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화. 은밀한 연습
"나도 일찍 나왔는데, 먼저 와 있네."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듯 움찔한 유나가 뒤돌아봤다.
"응, 어쩌다보니..."
항상 한복 아니면 활동복을 입은 모습이었던 탓에 사복을 입은 유나는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모자를 푹 눌러 쓴 것이 들키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굳이 감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숨기려고 하는 걸까.
그래도 가까이서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유나의 얼굴까지 감출 순 없었다. 어? 오늘은 뭔가 좀 다른데.
"입술 색이 바뀐 거 같은데?"
"어, 어떻게 알았어?"
"맨날 보니까 모를래도 모를 수가 없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나.
유나와 가볍게 대화하며 버스를 타고 번화가로 나갔다.
"아~ 뭐 먹을까~"
번화가에 도착하자마자 유나는 뭘 먹을 지 고민했다. 출출할 시간이긴 하네.
"그래! 거기로 가자, 파스타 집 하나 있는데."
유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익숙한거 이거 설마.
도착해보니 전에 와 봤던 곳이었다. 서아와 솔잎이랑 왔었지.
자연스럽게 키오스크 앞에 가서 주문을 했다.
"여기는 세트 메뉴도 괜찮아."
"응, 그렇더라."
나는 유나의 말에 대답하며 키오스크 화면에서 세트 메뉴를 두드렸다.
"여기 와 본 적 있어?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유나가 지긋이 쳐다 보고 있었다. 왜, 나는 여기 오면 안되냐!
"전에 한 번 와 봤어. 동생하고 걔 친구랑."
"그렇구나."
유나도 세트 메뉴를 쿡쿡 눌렀다. 디스플레이 부서지겠다! 살살 누르지...
"그래도 여기 인기 많나 봐? 사람 많네."
주문이 끝나서 번호표 종이를 들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주변을 보니 확실히 내 또래나 그보다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다. 가격이 저렴하니 학생들의 무난한 점심 가게로는 딱인 것 같다.
"응. 그럼 점심 먹고 바로 전에 갔던 노래방에... 헉."
유나가 멍하니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하다 갑자기 말을 끊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뭔데?
고개를 돌려서 확인해보려고 하니 유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도 고개 돌려!"
뭘 봤는데 그렇게 당황한거야?
나는 오히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 가게 안을 다시 살폈다.
"...오?"
나도 철혁 선배와 여은 선배를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내가 고개를 숙인 채로 유나한테 말하자 유나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두 사람이 주말에 따로 볼 정도로 친했어?"
"모른대도!"
난감하네. 저 두 사람한테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특히, 여은 선배한테 걸리면 어떻게 될 지 정말 모르겠어.
"빨리 먹고 나가서 '하얀 민들레'라도 가자."
"거긴 또 왜?"
"너 모자라도 씌우려고 그런다!"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보이겠다.
"됐어~ 어차피 주말인데 놀러 나왔으려니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선배들이랑 마주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는데 말이야. 노래 연습하는 것만 안 보이면 되잖아.
"어휴, 신경 쓰는 나만 바보지! 나도 몰라!"
유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모자를 푹 눌러썼던 것을 조금 위로 젖혔다.
주문 번호가 나오는 전광판을 보니 어느샌가 우리 음식이 나온 상태였다.
"가지고 올게."
그렇게 유나를 두고 홀로 음식을 가지러 갔다. 하필이면 가는 길목에 선배들 옆을 스쳐 지나가야 하네.
"벌써 1년이 넘었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여은 선배의 목소리였다. 평소의 나른한 말투가 아니라 굉장히 진지해 보였다. 윽, 듣고 싶다.
"시끄러, 그런 말 하려고 불러냈냐?"
"억지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젠 좀 웃긴다니까. 정신 좀 차려. 그런다고 채아 선배가 너한테 신경 쓸 줄 알아?"
"하..."
철혁 선배도 굉장히 날 서 있는 목소리 같다. 그래도 싸우는 것 까지는 아닌데... 누나 이름이 왜 나오는거지? 으... 궁금해.
하지만 음식 빨리 가져 가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음식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음식을 들고 돌아오자 유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져오나 안 가져오나 감시 중인거야?"
"아니, 그냥 보고 있었는데?"
"아~ 그러셔."
음식이 담긴 쟁반을 유나 앞에 내려두며 앉았다. 저번에 먹어봤던 파스타 대신 이번엔 크림 파스타를 시켜봤다. 유나는 알리오 올리오였는데 기름만 바른 것 같은 저 파스타가 맛있나?
"원래 크림 파스타 좋아했어?"
"음, 아니. 그냥 궁금해서 먹어 보려고."
"의외로 도전 정신이 있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포크를 집어들었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가게를 나올 무렵엔 이미 선배들은 자리에 없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 같다.
나란히 길을 걷다보니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느껴본 적 없는 그런 시선들이었다. 유나와 다닐 때는 다른건 몰라도 이런 시선들이 생소해서 신경쓰인다.
