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 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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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마카롱
작품등록일 :
2021.01.20 01:25
최근연재일 :
2021.01.2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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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0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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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 NPC

DUMMY

게임 좋아하시나? 아니면 영화는?


고되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 게임 한 판이나 명작 영화 한 편을 즐기는 현대인이라면, 1999년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연도에 개봉한 존 윅 주연··· 아니,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매트릭스」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필 같은 1999년에 개봉한 탓에 그야말로 심연까지 파묻혀 버린 비운의 수작, 「13층」 이라는 영화를 아는 사람도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세기의 화두였던 가상현실, ‘통 속의 뇌’ 라는 철학 문제를 근간으로 하는 영화인데, 1937년의 미국을 하나의 거대한 가상현실로 구현해 놓은 게임 세계가 서사의 중요한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 더글라스는 가상현실을 활보할 본인의 아바타로 인상적인 콧수염을 지닌 은행원, 퍼거슨을 선택해 접속한다.

그렇다, 아바타!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게임 속에서는 플레이어가,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중심이 되어 따분한 우리의 일상과는 사뭇 다른 매력적인 서사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서사가 고착화되자 일종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장이라도 던지고 싶었는지, 2021년작 영화 「프리 가이」의 감독 숀 레비는 「13층」과 마찬가지로 가상현실 게임을 소재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가이’를 플레이어가 아닌 NPC로 등장시킨다. 그런데 감독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할리우드의 기묘한 전통이라도 생긴 것일까? NPC ‘가이’ 의 직업 또한 은행원으로 묘사된다.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음··· 별로 흥미롭지 않다고? 뭐, 그렇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의 의견과 달리 정말로 흥미롭지 않은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은행원이라는 직업이다.


- 띵동


“86번 고객님 이쪽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떤 업무 도와드릴까요?”


“카드 비밀번호 좀 바꿔주세요.”


“넵,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분증은 가져오셨나요?”


“아, 깜빡했다.”


“저런, 신분증이 없으시면 처리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에이 귀찮게··· 요즘은 지갑도 잘 안 들고 다니는데 신분증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시간도 없는데 그냥 좀 해주세요.”


“이런 XX, 그럼 니가 금융감독원 앞에서 1인 가두시위 하고 본인인증 시스템 싹 다 뜯어고쳐서 새로 만들어 이 XX야. 이걸 그냥 확 XXX···.”


물론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열심히 중얼거렸는데, 그렇게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표현을 훨씬 더 순화하고 다듬는다고 한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한바탕 드잡이질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


“이런 XX, 귀중한 점심시간에 30분을 기다렸는데··· 내가 다시는 이 은행 오나 봐라!”


- 쾅


“네, 다음 고객님~ 어떤 업무 도와드릴까요~?”


“아, 카드 비밀번호를 까먹어서요. 좀 바꿔주세요.”


“혹시 신분증은 가져오셨나요?”


“아, 깜빡했다.”


“······.”


똑같은 드잡이질을 하루에 열 번씩 했다가는 체력도 멘탈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 입행(入行)할 때만 하더라도 하루에 최소 다섯 번씩은 머릿속으로 고객님의 멱살을 잡고 한 판 업어치기를 하는 상상을 했었지만, 어느새 1년이 지난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아, 집 가고 싶다···.”


직장인들의 단골 독백 1호와 함께 2시간을 겨우 더 버텨냈다. 체감상으로는 거의 4시간 같은 2시간이었지만, 마침내 반대편 창구에서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계정 마감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야근하지 말고 칼퇴근해요~”


“휴우···.”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퇴근의 마지막 고비, 쌓일 대로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반대편 창구가 아닌 바로 옆 자리에서 피로와 스트레스에 찌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훈아, 오늘 특별한 거 없지? 나 퇴근해도 되냐?”


“아, 과장님. 오늘은 다행히 미결도 없고 특이사항도 없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얼른 퇴근하자···.”


