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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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검혼
그림/삽화
검혼
작품등록일 :
2021.01.24 14:07
최근연재일 :
2022.01.2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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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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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첫 표행, 마지막 표행

내 운명은 내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DUMMY

10. 첫 표행, 마지막 표행



하남표국 마당은 곧 떠날 표행을 준비하느라 북새통이었다. 마차와 말, 표물과 온갖 짐들이 뒤엉켜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준비를 서두르라는 표사들의 외침과 고함이 이곳저곳에서 난무했다.


“아직도 말굽도 안 갈고 예태껏 뭐 했는가.”


“예,예, 지금 죽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말이 많아서···.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빨리빨리 마차에 표상을 전부 실어라. 그리고 표차마다 표국 깃발을 달아라. 당장!”


“노숙에 쓰일 식량도 서둘러 실어라. 자 빨리빨리 서둘러라. 내일 묘시에 출발할 것이다. 준비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총사 하후행은 책자와 붓을 들고 일일이 표물과 표상을 점검하면서 이것저것 지적을 했다. 청운도 책자와 붓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북새통도 이런 북새통이 없었다. 청운도 표행의 준비 일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번 표행처럼 대규모의 표행을 준비하기는 처음이었다. 거의 은자 이십만 냥에 달하는 이번 표행의 목적지는 이천 리 길이나 되는 귀주성의 삼왕부다.


표물들은 삼왕야의 회갑에 쓰일 물건들이다. 귀하디 귀한 동방의 인삼과 담비가죽, 흑삼 그리고 천산에서만 난다는 동충하초 등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표물이 없었다. 이번 표행의 대가는 하남표국이 거의 일 년을 먹고 놀아도 될 만큼의 거액이다.


반대급부로 일이 잘못되면 하남표국의 운영은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표행에는 나서지 않던 국주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번 표행은 하남표국이 단독으로 성사시킨 계약이 아니다. 이번 일은 중원의 삼대표국 중 하나인 사해표국의 의뢰를 국주가 수용해서 이루어졌다. 이번 표행은 하남표국뿐 아니라 황룡표국과 안휘표국도 동시에 의뢰를 받아서 하는 표행이다.


물론 각 표국의 본산이 달라 따로 출발해 귀주성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번 표행 때문에 국주는 임시 계약직으로 사십여 명의 보표와 표사를 더 뽑았다. 그래서 표행의 전체 규모는 마차 열두 대에 총인원이 거의 백여 명이 넘었다.


이번 표행은 국주가 직접 지휘하고 감독한다. 그리고 물품이 워낙 다양하고 처리해야할 서류가 많아 국주는 청운도 동참시켰다. 대신 총사와 총표두가 표국에 남아 표국일을 처리하도록 결정되었다. 요즘 표국 일에 있어서는 국주가 총사보다 청운을 더 믿는 눈치다.


그래서 총사 앞에서 청운이 민망해질 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총사는 표국 설립 때부터 수십 년간을 국주와 함께 동고동락한 터라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운 혼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파산맥의 선하령 계곡 어귀에 있는 이십여 개의 천막이 쳐진 널따란 공터. 일 장 정도 높이의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선 국주 능천삼이 주변을 스윽 한 번 둘러보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이곳까지 온다고 모두들 수고가 많았다. 지금까지 큰 고비는 없었다. 물론 녹림과 흑림 지대를 통과할 때 적당한 통행비로 사태를 무마한 것은 내일부터 우리가 넘을 이 선하령에 바친 소소한 제물에 불과하다.


선하령은 그 길이만도 삼백여 리에 달하고 벼랑의 깊이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가파름은 나는 새도 쉬어가야 할 정도로 대단하고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잔도의 폭도 좁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충분히 쉬었다 출발한다.


답로조는 지금 당장 솥과 화덕을 걸고 고기를 삶아라. 술도 한 잔씩 돌려라. 하지만 내일을 위해서 절대로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는 마라. 말들에게도 충분히 콩을 삶아주고 상한 발굽은 일일이 찾아 갈아주라. 찢어지고 헤진 표기도 다른 것으로 갈아라.


