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화. 수능
방과 후 학습 활동이 끝난 후 유나와 하교하는 길이었다.
"뭐야, 진짜 징그럽다."
'노출광 귀신'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간 듯 이미 교내에서 마도경이 옷을 벗고 난동을 부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학생들이 없었다. 게다가 유나는 내게 진실을 듣고 나자 이맛살을 모으며 마도경을 비난하기 바빴다.
"은설이도 불쌍하구... 하아... 너도 위험할 뻔 했구."
"음..."
"차라리 그냥 팬티까지 벗게 놔 두지 그랬어!"
유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마도경하고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고 했던 건 나보단 유나였던 거 같은데 본인이 당했을 땐 조용하더니 이럴 땐 더 나서려고 하잖아.
"그러게... 괜히 성불 시켰나봐. 그래도 그냥 놔뒀다가 그 모습을 본 다른 애들이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으휴, 착해. 너무 착해."
유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마도경은 당분간 두문불출하겠지. 이렇게까지 사고를 내고 이제껏 못 된 짓 하고 다니던 게 전부 까발려졌으니까 말이야. 속이 후련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어둑해진 거리를 유나와 대화 하며 걷기 시작했다.
* * *
"오빠, 사과 갖고 가."
저녁을 먹고 내 방으로 가려고 계단 앞에 섰는데 서아가 말했다. 보니까 토끼 모양으로 귀엽게 깎아둔 사과가 담긴 그릇을 내밀고 있었다.
"사과 네가 깎았어?"
"응, 아빠가 오늘은 나보고 깎아 보래서."
"잘 깎았네."
서아에게 그릇을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누나의 방문이 닫혀 있는걸 보니 공부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며칠 뒤면 수능이니 나름대로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 그릇을 내려두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시간 쯤이면 빗자루 모임 멤버들이 열심히 채팅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곤 휴대폰을 확인했다.
- 수린: 재밌네.
- 가람: 마도경이 그렇게 치사한 자식이었는지는 몰랐는데 진짜 동하만 바보 될뻔 했잖아?
- 성호: 비열한 자식@$!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마도경의 나체 소동이 주제인 것 같았다.
- 유나: 동하한테 얘기 듣다보니 애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 다래: 내가 보기엔 유나도 만만치 않은데
- 유나: 내가 뭘?
- 해성: (이모티콘)
- 유나: 그런 이모티콘은 또 언제샀어!
- 소연: 해성이도 인정하잖아
- 가람: 맞아 우리 수능날 영화라도 보러 갈래?
오, 수능날 영화라니 재밌겠다. 마침 지난번 아저씨가 줬던 돈도 아직 남았으니까 이 참에 써 버리자.
- 나: 좋아, 근데 오전에는 누나 응원하러 가야해서 아침 일찍은 안 돼
- 유나: 앗 나도 갈까?
- 나: 엥? 가족끼리 갈건데 오려고?
- 소연: 벌써부터 둘이 가족이 된거야?
- 유나: 뭔 소리야! 채아 선배는 내 1조장님이라구!
- 다래: ㅋㅋ
- 나: 차도 좁으니까 마음만 전달해줄게 ㅋㅋ
- 유나: 알았어~
- 가람: 그럼 조금 늦게 만나면 되겠네 10시쯤 어때? 이번에 개봉하는 액션 영화 있는데 재밌어보여 링크 보내줄게
- 성호: 액션! 조치!
- 다래: 나도 찬성~
- 수린: 그래 10시면 괜찮겠네.
수능날 아침 10시가 약속 시간으로 정해진 것 같다. 이후에 점심도 먹고 오후는 그 때 생각나는 걸 하기로 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뭘 해도 할게 없어서 고민하진 않겠지. 그나저나 이제 날씨가 밤엔 좀 쌀쌀하네. 슬슬 동복을 꺼내야겠어.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싸늘했다.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침대에 누웠다. 아직 명상하고 홈 트레이닝도 안했는데 누우니까 잠이 왔다. 으... 잘 순 없어.
* * *
수능 날이 밝아왔다. 아침 일찍 눈을 떠서 거실로 내려오니 누나는 벌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해?"
"도시락도 챙겨야 되고, 간단히 먹을 초콜릿 같은 것도 챙기고... 바빠."
누나가 챙기는게 어째 전부 간식인 것 같은데, 느낌 탓인가.
"동하도 얼른 씻고 나와라."
아빠가 앞치마를 두른 채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샌드위치가 아닌 것 같았다. 식탁을 흘끔 보니 시금치 된장국에 고등어 구이, 표고버섯 볶음, 연근 조림에 계란말이와 김치였다. 진수성찬이잖아. 벌써부터 침이 고이네. 수능이라고 조금 더 신경 쓰신건가.
씻고 나와서 식탁에 앉았다. 모두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저녁은 대체로 같이 먹는 편이지만 아침에는 각자 집을 나가는 시간대가 다 달랐다. 그래서 항상 샌드위치나 시리얼 같이 간단한 것만 집어먹고 가는 탓에 같이 모여서 먹기가 힘들었다.
"언니, 잠은 푹 잤어?"
"응, 아주 쌩쌩해. 이제 일부러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올 정도?"
"긴장감이 하나도 없네~."
서아와 누나의 대화를 들으며 연근 조림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맛있다. 아빠는 어디서 요리를 배웠을까. 엄마는 요리 하나도 못 하는 거 같은데.
"여보, 오늘은 채아 데려다 주고 들를 데가 있어."
"음, 전에 거기인가?"
엄마의 말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도 엄마와 아빠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냥 공무원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어떤 공무를 수행하는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오늘 약속 있니?"
