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화. 선거
집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서니 서아가 거실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어, 오빠 왔어?"
"응. 엄마는?"
"아직, 아빠도."
"저녁 어떻게 할까."
"곧 오실 거 같은데."
"그런가..."
그 때, 서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왜?
"근데 입술에 뭐 발랐어? 뭐 묻은 거 같네."
아까 유나가 선물해 준 립밤 때문인가?
"아, 립밤."
"오빠가 립밤을?"
"선물 받아서 바른 거야."
"누가 줬는데?"
"유나가."
"유나 언니가? 진짜 사귀는 거 맞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서아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내 방으로 향하려다 뭔가 떠올라 다시 서아를 보고 말했다.
"혹시 방탈출 좋아해?"
"응! 당연하지! 근데 왜?"
서아의 열성적인 반응은 간만인 것 같았다. 방탈출 가 본 적 있나? 꽤 비싸던데.
"어... 해성이한테 방탈출 티켓이 생겨서 말이야... 해성이가 된다고 하면 갈래?"
"그래! 아... 솔잎이도 같이 가도 돼?"
"물어보고 말해 줄게."
"알았어~"
저 반응을 보니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할 것 같은데.
방에 들어가서 백을 내려두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 나: 혹시 방탈출 카페 티켓 생긴 거 서아도 데려 가면 어때?
해성이에게 채팅을 보내두자 곧 답장이 왔다.
- 해성: 상관 없다
- 나: 그럼 혹시 서아 친구도 괜찮아?
- 해성: 누구 말인가?
- 나: 전에 우리집에서 분신사바하다 다쳤다고 했던 앤데..
- 해성: 상관 없다
- 나: ㅇㅋ ㄳ
- 해성: (이모티콘)
마지막 긍정하는 토끼 모양 이모티콘을 보니 해성이는 이견이 없는 모양이다. 그럼 언제 갈지 날짜 조율만 하면 되겠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생에게 낭보를 전하러 거실로 향했다.
* * *
확실히 날이 추워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두루마기를 꺼내 걸치고 현관 밖으로 나섰다. 늘 유나를 만나던 곳에서 유나를 기다리자 머리에 두툼한 풍차를 쓰고 오는 것이 보였다.
"와, 꽁꽁 싸맸네 그렇게 추워?"
"기왕이면 따뜻한 게 좋지. 이거 안 보여?"
유나는 자신의 한복을 가리켰다. 두툼한 솜이 들어 있는 저고리였다. 옷깃을 따라 솜털도 하얗게 달려 있었다.
"따듯해 보이긴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몄다. 바람이 서늘했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곧 나란히 서서 학교를 향해 걸었다.
"너 혹시..."
"응?"
"아냐."
유나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뭘 물어 보려고 한 걸까?
우리는 그렇게 말 없이 걸었다. 사실 정적이라곤 해도 날씨가 춥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줄어든 거겠지. 그래도 말없이 걷기만 하니 어색한걸.
정적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젠 방과 후 활동도 안 하니까 좀 심심할 것 같아."
"응, 어쩔 수 없지... 올해 십인대전도 끝났고... 3학년 선배들은 이제 졸업이니까."
이제부터는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하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한 기분이어야 할 것 같은데 아쉬운 기분도 들고 그렇네.
주변을 둘러보니 말라붙은 낙엽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벌써 일년이 다 돼 가네."
"그러게."
유나와 함께하는 등교도 봄부터 시작했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교 교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슬 다른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최근 SNS 영상이라던가 십인대전 때 마도경을 날려버린 것 때문에 내가 제법 유명해진 것은 확실했다. 종종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오는 3반, 4반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소연이 친구 볼 거야?"
딴 생각을 하며 걷다가 유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설마 아까 물어보려고 했던 게 이거였나?
"아니."
"왜?"
유나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리고 소연이도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거 같아. 그 이후로 연락도 없었거든."
"으흥."
유나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다.
"왜 물어본 거야?"
"그냥. 궁금해서."
"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네가 기억하는 것도 신기하네."
"나도 그냥 떠오른 거거든?"
티격태격하며 어느새 가까워진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교실로 들어서니 눈을 감고 있는 해성이가 보였다.
"왔나."
"네가 하는 명상의 끝이 있긴해?"
"흠. 생각해 볼 만한 주제로군."
농담 삼아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주면 뭐라고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네.
"그런데 너도 들었나."
"뭘?"
"곧 학생회장 선거가 있을 거라고 하는데 말이다."
"엥... 그게 뭐야?"
해성이 입에서 나올 만한 단어가 아니라서 깜짝 놀라고 있는데 가람이가 어느새 우리에게 와 있었다.
"때마침 선거 얘기 하고 있네!"
"어... 방금 들었는데..."
"그럼 얘기도 할 겸 매점 고고?"
샌드위치를 아까 먹고 왔지만 소세지빵은 참을 수 없지.
이후 환복을 마치고 교실로 들어온 유나는 얼떨결에 가람이에게 떠밀리듯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우리들은 빗자루 멤버들을 소집해서 매점으로 향했다. 항상 전부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몇 명이 모이든지 시끌시끌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번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은 해성이와 다래였다. 두 사람은 매점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벤치를 중심으로 모였다.
가람이가 자신의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를 이어서 하자면! 제가 이번 학생회장 선거에 후보로 참가할 예정입니다. 흐흐, 많은 관심 부탁!"
"뭐? 진짜?"
"크하핫! 네가 부회장 후보라니!"
유나와 성호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수린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질 수 없지."
"...엥?"
"그... 그 말 뜻은? 농담이라고 해 줘..."
나와 가람이의 반응도 빠르게 나왔다.
"우와! 수린이도 후보로 나갈 거야?"