모두 잘 알겠지만 산속 날씨는 변화무상하다. 혹시라도 폭우 같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표물이 상하지 않도록 꼼꼼히 챙겨야 한다. 그럼 보초만 빼고 모두 푹 쉬기를 바란다. 이상이다.”


능 국주는 짧지만 강한 어투로 꼭 필요한 말만 하고는 훌쩍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자신의 천막으로 갔다. 청운과 총사도 국주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이제 드디어 마지막 고비만 남았네. 모두가 총사와 강서기의 노고 덕분이네. 자, 자, 사양치 마시고 한 잔 쭉 들게.”


국주는 총사와 청운에게 한 잔 가득히 술을 따랐다.


“과찬이십니다. 다 국주님이 애쓰신 덕분이지요. 저희가 뭐 한 게 있습니까. 그냥 국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랐을 뿐이지요.”


총사는 겸양의 말과 함께 단숨에 국주가 따라준 잔을 마신 후 국주에게도 한 잔을 권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큰 탈이 없었지만, 왠지 황표두 사건이 영 마음에 걸리네. 이런 큰 표행을 저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능 국주의 불콰해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우리가 무림맹에 제소를 한 걸 알고는 저들도 잠시 조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총사는 국주의 근심을 덜어주려는 듯 일부러 별일 아닌 것처럼 상황을 낙관하듯이 말했다.


“아니, 아니네, 무림의 일은 절대 그렇지 않네. 한 번 목표로 정한 걸 무림맹에 제소했다고 쉽게 그만둘 작자들이라면 아예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네. 강 서기 생각은 어떤가?”


능 국주가 청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청운의 의견을 구했다.


“저야, 워낙 강호의 생리를 모르니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만, 만약 저들이 우리를 정녕 해하고자 한다면 이 선하령 길을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단단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청운은 자신 앞에 방금 마시고 내려놓은 빈 술잔을 내려보다 고개를 들어 말했다.


“그렇지, 나도 강서기와 같은 생각이네. 그래서 막대한 자금을 써서 나름 일류 보표들을 더 충원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어지간한 공격은 막아낼 걸세. 자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더하고 우리도 그만 쉬도록 하세.”


국주는 애써 자신감을 내보이며 말했다. 술을 몇 순배 마신 청운은 취기를 느꼈다. 국주의 천막을 막 빠져나온 청운은 천둥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취기에 젖어서 한밤중에 듣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는 마치 밤의 산이 어둠을 연주하는 음악 같았다.


아직도 천막 곳곳에는 술판이 벌어지는 듯 왁자했다. 곧 해시가 되면 취침나팔이 불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무조건 자야만 한다. 그것이 표행길의 규칙이자 법칙이다.


쿠르릉 ~ 쾅,쾅, 콰르르. 마치 산을 두 쪽으로 쪼개 놓은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은 밤에 밤을 겹쳐놓은 듯 주변의 밤보다 훨씬 더 시커멨다. 마치 우주의 태곳적 어둠이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낮과 빛이 아니라 밤과 어둠이 세상의 본래 얼굴 같았다. 취침나팔 소리와 함께 선하령 계곡의 밤이 끝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눈길로도 다 가닿지 못하는 까마득하게 깍아지른 절벽, 기기묘묘한 수많은 기암괴석의 형상, 그런 기암괴석을 수천 년 길들이며 사느라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꾸불텅꾸불텅 뒤틀린 노송의 가지와 줄기들, 그 노송들의 영혼인 듯 노송의 우듬지를 일렁이며 쓰다듬는 운무. 절경도 이런 절경이 없다.


그냥 소풍을 나왔다면 모두가 아~, 하는 시인묵객이 되고도 남았을 장관이다. 하지만 일에는 절경이 없다. 큰일일수록 주변의 수일한 풍광은 오히려 일에 위험을 더하는 요소가 될 뿐이다. 깍아지른 벼랑길과 잔도를 조심조심 이동하는 하남표국의 행렬이 그러했다. 십여 대의 마차를 간신히 끌고 가는 마부와 짐꾼, 표사들의 발걸음에는 긴장이 잔뜩 묻어났다.