유나는 중학교 때도 유명했다고 하고 지금도 이런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네. 나하고는 좀 다른 세상 사람인 건 확실해.
"아, 지난 번 그 코노로 갈까?"
유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지난 번이라고 해도 꽤 오래 전 일인 것 같은데.
"그래, 가자."
아저씨 귀신이 나왔던 코인 노래방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코인 노래방의 입구가 보였고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이끌리듯이 '아저씨를 성불 시켰던' 방으로 향했다. 구석진 곳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지도 않을테고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이 줄겠지.
"좋아, 오늘이 마지막 연습날이야!"
의자에 털썩 앉으며 자연스럽게 노래 번호를 입력하는 유나였다. 하도 같은 노래만 불러대서 이젠 번호를 외워버린 것이다.
"하아, 내 목."
목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유나가 마이크를 내게 하나 건네고 있었다.
"칭얼대긴."
괜히 투정을 부리려다 진지한 표정의 유나를 보니 잠자코 노래나 해야겠다.
한창 열창중인 유나를 보고 있자면 대단하다는 느낌 외엔 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혼자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일 수도 있을 실력이었다.
음, 굳이 듀엣곡을 신청해서 왜 나까지 귀찮게 하냐는 거다.
"뭐 해!"
유나의 다그침에 내가 불러야 할 타이밍을 놓친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몇 시간 째냐. 유나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어휴."
유나는 노래를 취소하곤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내가 목을 잡고 일부러 콜록거리자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됐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가까이 오는 유나였다.
"우리 연습 많이 했는데 나가서 뭐 좀 마실래?"
드디어 이 노래 연습에서 해방 될 수 있겠구나.
나는 고개를 매우 빠르게 끄덕였다.
"고개 끄덕이는거 봐."
유나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긴 한 것 같지만 난 이제 더 이상 부를 힘도 없어.
그렇게 소지품을 정리하고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축 처진 나를 끌고 나간 유나는 곧 근처의 카페로 나를 밀었다.
노래를 하도 불러서 칼칼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차가운 음료를 시켰다. 그렇게 각자의 메뉴를 들고 내부를 둘러보니 테이블은 꽉 차 있고 창가에 일자 형태로 있는 바 자리만 비어 있었다.
나란히 앉다 보니 도서실에서 같이 앉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각자 의자에 앉아 있어 유나와의 간격이 멀었지만 그 당시 허벅지에 느껴졌던 부드러운 감촉이 생각나자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사실대로 말 해 주기엔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누나하고 투닥거리고 동생 머리를 헝클어 뜨리고 하면서 스킨십은 자주 했었던 거 같다. 그런데 요새 들어 유나하고는 사소하게 스친 것도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 거지.
이상한 기분에 눈 앞에 있던 음료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차가운 음료여서 순식간에 뜨거워 진 내 목구멍 안을 찬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오늘 너무 무리 했나...? 얼굴이 빨간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유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이마에 손이라도 대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순간 립밤을 바른 유나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재빠르게 시선을 튕겼다.
나는 괜찮다는 손짓으로 유나의 접근을 막았다.
"아냐, 감기도 아닌데. 축제까진 괜찮을 거야. 흠, 우리가 오전에 나간다고 했지?"
"응. 장기자랑 마지막 순서라고 했어."
"...아우, 그냥 처음에 나가서 끝내 버리면 좋을텐데. 마지막이면 끝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되잖아?"
"으응... 그건 그렇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구."
그렇게 축제에 대한 주제로 얘기를 시작하자 이상했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노래 연습이 끝나고 유나와 헤어진 다음 집에 오고나서부터는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기분을 없애려고 명상을 시작했는데 이번엔 '다른 종류의' 이상한 기분이 드는 탓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이상한 기분이란 '영력의 양과 질'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명상을 하다보니 부쩍 영력의 양이 늘어난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목걸이로 흡수되는 영력의 양 정도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기분은 '영력 투입'을 연습하고 나서부터였다. 영력을 내 몸의 이곳 저곳으로 보내려는 시도를 자주 하다보니 또렷하게 느껴지지만 형용할 수 없는 기분도 같이 들었다.
게다가 처음 명상할 때엔 영력의 양만 늘어나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내 눈으로 보이는 영력이 '진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십인대전 예선전에서 단 2합만에 단단하다는 수호석을 부숴버린 일도 있었고 말이야.
"...흠."
이상한 일이었다. 갑자기 한 없이 넓었던 수영장에 밑빠진 독처럼 영력을 채우고 있었다면 지금은 수면이 눈에 보일정도로 가득 찬 느낌의 수영장이었다.
단순히 '영력 투입' 연습을 했기 때문인 걸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울을 찾았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방울을 쥐고 흔들자 불꽃 도깨비가 나타났다.
불꽃 도깨비는 나를 한번 흘끗 보곤 주변을 둘러봤다. 별 다른 것이 없었는지 시선은 내게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 작은 녀석아. 영력 흡수할 시간이냐? 아니지, 얼마 전에 했잖아."
혼자서 중얼거리는 불꽃 도깨비한테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