유나의 놀란 표정에 수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이가 벤치 한쪽을 잡고 좌절하듯 과장된 연기를 해 보였다.
"야야, 왜 그래?"
"너... 넌 아무것도 몰라...! 수린이를 상대해야 한다는 기분을 말이야!"
성호의 말에 가람이는 우는소리를 했다.
"어차피 이름 뿐인 부학생회장이라도 해 둬야 내년에 학생회장 선거에서 유리하겠지. 널 상대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
수린이의 말에 가람이는 마음의 상처라도 받은 듯 벤치에 풀썩 주저 앉아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런데 학생회장은 뭘 하는 거야?"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수린이가 대답했다.
"교칙 건의, 학생들의 의견 수렴 및 전달, 체육대회, 축제 같은 행사 진행자."
"지... 진행자 역할도 있었어?"
유나는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린듯 가람이가 수린이의 말을 이어서 받았다.
"학생회장은 내년에 3학년이 될 선배들 중에서 뽑는거고, 부학생회장은 내년에 2학년이 될 우리들 중에 뽑는거야. 투표는 2학년까지만!"
중학생때만 해도 학생회장은 1학기 초에 뽑았던 거 같은데 여긴 굉장히 미리 선출하는 것 같다. 인수인계할 것이 많은 건가?
"부학생회장 되면 좋은 게 있는 거야?"
유나의 말에 가람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뭔지 몰라도 되고 나서 생각하려는 거였냐?
수린이가 가람이를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학생회 운영비가 들어와. 적지 않은 금액이지. 부학생회장은 학생회장과 논의 하에 교내에서 사용할 곳을 지정하고 분배해."
"과연... 많이 알고 있네."
내가 감탄하듯 말하자 수린이는 나를 지긋이 쳐다볼 뿐이었다. 시선이 부담스럽다. 칭찬을 해 준 보람이 없어.
"그럼 올해 운영비는 어디에 쓰인 거야?"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소연이가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말했다. 듣고보니 그렇네.
"올해 학생회장이었던 배주영 선배는 축제 때 외부 가수 초청하는 비용으로 대부분을 사용했다고 들었어."
"그... 그래?"
수린이의 막힘 없는 대답에 소연이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암행어사' 밴드를 부른 게 배주영 선배였던 건가?
"하여튼 부학생회장은 둘이 후보로 나간다는 거지?"
소연이가 분위기를 돌리듯 말하자 수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이는 수린이가 라이벌이라는 걸 다시 상기하자 괴로워졌는지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도 후보로 나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학교 홈페이지에서 신청해."
수린이의 말이 끝나자 해성이와 다래가 먹을 것을 가지고 벤치로 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뭘 신청해?"
다래의 말에 우리들은 물끄러미 가람이를 쳐다봤다. 다래가 우리들의 시선을 좇다가 가람이를 보곤 이맛살을 모았다.
"쟨 또 왜 저러는데?"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해성이는 가람이 옆에 소세지빵들을 내려놓곤 가람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 *
쉬는 시간에 학교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학생회장 후보가 두 명, 부학생회장 후보가 세 명이었다. 마감 시간이 며칠 남긴 했지만 얼마나 더 후보가 등록될 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후보를 등록한다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학생 추천이 필요했다. 가람이의 성화에 못이겨 학교 홈페이지에 후보 추천을 클릭해 줘야 했다.
"호준 선배가 학생회장 후보라니 생각도 못했는데. 류지운 선배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야."
유나가 내 책상에 손으로 꽃받침을 한 상태로 말했다. 요즘은 안 이러는 줄 알았더니 다시 저러네.
"아까 얘기 들어보니까 회장 할 거면 인싸여야 할 것 같던데?"
"맞아, 아까 여은 선배한테도 메시지로 물어봤더니 그냥 인기 투표 맞대. 호준 선배는 훈남에다 성격도 좋으시고, 류지운 선배는 노래 잘 하고 인싸잖아."
"흐응... 그렇군."
유나가 남자선배들을 칭찬하는 걸 들으니 조금 기분이 상하는 느낌이었다. 해성이는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명상중인 모양이고.
그러고보니 학생회장만 얘기했는데, 그럼 작년 부학생회장도 있었을 거 아냐?
"아, 맞아, 올해 부학생회장이 누구였는지 알아?"
"전유리 선배였는데... 나도 얼굴만 아는 정도라서..."
언뜻 지나가면서 들어본 듯한 이름이긴 한데 잘 모르겠다. 누구지?
"전유리 선배? 으흠... 얼굴도 기억 안나. 아닌가... 잠깐."
배주영 선배가 진행할 때 가끔 옆에 서 있었던 2학년 여자선배가 전유리 선배였나 보네.
"생각이 조금 나나 봐?"
"응, 배주영 선배 옆에서 가끔 본 것 같아. 내년 학생회장은 관심 없으신가 보네."
"음... 이것도 들은 얘긴데, 배주영 선배랑 마찰도 좀 있었다고 해서 학생회장 자체에 흥미가 없어진 거 아닐까 하는 얘기가 있어."
"그렇군... 마찰이 뭐였을까."
유나가 꽃받침을 풀더니 주변을 살피다가 내게 속삭였다.
"전유리 선배는 배주영 선배가 운영비를 전부 노는 데만 써 버려서 매번 싸웠대."
"아하..."
돈 문제도 중요하지. 그러고보니 부학생회장 후보에 가람이, 수린이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길호산이 부학생회장 후보 등록한 것도 의외 아냐?"
"그것도 그래. 우리랑 예선전 할 때 보니까 잘 싸우더라. 성격도 되게 활발한 것 같았어."
"어떻게 되려나?"
"보는 재미는 있겠지? 히힛."
부학생회장 후보 얘기를 하다보니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 곧 수업을 위해 차유경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나오는 지명이나 단체, 인물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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