긴장을 하기는 청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에도 인세에 다시없는 절경이 절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얼마나 더 가야 이 긴긴 계곡이 끝날까만 생각했다. 체질적으로 청운은 작은 일에도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성장기에 그가 읽고 학습한 무수한 책들이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그의 성정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표국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생각의 양과 깊이는 과거와 다를 바 없었으나 생각의 결은 많이 달라졌다.


전적으로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고부터는 생각의 방향이 단지 학문만을 향하지 않고 여러 가지 세상사에도 가 닿았다.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꿈은 이제 완전히 접었다. 청운은 표국 일을 착실히 배워 자신도 나중에 국주처럼 표국을 운영해 보고 싶었다. 그러면 가족 부양은 물론 남는 돈으로 사회적 약자도 돕는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수천 마리의 시꺼먼 이무기가 뒤엉킨 걱 같은 선하령 계곡은 징그럽게도 길고도 길엇다. 묘시에 출발해서 지금은 거의 미시이니,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았다. 빨리 적당한 쉴 곳을 찾아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간신히 말을 몰아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상단 전체가 쉴 만한 제법 널찍한 공터가 나타났다. 아니나 다를까 앞장서 표행을 이끌던 국주가 팔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자, 이제 오르막길은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곧 내리막길이다.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모두들 건량과 육포를 꺼내고 솥을 걸어 찻물을 끓여라. 그리고 말들의 발굽도 살펴봐라.”


말을 마친 국주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때였다.


“굳이 여기서 만찬을 즐길 필요가 있을까. 조금 뒷면 어차피 사잣밥을 먹을 터인데. 하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다르다지. 그냥 죽으나 먹다 죽으나 매한가지이기는 하지.”


집채만 한 바위 뒤에서 갈의에 죽립을 쓴 인영 셋이 장내로 날아들며 으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그들의 손에는 낫고 아니고 창도 아닌 이상한 병기가 들려 있었다.


“음산의 선배들께서 이곳 선하령까지 왠 행차요. 지나가시는 길인지 아니면 나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국주는 평소와 다르게 아연 긴장의 낯빛을 띠며 공손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국주에게 볼일이 있지. 두말하지 않겠다. 마차와 말은 그대로 두고 모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라. 운 좋으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른쪽에 선 괴인이 자신의 무기를 앞으로 쭉 내밀어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강호의 선배가 되어 후배에게 무슨 망발이요. 돈을 원하신다면 내가 조금 선심을 쓸 용의가 있소.”


국주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검을 뺄 태세로 긴장하며 말했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시작해라. 오늘 날짜로 하남표국은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내가 장담한다.”


가운데 괴인이 자신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절벽 위에서 활과 검을 든 수십 명이 을 인형들이 나타났다. 쿠~쿠르릉~콰~콰~꽝. 슈~슈~슉. 집채만 한 바위가 갑자기 아래로 굴려 내내렸다. 화살이 폭우처럼 표국의 일행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별것 아니다. 마부들은 마차를 절벽 쪽으로 바짝 붙이고 말을 진정시켜라. 보표와 표사들은 무기를 빼들고 적들에 대항하라.”


국주는 자신의 검을 빼들고 보표들을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음산삼귀를 상대할 궁리에 몰두했다. 나 혼자서는 저들 세 명을 다 상대하기는 힘들다, 고 국주는 생각했다. 총표두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더 많겠구나, 하고 국주는 생각했다.


능 국주는 음산삼귀 중 둘이 괴도를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해오자 처음부터 인정사정없이 낙일 검법의 살초를 전개했다. 휘-리-리-릭, 음산 이귀의 푸른 도기와 국주의 붉은 검기가 허공에서 뒤엉키며 장내에 엄청난 강기가 휘몰아쳤다.


