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숲(5)
식사를 마치고 얼마 후, 일행은 레이나의 인도에 따라 마을 중앙으로 나아갔다.
뭇 요정들의 관심이 이 외부인들에게 우르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기심 많은 요정들의 시선은 세 명의 인간에게 골고루 쏠렸다.
특히 서석진의 경우 좋은 쪽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경국지색에 가까운 미모는 요정 사이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저 고운 피부 좀 봐. 이슬만 먹고 사는 걸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던 안도혁은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이슬이라. 술도 이슬이라 볼 수 있을까.’
이 마을에는 회관이 없었다. 애초에 인공적인 건물을 짓지 않는 이상, 많은 인원이 모일 자리를 실내에 만드는 것도 난해한 일이다. 아무리 성장이 비틀려서 주거 공간을 만드는 수준에 이르는 나무들이라 해도 그것까진 어려울 것이다.
머리 위가 탁 트인 공터에 가까운 곳. 잘라낸 나무 밑동을 테이블로 삼아 두 명의 요정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앉아 있던 엘프 중 한 명이 일어났다.
“여행자들이여.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레이나가 말했다.
“비텔 장로님이세요. 이쪽 마을의 관리를 도맡아 하고 계시죠.”
안도혁은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안도혁입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턴이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요정은 인간과 다르게 도시나 성의 개념이 없다. 이 숲에서 그런 걸 세우는 것도 넌센스한 일이다.
대신 그들은 숲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마을을 세워 생활하고 있고, 그중엔 마을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하는 요정들도 상당수다. 마을에는 촌장이라는 개념은 없으며 대신 나이가 제일 많거나, 가장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요정이 장로라 불리며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식이었다.
나이가 곧 지혜로움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이 어린 자는 경험이 적어 견문이 좁기 때문에, 보통 장로라는 직위는 연장자가 맡는다. 애초에 장로라는 단어 자체가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안도혁은 눈앞의 인물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로라고?’
아무리 봐도 다른 요정들과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다. 옆에 있는 레이나, 에스턴과 비교해도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노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 아니, 중년층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없었어.’
수염은 고사하고 주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당황하는 그에게 루나가 속삭였다.
“요정들은 늙지 않아요. 죽기 직전까지 젊은 외형 그대로를 유지해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불로(不老)는 인간의 염원 중 하나가 아닌가.
비텔은 웃으며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는 들었소. 병에 쓰일 약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인세에서 구할 수가 없다 보니,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대감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두 남자의 눈을 직시하며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비텔은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음. 사실 제 쪽에서는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소이다. 발기부전이야 겪는 자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탈모 쪽은 겪는 자가 거의 안 생기기 때문이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요정들의 머리를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는 일이다.
찰랑찰랑. 팔락팔락.
모든 요정들의 머리카락은 커튼처럼 부드럽고 찰랑였다. 이마가 후퇴한 사람 따윈 없었으며, 모두가 반짝이는 머릿결을 나부끼고 있다.
‘노화가 없는 종족이니 머리도 안 빠진다는 건가. 이건 너무하잖아.’
안도혁은 좌절에 빠졌다. 기껏 찾은 희망은 빛이 아니라 반딧불이였던가.
반면 서석진은 심장이 터질 듯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야?’
얼어붙었던 가슴의 응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시는 공기가 청량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비단 착각으로 치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가 도와드리기엔 견문도 적고, 관련 지식도 많지 않습니다. 약학에 관해선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탈모 관련 증세도 어쩌면 해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딱히 기대하지 않는 눈초리로 안도혁이 눈을 들었다.
“그러니, 여러분을 왕께 소개해드리면 적절할 것 같구려. 왕이라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오.”
‘왕?’
세 사람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요정의 숲은 어지간한 국가 수준으로 커다랗다. 즉, 이곳을 통치하는 자는 어지간한 국가의 왕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떤 나라든 군주를 일반인이 만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평생 가도 인사 한 마디나 주고받을 수 있기나 할까. 애초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그런데, 그런 높으신 분을 이리 간단히?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는 짐작이 가오. 다만, 우리가 왕이라 칭하는 분은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우리의 입장에선 조금 다르오. 만나 뵙기도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지요.”
안도혁은 말없이 에스턴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진 알겠는데, 이건 제 능력 부족이 아닙니다! 아무리 왕께서 그런 분이라지만, 외부인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데려가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로께서 주선하시니 가능한 거라고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에스턴. 적어도 그 눈동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추궁하다간 또 땀범벅으로 만들 것 같아 안도혁은 다시 비텔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입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대신!”
“······?”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안도혁의 머리를 훑었다. 식은땀이 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 같았다.
비텔은 얼굴에 어울리지도 않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게도 그 담배라는 걸 한 갑 줄 수 있겠소? 레이나가 얻은 걸 보니, 나 역시 관심이 생겨서 말이오.”
쿵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통수를 슬렛지 해머로 얻어맞아도 이것보다 충격이 크진 않을 것이다. 안도혁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키 큰 미녀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마 시선이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레이나의 얼굴에 구멍 한두 개 정도는 났을 것이다.
안도혁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것을 본 서석진은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옆에서 루나 역시 깔깔 웃으며 안도혁의 등을 쳤다.