그 순간, 서류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던 업무용 전화기의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빠밤♪ 빠바밤♪


“어? 이 늦은 시간에··· 뭐지?”


서류를 한쪽으로 대충 치우고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하니 어딘지 익숙했다. 은행 고객센터 번호였다.


“네, 구도훈 계장입니다.”


「계장님 안녕하세요, 고객만족 CS 담당자 이효진 대리입니다~ 금일 점심시간에 지점에서 카드 비밀번호 변경하셨던 박○○ 고객님 요청으로 연락드렸는데요. 혹시 계장님께서 업무 보셨던 게 맞으실까요?」


“맞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김선공 과장이 살짝 불안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 아까 앞에서 욕 한 사발 쏟아내고 갔던 인간 아닌가? 도훈아, 스피커폰 켜봐.”


「아하, 그러셨군요~ 격무로 바쁘실 와중에 말씀 전해드리기 죄송하지만··· 그 박○○고객님께서 저희 평화은행 CS 게시판에 민원 글을 올리신 다음 고객센터에 항의 전화까지 하셨더라구요. 그래서 향후 응대 방법을 안내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에··· 민원이요? 아니 규정 다 설명드렸는데 왜 민원을 넣었답니까?”


「음··· 남겨주신 글을 보면··· 장시간 대기에도 불구하고 직원이 불친절한 태도로 업무 수행을 거절했다고 되어 있네요. 물론 계장님께서 그렇게 하시진 않으셨겠지만, 일단은 고객님께서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하셨기 때문에 저희도 내부 절차상 오늘 바로 응대한 기록을 남겨야 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난감하다는 듯한 이효진 대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훈과 선공의 안색은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져 갔고, 그렇게 6시··· 6시 반··· 7시까지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에효··· 정말 지겹다 지겨워 이 생활··· 다녀왔습니다···.”


아무리 겪어도 기습 야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고, 아무리 일해도 은행 일은 도무지 재밌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회사 생활이란 게 애초에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울한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서류가방과 외투를 소파 옆에 대충 던져두고 거실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 왔냐? 저녁은 먹었냐?”


불량과 무성의의 끝을 달리는 목소리, 짜증을 넘어서 어이를 상실한 도훈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파에 누워 있는 그의 여동생을 맥 빠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30분 전에 퇴근했는데 먹었겠냐? 그리고 뭐, 왔냐? 먹었냐? 니가 엄마야? 하여튼 오빠한테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도훈보다 7살이나 어린 여동생이자, 요즘 들어 한창 여유가 넘치는 대학생 구도희는 TV화면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엄마냐? 엄마면 밥이라도 해줬겠지. 치킨 좀 남았으니까 저거라도 먹던가.”


“다리 남겼냐?”


“아니. 퍽퍽살이나 많이 먹고 근육 좀 키워.”


“이런 개XX··· 됐어! 하도 스트레스 받아서 배도 안 고파.”


“아니 왜 먹으라고 해도 지랄이야? 그러니까 여자친구도 없지! 은행 들어가면 생길 거라며? 내가 구라일 줄 알았다~ 역시 인생 될놈될~”


- 쾅


“후우···.”


그래도 어릴 때는 귀여웠는데,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끓어오르는 열을 애써 삭히며 자신의 방에 들어온 도훈은 푹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고개만 살짝 들어 책상을 바라보자 흐리멍텅한 네온 불빛을 흘리는 탁상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한 시간 정도 야근을 하고 오긴 했지만 아직 시간은 9시. 평소였다면 아쉬워서라도 컴퓨터를 켜거나 먼지 쌓인 책 표지를 넘기려는 시도라도 해 보았겠지만, 오늘은 유독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머리통을 얌전히 베개 위에 올려놓고, 배꼽 위에 두 손을 포개었다. 오랜 경험을 쌓은 탓에 맞춤형 형상기억 기능을 각성한 침대 매트리스가 천천히 아래로 꺼지며 도훈의 체형에 알맞게 감겨들어오는 감촉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눈꺼풀이 빠르게 무거워졌다.