형세는 백중지세. 두 쪽 다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최고의 절기를 전개하며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부었지만 국주도 음산이귀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둘이서 저깟 놈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개지랄을 떠내. 결국엔 나까지 나서야 하나.”


몇 장 떨어진 바위 위에서 싸움의 형세를 지켜보던 음산 삼귀 중 나머지 하나가 싸움판에 가담하자 싸움의 국면은 금세 국주가 불리해졌다. 다른 쪽은 더 심했다. 아비규환. 목불인견. 싸움을 시작하고 채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보표와 표사들 거의 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갈수록 절망적이었다.


청운도 칼을 빼들고 <무예구기>에서 익힌 검법으로 대항했으나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궁지에 몰렸다.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 체계적으로 무공를 익힌 무사에게 독학으로, 그것도 내공도 없는 검법으로 대적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아주 청운을 갖고 놀 심산으로 청운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청운의 몸 이곳저곳에 살짝살짝 상처만 나게 공격했다. 청운도 본능적으로 그걸 느꼈다.


“이~노~옴. 차라리 무사답게 깨끗이 날 죽여라. 더 이상 나를 희롱하지 말고.”


청운은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소리쳤다.


“그렇게 빨리 죽고 싶단 말이지. 그럼 지금 당장 죽여주지. 뒈져라.”


청운을 공격하던 사내는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고 난 후 돌연 자신의 검으로 청운의 목을 베어왔다. 청운도 물러서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상대의 검을 쳐갔다. 바로 그 순간, 쿠~르~릉,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떨어진 집채만 한 바위가 청운의 바로 옆에 있던 마차를 그대로 때렸다.


부서진 마차에서 튕긴 나무상자의 파편 맞은 충격으로 청운은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청운은 상대의 검을 운 좋게 피하지만, 상자의 파편에 밀려 그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마차의 잔해와 함께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강-서-기. 아~안~돼~, 하는 능 국주의 목소리가 아래로 추락하는 청운의 귓바퀴에 아득히 들려왔다.


청운은 이게 자신의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추락의 속도 속에서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공부를 잘해 아버지와 스승님에게 칭찬받았던 일, 서당에서 돌아오자마자 빠듯한 살림에도 갓 지은 쌀밥에 고기반찬을 차려오시던 어머니, 과거에 낙방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던 관도에서 탈진해 쓰러진 후 하남표국의 별채에서 깨어난 일,


남궁영봉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윽한 눈길과 그것을 질투해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했던 모용후와의 사건 등. 청운은 온몸의 살을 저미는 차가운 계곡의 칼바람에 계곡에 떨어지기도 전에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그 순간 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치우천결을 운용했다.


* * *


밤이 더 깊은 밤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축시였다. 흑의에 복면을 한 수십 명의 인영이 마치 한지에 먹물이 스미듯 하남표국의 담을 넘고 있었다. 매일 화섭자를 들고 경비를 서고 있던 표국의 외곽 경비들은 이미 새까만 담장 아래 밤보다 더 검은 밤이 되어 처박혀 있었다.


뎅-뎅-뎅-뎅. 침입자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표국 전체를 뒤흔드는 비상종이 울렸다. 슈-슈-슈-슉. 불화살이 하남표국의 전각들을 향해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불을 꺼라! 이놈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으-악-윽-, 차-앙, 챙-챙, 꽈-광콰-앙.


치솟는 화마 속에서 폭발음과 비명이 순서도 없는 터져나왔다. 아비규환도 이런 아비규환이 없었다. 오늘 밤 십팔층 지옥이 하남표국에 다 모인 것 같았다.


표국 본체의 대전 앞에서 허 총표두는 자신 앞에 선 보표와 표두들에게 서둘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주 표두, 지금 즉시 사모님과 운겸 도련님, 선화 아가씨를 모시고 안가로 피신시키게. 통로는 국주님 집무실의 책상을 치우고 바닥을 들추면 나올 걸세. 이곳은 내가 책임을 지겠네. 자 빨리!”