엄마가 나와 서아를 보곤 말했다. 나와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말했다.
"채아 데려다 주고 집에 들를 시간이 없으니까 나갈 때 준비 다 해서 와라."
"네~"
"응. 번화가 근처에 내려 줘."
"그래."
그럼 어디 보자, 나도 크로스백을 챙겨둬야 겠네. 부채만 담아 가지 뭐.
"채아는 오늘 늦게 들어와?"
"친구들하고 같이 저녁 먹기로 했어."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알았어~"
엄마와 누나의 대화는 수능이라는 큰 시험을 앞둔 것 치곤 평범했다. 긴장할 것 없다는 뜻이겠지.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놓인 '수능 엿 상자'가 보였다. 유나가 어제 내게 쥐어 준 것이다. 누나한테 전해 달라고 하던데 포스트잇에 손수 쓴 응원 메시지도 적혀 있었다.
크로스백과 엿 상자를 들고 방문을 나섰다. 누나도 때마침 가방을 메고 방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아, 누나, 이거."
"오~ 웬일이야?"
"유나가 전해 달래."
"아, 뭘 이런 걸 다... 좀 이따 메시지라도 남겨 놔야겠네."
누나는 꽤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이미 두둑한 누나의 가방이 좀 더 두툼해진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쌌어?"
"배가 든든해야 시험도 잘 보는 것이다~ 우매한 동생아. 시험 보다가 배에서 꼬르륵 거려 봐."
"어이구..."
누나하고 티격태격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부모님과 서아는 이미 현관 밖으로 나선 듯 집안은 조용했다.
"시험 잘 봐."
"눈물나게 고맙네~"
누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곤 같이 현관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버틸만 했다.
눈 앞에 시동을 켠 채로 대기하고 있는 아빠의 차가 보였다. 조수석엔 엄마가 앉아 있었다.
뒷좌석엔 서아가 먼저 들어가 있는걸 보면 오늘도 어김없이 내가 가운데 쪼그려 탈 운명인 것 같다.
우리를 태운 차는 누나가 시험을 칠 고등학교 수험장 앞에서 멈췄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보니 바로 수험장으로 가진 않고 차 안에서 잠깐의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곧 시험 시간이 다 되어서 수험장으로 향하는 누나를 배웅했다. 누나는 가족들과 인사한 뒤엔 다른 친구들과 만나 인사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동하부터 데려다 줘 볼까."
아빠가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 * *
"고마워요."
"그래, 잘 놀다 들어와라."
나는 차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번화가 근처의 도로여서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뒷차가 크랙션을 두드릴 것이 뻔했기에 재빨리 움직였다.
멀어지는 아빠의 차를 보다가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도 9시도 되기 전이었다. 약속 시간인 10시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여기~"
주변을 둘러보자 유나가 기다리고 있던 듯 손을 흔들었다. 유나는 전날 수능 시험 시간과 내 동선을 계산해 보더니 조금 비어있는 시간이 있다고 따로 약속을 잡아 뒀었다.
"언제 왔어?"
"방금 전에 도착했지."
"시간 계산 딱딱 맞는거 봐. 아, 누나한테 상자는 전해줬어."
"응, 안 그래도 채아 선배한테 메시지 왔더라. 하트 엄청 많이 찍어서."
"누나가 하트 같은 걸 쓰는 사람이었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른 애들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았으니 시간을 때울 곳이 필요했다. 각자 음료를 한 잔씩 들고 전경이 보이는 바 자리에 앉았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용히 음료를 마셨다.
"시간 정말 빠르네."
"그러게."
유나의 말에 대답하며 음료를 한모금 마셨다. 달콤하고 따뜻한 라떼가 목을 넘어가자 몸에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수능 끝나면 또 기말고사 기간이지?"
"그렇지."
"시험 끝나면 또 시험... 시험... 으, 지겨워."
유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나도 비슷한 감정이야. 시험에 관해서는 말이지.
"나도."
"...어? 너 은근히 어깨가 좀 넓어진 것 같다?"
갑자기 유나가 날 쳐다 보면서 얘기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유나가 내 어깨로 손을 뻗고 있었다.
"올~ 딴딴한데."
"......"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음, 그냥 이대로 놔둘까 싶기도 하고...
"운동 열심히 하나봐?"
"요즘 좀...?"
어느새 유나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음료를 마셨다. 음... 유나는 방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자각을 못했나보다. 괜히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유나가 만졌던 부분을 쓰다듬었다.
유나와 대화를 하다보니 카페로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야, 너희들 먼저 데이트 하고 있었구나?"
"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니까!"
소연이였다. 유나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소연이에게 말했다.
"보자마자 데이트 타령이야. 남들이 사귀는 게 보고싶으면 직접 남친 만들어서 하라고."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연이가 쾌활하게 웃었다.
"난 구경하는 게 더 재밌거든?"
"취향도 이상해, 진짜."
내 비아냥을 뒤로 한 채 소연이는 유나 옆에 앉았다. 소연이가 도착했다는 말은 이제 곧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뜻이었다. 어쩌다보니 카페로 모이는 장소가 바뀐 것 같았다. 아까 유나가 휴대폰으로 채팅을 치는 듯 싶더니 이쪽으로 오라는 써놨나 보다.
소연이 뒤로 친구들이 속속 모였다. 어느새 빗자루 멤버 전원이 카페 안에 모이자 꽤나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가람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카페를 빠져나왔다.
영화관으로 향하면서 삼삼오오 모여 걸으며 끊임없는 얘기들이 이어졌다.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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