“······.”


어두운 방 안, 두 눈을 감은 도훈은 아늑한 침대 위에서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

······ 으아아악!


불타는 도시, 그리고 절규하는 시민들.

하늘에 닿을 것 같았던 고층 빌딩들은 거대한 장작이 되어 끝없이 타올랐고, 사람들은 핏빛으로 붉게 물든 하늘의 열기 아래서 그릴 속 고기가 되어 익어갔다.


- 아아악··· 살려줘!


잠깐의 휴식도 없이 번져 오는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도로에 주저앉은 자동차와 부러진 가로수 때문에 길이 좁았다. 이미 많이들 죽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너무 많았고, 길은 좁아도 너무 좁았다.

그래서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익숙하지만 도저히 친해질 수는 없는 끔찍한 악몽.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훈은 살면서 벌써 몇 차례나 지금과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번 공포로 이성을 잃은 군중에 뒤섞여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겠지만 평소와 조금 달랐다. 지옥의 채찍처럼 따가워야 할 새빨간 화염의 온도가 건식 사우나의 후끈함 정도로만 느껴졌고, 도망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표정도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재난 상황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퇴근 시간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가까웠다.

덕분에 도훈은 단번에 현재 상황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꿈인 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 끔찍한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의 고민 끝에 도훈은 예전에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루시드 드림에 대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할 수만 있다면 꿈을 꾸는 사람의 자유의지대로 그 내용을 통제하여 초현실적인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꿈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되, 디테일한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도훈은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최대한으로 집중했다. 최근에 보았던 첩보물 드라마의 한 장면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듯 떠올리자 상상과 꿈 속 현실의 경계 속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리는 것이 느껴졌고, 곧 요란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드라마에 나왔던 것과 똑같이 생긴 군용 구조 헬기에서 미군들이 영어로 고함을 지르며 구명 로프를 내리고 있었다. 도훈은 망설임 없이 그들이 내려 준 로프를 잡고 올라갔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별로 긴장되지도 않았고, 없던 힘도 넘쳐나서 군대에서 유격할 때보다도 훨씬 더 쉽게 로프를 잡고 오를 수 있었다.


“여엇차. 땡큐.”


미군 병사가 새하얀 살인미소와 함께 억센 손을 건넸다. 덕분에 도훈은 마지막까지 실수 없이 무사히 헬기 안에 들어설 수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등을 떠밀려 비어 있던 좌석에 얼떨결에 엉덩이를 깔고 앉게 되었다.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띵동


“으에엑?”


자리에 앉자마자 프로펠러의 폭음을 뚫고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사운드 - 은행 창구 호출 벨 소리 - 에 너무 놀란 탓에 저절로 입에서 쑥스러운 효과음이 튀어나왔다. 소리만으로도 몸을 반쯤 일으킬 뻔했다는 사실 때문에 굉장히 부끄럽기도 했다. 당황하여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에 있던 미군들과 눈을 마주쳐 보았지만, 도훈의 입을 연달아 가리키며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을 뿐 도훈이 들은 벨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마치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글이 새겨진 홀로그램 화면 여러 개가 차례대로 도훈의 눈 앞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위기 극복 보상으로 플레이어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곧 튜토리얼 장소로 이동합니다.」


도훈은 다시 한 번 주변에 있던 미군들의 반응을 살폈지만 좀 전 호출 벨소리 때와 똑같았다. 방금 전 벨소리를 듣고 허공에 떠오른 화면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이 곳에서 오직 도훈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튜토리얼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꿈이잖아? 꿈 속의··· 게임?’


순간 오죽하면 이런 꿈을 다 꿀까··· 하는 처연한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새 도훈의 가슴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표현과 문장 부호 등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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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일일 퀘스트 +1 21.01.23 61 0 16쪽
2 2. Player +1 21.01.22 65 1 14쪽
» 1. NPC 21.01.20 109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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