“알겠습니다. 총표두님. 그럼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주 표두는 즉시 내실로 달려갔다. 허 총표두는 주표두가 떠나자마자 자신의 검을 빼들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앞마당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즉시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소리쳤다. 허 총표두의 노성에 전각들이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충분히 강하다. 일부는 불을 끄고 나머지는 본체 대전 앞에 모여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이번 표행에 불참한 표국의 무사들과 보표들, 짐꾼들, 시비들이 속속 본청 앞에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서둘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허 총표두는 곧바로 피가 튀는 격전장으로 내달았다.


그곳에서는 표국의 보표들이 흑의를 입은 일군의 무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흑의의 무리 앞에는 시뻘건 혈랑의 얼굴이 수놓아진 흑의 장삼을 입은 염소수염을 기른 오십 대 중반의 괴인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깡마른 체구에 뱀눈을 치켜뜨고 있고 다른 하나는 붉은 얼굴에 흉광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뱀눈의 중년인은 손톱이 시커먼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얼굴이 붉은 괴인의 손에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낫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허 총표두는 속으로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설마 노산이흉!


“노산의 선배님께서 무슨 볼일이 있어 이 먼 하남까지 왕림하셨습니까?”


허 총표두의 물음은 겉으로 보기에 나름 예의를 갖춘 말투였지만, 내뱉는 말릐 분위기는 심하게 상대를 질타하는 것이었다.


“그놈, 제법 강호의 견문이 있구나. 네가 총표두냐. 제법 고수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네가 누구라도 오늘의 결과엔 변함이 없다. 오늘부로 하남표국은 강호에서 사라진다.”


왼쪽에 선 얼굴이 붉은 괴인이 음산한 말투로 말했다. 그자는 곧바로 자신의 뒤에 시립한 흑

의의 무리에게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내리며 명령했다.


“쳐라. 오늘 하남표국의 쥐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깡그리 없애라.”


그의 솜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순간을 기점으로 흑이의 무리들이 표국의 사람들에게 피 냄새를 맡은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우리는 하남표국을 지키는 혼들이다. 적들은 별것 아니다. 평소 배우고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하라. 자신을 믿어라.”