“그러게, 이 기회에 끊는 건 어때요? 매일 물고 살잖아요.”
“루나, 당신은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끄응.”
농담을 한 번 더 건넸다간 뭔가 슬픈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루나는 입을 봉했다.
비텔의 시선과 마주한 안도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안도혁은 품에 있던 새 담배를 건넸다.
비텔은 코로 향을 음미하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는 풀의 향이로군. 종자가 있다면 우리 숲에서도 재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감사하오.”
“······.”
“자,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도록 할까요. 여러분들 모두 짐을 챙겨 오시는 게 좋을게요.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게 좋지 않겠소?”
모두가 그 제안을 환영했다. 어제의 피로가 반도 풀리지 않은 루나를 제외하곤.
“발에 물집 잡힌 게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루나 씨는 허약 체질이군.”
“당신들이 이상한 거야!”
애초에 지금까지의 여행도 초인 수준의 강행군에 맞추느라 루나는 몇 번이고 졸도할 뻔했다. 그나마 눈치라는 게 있기는 한 안도혁이 몇 번 그녀를 태우고 다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는 길바닥에서 다리가 퉁퉁 부은 채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도혁은 이 짐덩어리를 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돈에 너무 혹했나.’
하지만 그녀가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었다. 상식이 부족한 일행을 여기저기로 잘 이끌고 다닌 게 루나였으며, 애초에 그녀가 없었으면 지금쯤 요정의 숲에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단 동료로 맞이한 이상 당분간은 데리고 다녀야 하긴 하겠지.’
안도혁 일행이 사라지자, 비텔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손바닥만한 요정, 페어리가 있었다.
“자네는 왜 아무 말이 없었나? 소개조차 해주지 못했지 않은가.”
페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리를 꽉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혹여나 감기라도 걸린 겐가? 이거 큰일이군. 자네는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걸 그랬어.”
페어리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아, 아냐. 멀쩡해.”
“그럼 왜 그러고 있는 것인가? 말을 해 보게.”
비텔의 추궁에 페어리는 달달 떨며 말했다.
“저, 저거, 방금 저 인간, 대체 뭐야?”
등에 달린 날개를 파르르 떠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다시 한 번 읊어보마.”
캘러무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염동력이든 뭐든 다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본체로 돌아가지도 않는 녀석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거냐? 꼬리까지 잘리고?”
아르키피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지만······억울합니다. 용왕님.”
확실히 눈물이 글썽글썽한 게 억울해 보이기는 했다.
당대의 천룡왕은 턱에 가만히 손을 가져갔다.
‘그게 되나?’
그런 게 가능한 수준의 용족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주르륵 뽑아본 결과, 통계에는 열 명이 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 이렇게 깽판을 치고 다닐 만한 놈은 하나도 없는데.’
문제는 이것이 절대로 천룡족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룡족 중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작자는 캘러무스 본인 이외엔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후보가 남은 두 용족들로 좁혀지는데, 이런 상황에 잘못 말을 하다간 용족 간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다.
‘셀리 쪽은 어떻게든 될 것 같다만, 문제는 마레······.’
거친 바다에서 살아가는 해룡족은 그 큰 덩치만큼이나 성정도 난폭하다. 정확히 말하면 난폭하다기보다는, 그냥 그 성질을 죽일 생각 자체가 없다. 세 용족 중 가장 야성적이고, 가장 무례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강하다.
‘그것들을 통솔하는 마레가 정말 대단한 거지.’
전투력으로 보나 뭘로 보나 해룡족일 가능성이 너무 컸다. 애초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만한 건 해룡 정도밖에 없으니까.
“일단 확실하게 해 두자. 첫 번째, 너는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용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너는 그저 네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을 뿐인데, 아무 접점 없는 놈이 무단으로 침범해 폭력을 행사했다. 세 번째, 녀석은 너에게 아무런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에 거짓은 없겠지.”
“예, 맞습니다! 거짓이 없음을 용신께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골치 아픈 상황은 아니지만, 귀찮은 일이 벌어졌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일을 수습해주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기도 하다.
캘러무스는 입을 열었다.
“우선 너는 몸을 고치는 데에만 전념해라. 재생실도 무료로 이용하게 해 주마.”
“가, 감사합니다.”
아르키피라를 보내고,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는 천룡왕의 머리는 복잡했다.
‘일단 일이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수정구를 꺼낸 그는 곧장 통신을 연결했다.
“나다. 지금 당장 마레 쪽으로 연락을 취해라. 셀리에게는 내가 직접 가도록 하겠다.”
수정구 건너편에서 뭔가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더니, 부스스한 얼굴이 홀로그램화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얼굴이다.
캘러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책상 정리 좀 하고 살라고 했지.”
-정리했습니다. 손이 미끄러진 겁니다.
몹시 당당함을 드러내듯 가슴을 쭉 펴는 상대의 모습에 캘러무스는 혀를 찼다.
“쯧, 어쩄든 방금 한 말은 들었겠지. 진행해라.”
상대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용왕님. 혹시 잊으셨습니까? 마레아도스 님은 저번 회의 이후 계속 수면 중이십니다.
캘러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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