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만남(4)
정황만 따지면 병사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망원경으로 한참 전에 사냥감을 발견하고, 어떻게 몰아야 하나 상의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도혁의 입장에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럴 거면 미리 사전 통보라도 해 놓던가.
"아, 어서 내놓으시오!"
"헛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길 권합니다."
이쯤 되면 오기로라도 넘겨줄 수 없었다. 안도혁은 발버둥치는 멧돼지를 퍽 쳐서 기절시킨 후, 어깨에 메고 휘적휘적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수레에 사냥감을 신경질적으로 던지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철컥
날카로운 금속성이 안도혁의 귓가를 찔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두 병사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네 이놈! 이곳은 아레스틴 전하가 사냥터로 삼으신 곳이다. 당장 물러나지 못할까!"
안도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분위기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백기를 든다면 저 총구가 그들을 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안도혁은 본디 폭력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다. 겉모습만 보면 그게 뭔 소리냐고 말할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원래 덩치 큰 개가 더 안 짖는 법이다.
불행히도 오늘은 덩치 큰 개가 짖는 날이었다.
"뒈지고 싶으신 모양인데."
안도혁은 병사들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시커먼 총구가 그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병사들은 당황했다. 총을 앞에 두고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 선배님.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더 다가오면 무릎이나 팔이라도 쏴 버려!'
정말 쏴야 하는 것인가. 병사들은 총구를 조준하며 긴장의 끈을 힘껏 움켜잡았다.
이상한 것이 있었다. 총구에 겨눠지는 저 남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동료로 보이는 뒤의 두 사람이 아무런 긴장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가 총에 맞아도 좋단 건가?'
하지만 정신을 팔 겨를은 없었다. 이미 저 커다란 남자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일단 쏘기로 생각한 이상 다른 생각은 사치였다. 병사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하늘을 때리는 두 발의 총성과 함께 화약 냄새가 피어올랐다.
아무리 힘이 세도 이걸로 끝이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게 정석인데.
"어?"
"뭐지?"
병사들은 순간 자신들이 총을 발사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착각에 휩싸였다. 눈앞의 남자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안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앞으로 내어 보인 주먹을 펼치자, 두 발의 탄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거 아냐? 발사된 총알은 엄청나게 뜨겁다고."
투둑
바닥에 떨어진 총알들을 보자, 병사들은 입을 쩍 벌렸다.
'망했다.'
'초, 초인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총을 상대할 수 없다. 노력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화가 난 초인을 앞에 둔 병사들은 몸을 덮어오는 오한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자. 사람한테 총을 쐈으니 대가를 치르셔야겠지."
벼락처럼 울리는 총성에 병사들은 급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총은 어지간하면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사냥감이 도망간다구."
레틴은 다른 사람들보다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지금 보이는 현장은 그의 상식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철퍼덕
"우웨에엑."
"커억."
토악질과 함께 두 병사가 눈물을 쏟아냈다.
안도혁은 인간 저글링을 오랜만에 개방했다.
그리고, 봐주지 않았다. 두 병사는 공이 되어 하늘을 수십 바퀴나 돌았다.
두 사람이 적당히 토했다 싶은 기분이 들자, 안도혁은 다시 그들의 뒷목을 잡아챘다.
'벌'이 이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닌가 싶었던 병사들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악마가 속삭였다.
"교육이 아직 부족하지? 한 번 더 갔다 와라."
천국으로 말이야.
다시금 두 병사는 빙글빙글 돌며 하늘을 날았다. 돈 주고도 못 볼 진풍경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받고, 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다시 땅으로 내려온 그들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와 체액이 섞인 액체를 쏟아내는 모습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잠시 그들을 빤히 지켜보던 안도혁은 잡은 멱살을 풀었다.
"이거면 반성이 됐겠지."
에스턴과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 총을 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절할지도 모른다. 안도혁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병신이 되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문득 아까 전에 병사 중 하나가 한 말을 상기했다.
'잠깐, 누구 부하라고 했지?'
잠시 머릿속을 뒤져보던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억나 버렸다.
"아, 큰일났다."
깨달음은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철컥 철컥
"꼼짝 마라!"
"무릎을 꿇어라!"
사방에서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나타난 스무 명에 가까운 인원이 그들에게 총과 화살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들 침착할 수 있을까.
에스턴은 자신이 다한증 환자라는 것을 증명하듯 땀을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길 바라는 건 사치일까.
안도혁은 이를 으득 갈았다.
"많이도 튀어나왔군. 이게 전부냐?"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은 쌍방과실에 가까웠다. 두 명이 반병신이 되어 자빠져 있지만, 그들이 먼저 총을 쐈으니까.
물론 세상 이치라는 게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치는 돈과 권력을 잡은 자가 뜻하는 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 있다. 아주 간혹 가다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안도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가가 살심으로 번들거렸다.
'다 죽여 버릴까.'
막 몸을 날리려던 찰나,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칫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자비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돌발 상황에 그의 뇌는 약간의 이성을 되찾았고, 조금 더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쟤들은 어떡하지?'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료들이 보인다.
적의 무기는 당연하게도 안도혁 혼자에게만 겨누어져 있지는 않았다. 한패 쪽도 견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난처하게 됐군.'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자신은 차고 넘쳤다. 이보다 백 배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멀쩡히 생환했다.
그러나 두 명이라는 인원을 지키며 탈출하는 것은 경우가 많이 다르다.
안도혁은 자신이 없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으라니 어쩌라니 하며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그딴 헛소리는 들어줄 생각부터 없었다.
'그럼······.'
머릿속으로 약간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때였다.
"멈춰라!"
호령과 함께 병사들을 헤치고 한 남자가 다가왔다.
뒤로 벗어 넘긴 금발에 수염을 멋지게 기른 미남이었다. 외지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옷가지 군데군데가 더럽혀져 있었으나, 그 모습에서도 바라지 않는 기품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무리의 대장격인 인물이리라.
"아레스틴 그라티아 타란토스라 하오."
"······안도혁입니다."
레틴이 말했다.
"부하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실 수 없겠소? 내가 대신 사과드리겠소이다."
병사들은 주인의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이든, 전력이든 이쪽이 우위다. 그런데 동료에게 상해를 입힌 자에게 먼저 사과를 청하다니?
그 때, 간신히 땅에서 일어난 '교육받은 병사'들이 웅얼거렸다.
"위험, 위험합니다."
"피하십시오. 황자님······."
레틴은 떨리는 입술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맹수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파악이 끝난 상황이다.
'호랑이 아가리 속에 있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모르지.'
마음만 먹는다면 앗 하는 순간에 자신의 머리통을 몸과 작별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맨손으로.
안도혁이 입을 열려던 찰나, 루나가 황급히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제, 제 4황자님을 뵙습니다!"
이래봬도 명가의 자손이다. 상류층에서 알아야 할 교양 정도는 당연히 머릿속에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안도혁은 상대를 더욱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자라고.'
생각해보니 아까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듣는 체 마는 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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