말을 하면서도 허총표두는 내심 표국의 운명이 정녕 오늘이 끝인가, 라고 생각했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죽으리라 결심하면서 허 총표두는 노산이흉을 향해 자신의 독문절기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Ⅰ. 내 운명은 내 삶을 살지 못하고 1. 늦가을 달빛은 지나간 미련을 아득히 비추고 늦가을 대기에 씻긴 달빛이 투명하다 못해 시리다. 하남표국 별채의 지붕 위, 밤하늘에 얼기설기 얽혀 살랑거리는 백송의 잔가지가 깊은 밤하늘에 달빛을 아로새기는 현자의 붓질 같다. 마치 고목의 일부처럼 백송의 한쪽 가지를 밟고 선 검은 복면에 흑의를 입은 인형이 불 켜진 별채 한곳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 별채의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이 마치 정물처럼 고요하다. 잠시 후 창문 한쪽이 활짝 열린다. 갓 이십 대가 될까말까한 백의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고개를 내밀고 물끄러미 달무리를 바라본다. 무슨 상념이 그리 깊은지 그의 눈빛이 밤하늘보다 더 깊다. 한순간 청년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바로 그 순간, 백송 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나 싶더니 검은 인형이 먹줄을 튕기듯 백의의 청년이 한숨짓는 방안으로 쏘아졌다. 방 안의 젊은이가 놀랄 틈도 없이 한순간 복면인의 시퍼런 검 끝이 젊은이의 목젖에 닿는다. "내놔라." 복면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시퍼런 검 끝으로 젊은이를 찌를 듯 단호하다. "대체 뭘 내놓으란 말이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젊은이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모르겠단 말이지, 그럼 죽어야지." 복면인이 검 끝에 살짝 힘을 주자 검 끝에 한 방울의 붉은 피가 몽글 맺힌다. "정말 모르겠다면 내가 가르쳐주지. 이번 표행에 대한 표단(계약서)과 행로에 대한 정보를 모두 내놔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흑의의 복면인은 칼끝에 한 번 더 힘을 주었다. 앳된 청년의 목에서 또 한 방울의 붉은 피가 시퍼런 칼끝에 맺힌다. 바로 그때였다. “그건 절대 안 되지!” 웅후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우지끈 방바닥이 부서지며 번개처럼 한 인형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솟구쳐오름과 동시에 젊은이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은 복면인의 칼끝을 쳐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구나." 바닥에서 회오리처럼 솟아오른 청삼의 중년인이 흑의의 복면인을 향해 분기에 찬 호통을 치는 순간, 하남표국의 모든 전각과 마당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 불빛 속에 검과 활을 든 한 무리의 장한들이 별채를 완전히 에워싼 채 금방이라도 흑의의 복면인을 도륙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비록 날개가 있더라도 너는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빨리 복면을 벗고 네가 누구인지를 밝혀라." 청삼인의 단호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흑의 복면인을 겁박했다. "그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논리적으로 하시나.“ 청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의 복면인의 검이 청삼인의 심장을 찔러 갔다. "감히, 누구에게.“ 청삼의 중년인이 복면인의 검 끝을 살짝 목만을 젖혀 흘린 후 칼등으로 복면인의 검을 든 어깨를 후려쳤다. 청삼인은 흑의 복면인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 목적인 것 같았다. 청삼인의 급작스런 반격을 예측하지 못한 복면인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강한 충격에 다급히 문을 박살내며 밖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비가 오듯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흑의 복면인은 결국 던진 돌이 떨어지듯 마당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내려선 흑의 복면인을 보자마자 마당 중앙에서 여태까지의 모든 사태를 긴장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황의의 중년인이 소리쳤다. "나는 네 놈이 누군지 이미 다 안다. 그동안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옛정을 생각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실직고하면 모든 걸 불문에 부치고 용서하겠다. 내 장담한다. 황일평, 이 표두!" 방금 흑의 복면인에게 고서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남표국주 능천삼이었다. 그는 사십대 후반의 나이로, 어릴적 낙일문의 제자로 들어가 낙일도법을 익힌 후 이십대 초반에 하남표국을 세워 하남 땅에서 황룡표국과 어깨을 겨루는 제법 규모가 있는 표국을 만들었다. 그는 육척의 장신에 성품이 호탕하고 뒤끝이 없어 주변에 평판도 좋았다. "이미 내 정체를 아니까 이따위 복면은 필요 없겠지." 흑의의 복면인, 아니 황표두는 자신의 복면을 확 벗어젖혔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다. "국주님, 무림의 은원은 말이 아니라 검으로 하는 것이지요.“ 황표두는 말과 동시에 급습하듯 능국주의 심장을 자신의 검으로 찔러갔다. "기어이 내 호의를 무시하고 나를 실망시키는군." 능국주는 자신의 말이 자신의 귀에 들리기도 전에 자신의 도를 뽑아 자신의 절기인 낙일도법을 전개했다. 파-파르르릉. 주변의 공기를 찢는 도의 파공음이 울림과 동시에 한줄기 붉은 도기가 황일평의 검기를 쪼개어갔다. 퍼-퍼-퍼-엉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황일평은 몸은 휘청거리며 수십 걸음 뒤로 주르르륵 밀러났다. 잠시 후 입에서 몇 모금 선형을 꾸역꾸역 토해내더니 풀썩하고 바닥에 그대로 꼬꾸라졌다. “저 놈을 포박해 창고에 감금하라. 내일 내 친히 심문해 진상을 낱낱이 밝히리라." 