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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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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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13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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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8)

DUMMY

사실 부산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것을 구분 지을 특징은 찾기 힘들었다. 어차피 시가지는 점진적으로 무너져가고 있었기에 경계선은 모호했다. 물론 그런 건 생각지 않고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한적한 산길이 나타났다. 바로 지금과 같이.


그래도 오른쪽이 해안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렇지만 항구같이 사람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 구불구불한 자연 그대로의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산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바다가 밀려난 곳에는 소금 해안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얀 알갱이들이 점묘화(點描畵)처럼 커다란 초승달 모양을 만들었다. 저곳을 걷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참기로 했다. 괜히 바다 근처에서 물벼락이라도 맞으면 곤란해질 테니까.


해안선은 구불구불 복잡했다. 북쪽으로 갔다가도 완전히 서쪽으로도 움직이고, 도리어 남쪽으로 거스르는 경우도 생겼다. 그렇지만 난 충실하게 해안선을 따라갔다. 조금 미련한 생각도 들지만 뭐 어때.


가끔이지만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서 몇몇 사람들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5시간 만에 본 사람이라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향했다. 부산에서조차 사람 보기 힘든 마당에, 도시에서 벗어난 이곳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란 거의 드문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시오.”


중년을 넘어선 사내는 내가 인사를 하자 같이 인사를 했다. 그는 그물을 다듬고 있었다. 옆으로는 부인으로 보이는 분도 함께 그물을 다듬고 있었다. 살짝 둘러보자 두어 척의 배와 네다섯의 사람이 더 있었다. 인사를 한 남자는 허리를 피며 날 향해 다가왔다.


“어디 가시오?”

“네. 안동으로 갑니다.”

“안동? 멀리 가시는구려. 친척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최근에 경북 쪽이 제법 뒤숭숭하다오. 조심하시길 비오.”

“뒤숭숭하다니요?”

“하늘이 요새 땅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친다고 합디다. 벼락 맞지 않게 조심하구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하늘이 땅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친다... 저물어가는 땅과는 달리 하늘에는 기묘한 세력이 존재했다. 지금은 그냥 ‘하늘’로 통칭되는 그들은, 땅과는 동떨어진 과학기술로 전장 2km가 넘는 거대한 전함들을 창공에 끌고 다니며 싸움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두 패로 갈라진 하늘의 세력은 땅과는 상관없는 ‘전투Battle’만을 계속하며 수 백, 수 천 년을 지내왔다. 사천이 넘는 나조차 그들의 싸움이 언제 시작된지 몰랐다. 그저 그 기원(起源)에 대한 전설에 가까운 어렴풋한 기억만이 있을 뿐.


다만 분명한 건 500년 전 나와 하늘 사이에 큰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지금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리는 건 힘든 작업이었기에, 그냥 묻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헌데 얼마 전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이런 망각의 시간은 끝나고 말았다.


바로 땅에 추락한 하늘의 파일럿 ‘강나린’ 중위를 땅에 정착시켰던 것. 추락 직후 ‘스카이피아(하늘의 양대 세력 중 하나)’에서 그녀를 회수하러 왔지만, 나는 땅에 남겠다는 그녀의 뜻 - 물론 내가 설득하긴 했지만 - 에 따라 중위를 땅에 정착시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잊혔던 내 존재가 하늘에 알려진 데에 있었다.


500년 전 하늘과의 싸움 - 현재는 카타클리즘(대변혁)이라고 부른다. - 에서 그들을 굴복시켰던 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하늘에는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래도 강나린 중위 사건 이후 별 일이 없다는 건 다행이었다.


‘뭐 아직까지 쫓아오는 기색은 없으니.’


이번 여행에는 하늘이 어느 수준까지 날 마크하고 있는지 알아볼 속셈도 있었다. 멀리 이동한다면 뭔가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서 지금까지 아무 이상도 찾지 못했다.


‘곤두서 있는 게 바보 같군.’


하늘에 휘둘리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런 고로 지금부터는 신경 끄고 가는 데에만 집중해야지.


“그럼 조심하십시오.”

“젊은이도 가는 길 평안하길 비오.”

“감사합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북쪽에서 설친다고? 분명 최근 하늘의 국경이 조금 혼란스럽긴 했다.


‘어처구니없는 선긋기군.’


하늘은 하늘에 선을 그어놓고 싸웠다. 즉 그들이 가지는 영토의 개념인데, 그것이 땅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언젠가 땅으로 내려와 써먹을 국경이었다. 그러나 언제가 언제인지는 그들도 모를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로 양 세력추가 기울어진 건 아주 짧은 기간뿐이었으니까. 어쩌면 땅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전투는 계속되겠지.


‘바보들.’


전투건 뭐건 지금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늘에게 지배할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땅도 하늘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들은 부지런히 싸우고 있다. 승패가 나지 않는 싸움을.


생각에 잠겨 얼마를 걸었을까. 시간은 어느덧 오후를 넘어 밤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림자의 길이가 늘어나고 그만큼 주변의 움직임이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가온 어둠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낮과 밤의 경계는 너무 짧아서 붙잡기 힘들었다. 잡으려고 들면 미꾸라지처럼 도망갔다. 허나 정말 안타까운 건, 어둠이 바로 옆으로 와서 잡아보라고 재촉하기 때문이겠지.


