슬쩍 빠져 내 자리로 갔다. 남자 애들도 유나의 파격적인 모습에 놀란 시선을 던졌다.
해성이는 언제나처럼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성이는 자리에 앉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들어온 걸 보니 이제 화해 한 건가?"
해성이의 말에 나는 무심코 반 아이들에 둘러싸여있는 유나를 바라봤다가 대답했다.
"응."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겠군."
해성이가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반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다보니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애초에 다른 애들은 나와 유나가 화해했다는 건 아무 관심 없고 유나의 헤어스타일이 바뀐 것에 대해서만 궁금한 것 같았다.
"그게, 어제 귀신들린 가위가 나타나서 공격하는 바람에... 아, 나 가방 좀 내려놓고!"
"귀신들린 가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 진짜."
가람이가 유나의 이야기를 듣고 중얼거렸다. 아마 조금 있으면 빗자루 모임에 있는 다른 반 친구들에게도 이야기가 전달 되겠지.
유나가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내려 놓자 반 아이들도 앞에 모여 들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턱을 괸 채 관전했다. 해성이도 팔짱을 끼고 유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유나는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나와 있었던 일이나 정원사 아저씨에게 돈을 받은 얘기는 쏙 빼고 말하긴 했지만.
좀 있으니 유나의 바뀐 헤어스타일을 구경하러 온 다른 반 애들도 보였다. 뭐냐, 슈퍼스타야? 한 명씩 유나에게 잘 어울린다든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냐라든가 한 마디씩 하고 갔다.
나는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든 어디가 다쳐 오든 딱히 신경 쓰는 사람이라곤 내 주변인 몇 명 밖에 없었는데. 반면에 유나는 헤어스타일만 바뀌어도 소문이 날 정도라니, 도대체 뭐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알아도 모르고 싶다.
* * *
"당연한 거 아냐? 유나는 성격도 좋고 예쁘잖아, 넌?"
점심 시간, 급식실. 내 맞은 편 옆에 앉은 수린이가 말했다. 내가 아까 아침에 느낀 것에 대해 얘기했더니 나온 말이다.
"난... 난..."
가슴에 비수가 꽂힌 기분이다.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얘기를 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직구를 날릴 줄은!
"크큭, 저 녀석 알고보면 놀리기 참 좋은 놈이야."
성호가 한 칸 건너에서 나를 보며 말했다. 맞은편의 소연이가 키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나와 유나가 화해하니 점심 멤버들이 다시 합쳐진 것 같은데. 지금도 당장 내 앞 자리에는 유나가 앉아 있었다.
유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해성이와 대화를 하며 웃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제 밥을 먹어보도록 할까.
"이제 중간고사 대비도 슬슬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번처럼 모여서 공부하면 되지 않겠나."
앞에서 유나와 해성이가 대화하는 소리였다. 그러고보니 곧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대체, 이놈의 시험은 언제쯤 안 보게 될 지.
오늘의 메뉴는 부대찌개와 계란말이, 오이소박이, 연근 조림에 후식은 요거트였다. 요거트는 심심하면 나오네.
그런데, 오이소박이?
"......"
난 오이가 싫다. 고로 오이소박이도 싫다. 오이소박이를 어떻게 처리하지, 그렇다고 잔반 남기는 건 싫은데.
젓가락으로 오이소박이 하나를 들어 올려 입에 넣을 지 말 지 고민하다가 다시 내려놨다. 역시, 못 먹겠어.
그 순간 눈 앞에 젓가락이 보였다. 유나가 젓가락으로 내 오이소박이를 가져가서 자신의 식판으로 가져갔다.
"너 오이 안 먹잖아, 편식쟁이야."
유나가 그렇게 말하며 내 식판의 오이소박이를 모두 가져가 버리자 수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네 건 네가 먹어야지. 뭐하는 거야? 한 두번도 아니고. 그리고 유나도 자꾸 그렇게 덥썩 가져가면 어떻게 해."
수린이한테 엄마 같은 잔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유나는 내 것이었던 오이소박이를 먹으며 말했다.
"난 오이소박이 좋아한단 말이야, 남기면 아깝잖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수린이는 한 숨을 쉬더니 다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수린이는 뭐가 문제라는 거야? 완전 윈윈인데.
어쨌든 오이소박이가 사라졌으니 기분 좋게 식사를 할 수 있겠어.
해성이가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수린이 말은, 아무래도 네가 들었다 놓은 반찬을 가져간게 문제라고 하는 것 같다."
"그게 왜?"
"어차피 못 알아 들어, 말 해주지 마."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린이의 말에 해성이는 싱겁다는 듯이 반찬을 입에 넣었다. 유나는 먹던 오이소박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두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음, 생각해보자. ...아, 그래... 그거지...? 간접 키스라고 놀리고 싶은 거지?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덮으며 젓가락질을 다시 시작했다.
"아니, 이해 했어. 근데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리고 저번에는 해성이랑 수린이도 같은 그릇에 있는 떡볶이 다 먹었잖아. 우린 벌써 다 섞였다고. 이제 혈액형 물어 볼 거야?"
구구절절하지만 내 변명을 들어 줘, 친구들아.
"지저분하게 진짜."
수린이의 말에 해성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언젠가부터 해성이가 참 잘 웃는 것 같다. 처음에는 늘 무뚝뚝한 표정이었는데 이젠 웃는 얼굴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그래도 너네 그러는 거 보니까 내가 다 감동적이야. 진짜 다시는 싸우지 말아주라. 싸운 건 둘인데 왜 내가 더 조마조마했는지, 으휴."
가람이가 내 쪽을 보고 불쌍한 척을 하며 말했다. 정말 얘네들 요즘 보면 하나 같이 연기하는 게 천만배우 클래스인 것 같다. 하긴 오늘은 오랜만에 다같이 모여서 북적북적해지긴 했지.
식사가 끝난 뒤에는 후식 타임이었다. 평소처럼 요거트 뚜껑을 핥아 먹던 유나가 수린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권도강 선배가 요즘은 귀찮게 안 해?"
수린이네 십인대 3학년 중에 권도강 선배가 있다는건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수린이나 성호가 별로 얘기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크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귀찮게' 라는 건 지금 처음 듣는 것 같다. 최근 유나와 서먹해져서 채팅방이 나뉘어졌을 때 일인가 보다.
수린이가 요거트 뚜껑에 붙은 것들을 숟가락으로 쓸어서 요거트통 안에 담았다. 뚜껑이 깨끗해지지는 않았지만, 뚜껑을 그냥 버리는 걸 보고 무슨 소릴 듣기라도 한 걸까. 놀라운 변화다.
"2학기 시작하곤 좀 없어졌어. 맨날 실력 타령하더니 요즘은 흠 잡을 게 없나 봐."
"그렇구나. 십인대전 연습은 잘 돼 가고 있나보네?"
수린이가 스푼으로 요거트를 떠 먹고 말했다.
"비밀이야. 십인대전에서 너희들은 경쟁자니까."
"윽, 너무해!"
수린이 말을 듣고보니 그렇네. 우린 이제 경쟁자가 되는구나.
점심 멤버들은 다양한 삼인대로 구성되어 있고 당연하게도 각각 다른 십인대에 속해 있었다. 나와 해성, 유나가 한조였고 수린, 성호, 소연이가 한조였다. 가람이와 다래는 같은 조긴 한데 민준이가 전학을 가 버려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지금은 같이 점심을 먹는 사이라곤 해도 십인대전에서 만나면 서로 승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거잖아. 생각해 보면 꽤 잔인한 거 아냐? 이기거나 졌다고 사이가 틀어지거나 하진 않겠지?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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