국주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백의를 입은 청년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강서기 고생했네. 자네의 기지가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표물을 강탈당할 뻔 했네. 내부에 간자가 있을 거라는 자네의 예측은 정확했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아닙니다 국주님. 저보다는 국주님과 전호법께서 잘 대처하신 덕분에 다행히 목을 살짝 긁힌 것 외에는 아무 탈도 없습니다." 청년이 가볍게 국주에게 목례했다. "아니지, 황궁에서 큰일을 해도 시원찮을 자네 같이 뛰어난 인재가 고작 내 표국의 서기가 되고, 게다가 내 못난 자식의 글 선생까지 해주니 내가 복이 터진 사람이지." 능국주는 자신의 말이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라는 듯 진지한 눈빛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국주님." 청년이 다시 가볍게 능국주에게 목례를 했다. "그나저나 별채가 이렇게 다 부서졌으니 별채를 고칠 때까지 본채를 쓰시게." "배려에 감사합니다" 청년이 공손히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적의를 입은 이십대 후반의 청의를 입은 표사가 능국주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국주에게 다급한 보고를 했다. "국주님! 황표두가 쓰러질 때 독단을 깨물었는지 절명했습니다." "괴사로군, 괴사야. 어쩔 수 없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의원에게 보이고 무슨 독인지 알아보게." 능국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 * * * 본채로 쉬러 가던 강서기, 아니 강청운은 마음을 바꿔 정원 연못가에 있는 전각에 올랐다. 갈대와 부들이 무성한 수면에 잠긴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청운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내가 못내 자랑스러운 약초꾼 아버지는 산에서 귀한 약재를 캐 오시면 나부터 챙겨 먹이셨다. 물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도 잘 대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족에 대한 가장의 의무로 그런 것이라면,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혈연의 정에다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 같은 것이 더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학당의 훈장님이 나를 칭찬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을 통해 때마다 불콰하게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그리고 술기운에 쓰러져 잠이 드실 때까지 집안 식구들에게 몇 번이고 거듭 사는 맛이 난다고 중얼거렸다. 현에서 치른 세 번의 해시와 향시에서는 세 번 다 장원을 했다. 하지만 중앙에서 치른 회시와 전시에서는 나름 답안지를 완벽하게 작성했다고 자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때마다 나는 과거에서 낙방한 것보다 부모님과 스승님을 또 실망시키고 말았다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죽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약초를 캐러 산에 올랐던 아버지가 절벽에서 떨어져 돌아가셨다. 목과 가슴에는 짐승이 그랬는지 아니면 어떤 외력에 의한 것인지 도저히 구분이 안 되는 상처가 몇 군데 있었다. 나는 더 절박해졌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리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 하급관리라도 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를 끝내자마자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작년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한 번 더 과거에 응시했으나 역시 또 떨어졌다. 그때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푸르기는커녕 샛노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오월의 먼지 펄펄 날리는 관도 위에서 그만 탈진해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이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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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검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하오문의 호법사자가 되다1 22.01.22 227 7 10쪽
19 天의 사자와의 조우 22.01.19 254 4 10쪽
18 독아방에 들이닥치다3 22.01.17 256 6 8쪽
17 독아방에 들이닥치다2 22.01.15 275 6 9쪽
16 독아방에 들이닥치다1 22.01.11 290 7 10쪽
15 하오문을 찾다 22.01.07 299 6 12쪽
14 다시 강호로 22.01.04 311 8 9쪽
13 생사현관의 타통 22.01.01 328 7 11쪽
12 무위검의 탄생 21.12.29 341 5 10쪽
11 수중동굴 속에서의 각성 21.12.27 360 7 12쪽
» 첫 표행, 마지막 표행 21.12.24 352 5 19쪽
9 무림맹으로2 21.12.22 342 5 8쪽
8 무림맹으로1 21.12.20 358 5 9쪽
7 인연과 악연2 21.12.18 387 6 9쪽
6 인연과 악연1 21.12.15 406 6 11쪽
5 붓 대신 칼 +1 21.12.11 493 8 13쪽
4 우연한 나들이는 우연한 기연을 만나고 2 21.12.08 509 6 11쪽
3 우연한 나들이는 우연한 기연을 만나고1 21.12.05 514 6 9쪽
2 내 운명은 나를 모르고 21.12.03 462 7 13쪽
1 내 운명은 내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1 21.11.25 639 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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