사방은 어두워졌다가 이내 밝아졌다. 실제로 그런 건 아니고, 눈이 적응해서였다. 슬슬 빛이 사라지면서 사물은 색이 아닌 명암차로 다가왔다.


화려한 색이 사라지면 자연히 집중되는 감각이 있었다. 바로 귀다. 버적거리는 투박한 길의 소리와 휘날리는 바람소리. 난 감각이 바뀌는 틈을 타 지도를 펼쳤다. 허나 빛이 없기에 작은 손전등을 켠 상태로 입에 물었다.


“30km 정도 걸었나.”


겨우 10% 정도를 왔을 뿐이다. 잘못하면 올라가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릴 지도 몰랐다. 갑자기 걱정이 늘어났다. 대략 왕복 2주일이란 말인데. 으음.


‘조금 무리해볼까.’


하루에 10시간을 걷는다고 치면 50~60km는 갈 수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4일 이상은 걷기가 힘들다. 나도 어디까지나 두 다리로 걷는 인간이니 말이다. 이렇게 결심을 한 나는 고생할 걸 생각하면서 쓰게 웃었다.


빛이 없는 거리를 걸어 나갔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달이 없는 밤이라 별은 더더욱 두드려져 보였다. 한때 별자리를 외우고자 노력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겨울 별자리들 뿐. 결국 8월의 별자리 중 아는 건 없었다.


끊임없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채워갔다. 명암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길은 희미하게 빛나며 멀리까지 이어졌다. 멀리 은하수가 길 위로 늘어져 있었다. 하늘과 땅에서 비슷한 밝기로 빛나는 둘은 거울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은하수 안쪽을 살폈다. 눈의 맹점(盲點)에서 별들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조금 비껴보면 보이고, 제대로 보려면 보이지 않는 별들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작은 별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인공위성이군...’


여전히 과거를 품고 같은 궤도를 움직이는 인공위성. 하늘이 아닌 다음에야 저것과 대면할 일은 없겠지. 다시금 중력에 사로잡힌 인간의 끝은 인공위성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잠시 뒤 옅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인공위성은,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섰는지 순간 사라졌다.


찌륵거리는 풀벌레 소리와 웅성거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인공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길. 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칠흑의 어둠. 그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음악. 거리를 알 수 없는 바다. 이따금씩 보이는 높은 파도와 그 울음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 심장소리.

자연이 조용해질수록 내 존재도 작아져갔다. 시끄러운 인간들 사이에서는 나도 목소리를 키워야 하므로 존재를 키워야 했지만... 지금 같은 환경에서라면 한없이 작아질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가자, 가야지.”


목소리를 냈다. 아직은 인간이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서 완전히 작아져야 하겠지.


두어 시간을 더 걷고 민박을 잡았다. 다행히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집이 나타났다. 솔직히 아침까지 걸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걱정은 걱정에서 끝났다. 앞서 지나온 어촌과 비슷한 촌락을 만난 것이다. 게다가 마침 빈 방이 있어 오늘 밤을 보내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고맙게도 방의 창은 바다를 향해 나 있었다. 간단히 챙겨왔던 음식을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잘 준비를 마친 나는 창을 향해 다가갔다.


‘낮군.’


낮은 바다를 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휘미래의 집은 높은 곳에 있었기에 느낌이 아주 달랐다. 그래도 다를 뿐이지 뭐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편하게 앉은 자세에서 창틀에 팔을 기댔다. 거의 같은 눈높이에서 파도는 선(線)으로 다가왔다. 어둠의 짙은 푸름 속에서 포말(泡沫)의 부서짐은 특히 눈에 잘 들어왔다. 잠시 뒤 거품들은 자갈과 함께 서로 엉겨 사라졌다. 하지만 이내 뒤쪽에서 또 다른 파도가 달려들었다.


따로 숫자를 센 건 아니었지만 대충 수 백 번의 파도가 왔다가 사라졌다. 마침내 파도도 지겨워질 즈음, 나는 깔아 놓은 이불에 몸을 눕혔다. 내일은 더 많이 걸어야 하니까 푹 자둬야 했다. 아무튼 누운 상태에서 눈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하늘을 향했다.


“??”


그런데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이 가득한 하늘에 급하게 움직이는 또 다른 별 하나. 인공위성인가 싶었는데 별은 점차 커져갔고, 어느 순간엔가 시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선?!”


벌떡 일어난 다음 허둥지둥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엄청난 스피드의 모선은 순식간에 내 머리 위를 지나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모선 표면에 적혀 있던 이름을 읽어냈다.


“4함대 일루미네이터Illuminator라.”


그때 강나린 중위 사건 당시 왔었던 함대였다. 세력권임은 분명하니까 별로 상관은 없는데, 북쪽으로 바지런히 날아가는 모습은 꽤 신경 쓰였다. 과연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걸까?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조금 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던 난 잠을 청했다.





2화 : 땅으로,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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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pu님 리플에 대한 답변입니다.

현하가 영원히 산다해도 인간인데 빙하기?.. 이런걸 이겨낼 수 있나요?

: 아마 동면(?)에 들어갈 겁니다. 번외 1편에 나왔던 것처럼요. 그러다 기후가 온화해지면... 다시 깨어날 수 있겠죠.


답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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