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실험적인 중,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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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말이
작품등록일 :
2014.08.31 13:32
최근연재일 :
2022.01.2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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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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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자문자답의 일그러짐(4)

DUMMY

대충 11시 반이었다. 시계의 초침이 뚜렷하고 날카롭게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냉정한 마음이 되어 눈앞의 미남에게 시선을 보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외로 서글픈 이야기가, 그럼에도 미소만은 장난스러운 밀 비안모르제가.

“끝이라고?”

“예, 끝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려고 내 집에 찾아왔단 거지?”

“맞아요.”

밀은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해왔다. 나는 그 모습을 삐딱하게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베개로 밀의 면상을 후려쳤다.

“아얏! 왜 또 때려요!”

“너, 좀, 짜증나.”

“뭐가요?”

“그냥 귀찮고 지겹고 화나고 눈부셔서 맘에 안 들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이쪽이다, 이 뻔뻔한 이계인아. 네 녀석이 아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테오딤인지 뭔지 하는 데에서 왔다지만 충분히 눈에 그려지듯 선명한 이야기였단 말이야. 하지만 연애상담을 하러 차원을 넘나드는 건 좀 아니지 않니?

나는 천천히 마음이 식어갔다. 그것은 비단 이 뚱딴지같은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국 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버린 까닭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좋지 않은 추억이 떠올라버렸다.

“그래서 너는 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건데?”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다는 투로 내가 그렇게 묻자 밀은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지난 3년 동안 아이민을 찾아다녔습니다.”

“근데?”

“제 모든 잠재력을 끌어 모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는 그녀를 찾아낼 수 없다고.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느낀 운명과도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라고! 나보고 찾아달라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밀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난 조금 답답한 기분이 되었다. 이상했다. 마음속에서 뭔가 차갑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일은 분명 잊었을 텐데. 설령 다시 떠올린다 해도 아무렇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저는 수하 씨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어요. 이름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딴 건 알아서 뭐에 써먹으려고. 왜, 테오딤에 내 이름으로 된 은행계좌라도 만들 생각이야?”

“아뇨,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저는 먹고 살만 하거든요.”

“그러면 왜?”

“제가 여기에 온 건 수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예요.”

“내 이야기?”

“수하 씨가 3년 전에 겪은 이별 이야기.”

“…….”

정말 너무하는군. 오늘은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평화로운 내 집에 다짜고짜 정신 나간 놈이 쳐들어오더니 연애상담을 해달란다. 게다가 이 정신 나간 놈은 날 스토킹까지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건데.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면서.”

“제가 아는 건 결국 수하 씨와 그 주위에 일어난 현상뿐이에요. 수하 씨가 감추고 있는 마음을 알기 위해선 직접 본인의 입으로 듣는 수밖에 없어요. 과연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포장하고 있을까요.”

“…진짜 기분 나쁜 놈이네.”

밀 비안모르제는 정말 기분 나쁘게 웃었다.

“전 당신에게서 답을 얻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나는 계산해야 했다. 지금 내 평화는 산산조각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잘만 하면 다시 원상복귀 시킬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여기서 갑은 내가 아니라 저 밀 비안모르제잖아? 결국 답은 나왔다.


하아, 좋아. 들려주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별 이야기를 해주겠어. 나는 답인지 뭔지 하는 것엔 관심 없어. 이 이야기가 끝나면 얼른 너네 세계로 가버려.

때는 3년 전 내가 막 21살이 되었을 무렵이었지. 음, 너하고 난 나이가 같은 것 같은데. 우연 치고는 고약한걸. 어쨌든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 때부터 쭈욱 이어오던 재미없는 캠퍼스 생활을 하고 있던 참이었지. 딱 보기에도 그렇잖아. 나는 친구가 없는 놈이거든. 아, 그러니까 날라리는 아니래도.

예전부터 난 좀 그랬어. 타인에게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결국 사람은 늘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존재야. 사람은 이기적이고 난 그래서 아무도 믿지 못했어.

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했지? 우연인지, 아니면 네가 일부러 그런 사람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불통으로 만들어버린 이 휴대폰, 내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업에서 나온 거야. 나도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도록 할까. 어쨌든 상당한 부자라는 것만 알아둬. 아니, 이미 알고 있으려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사람을 아주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결국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생각부터 먼저 하거든. 너도 그렇잖아. 넌 그 아이민이라는 여자의 입장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해봤어? 결국 네가 일방적으로 찾고 싶어서 찾아다니는 거 아니야?

뭘 그렇게 또 울상을 지어? 너만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니까. 사람이란 것들은 다 그래.

맞아. 결국 나도 사람이지. 난 정말 이기적이고 차갑게 식어버린 사람이야. 게다가 보통 사람보다도 더 질이 안 좋다고 할 수 있지. 돈 많은 집에 태어났고 머리도 좋았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날 사랑한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지. 정말 완벽한 인생이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추한 마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그리 고상한 게 아니야.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하고 중대한 결점뿐이지. 그 결점을 끌어안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이해해야만 이기적인 모습으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너무나 완전한 사람이었어. 부족함을 모르면서도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선량하고 기특하게 내게 주어진 행복을 누렸지. 과연 이런 인간이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완벽했어.

그래, 있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지. 나 역시 이기적인 존재였고 그것을 눈치 챈 건 얼마가지 않아서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했어. 왜 나처럼 완벽한 존재가 있어야만 하지. 이렇게나 추하고 나약한 본성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분명 결점이 있어야 하는 거야.

솔직히 난 내 결점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어. 자화자찬이 아니야. 정말 그랬던 거야.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었는데도 그랬던 거야. 그래서 난 일그러지기로 마음먹었지. 결점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끌어안기로 했어.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을까. 그렇게나 선량했던 나는 차갑게 식어버렸어.

으음, 왜 이야기가 이리로 샜지. 야, 다른 데로 새면 샌다고 말을 해주라고. 재밌긴 뭐가 재밌어? 난 하나도 재미없어. 오히려 기분만 더 우울해졌어.

어쨌든 그런 이유로 마지막까지 매달리던 친구들마저 다 버린 나였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냥 아무 지방대에 원서를 내버렸지. 가족들은 날 말릴 수 없었어. 날 건드리면 목을 메달아 자살해버리겠다고 했거든. 왜, 이제야 좀 내가 무서워졌냐?

그때 난 만족했지. 그렇게나 비뚤어진 사람이 된 거야. 그제서 완벽했던 내 자신에 흠집을 만들 수 있었어. 여전히 이기적인 나였지만 그래도 안심한다면 그걸로 족했어. 중대한 고민 하나를 없앴다, 그렇게 생각했지.

대학교에 입학하고 1년 동안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지냈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은 있어가지고 몇 차례 날파리가 꼬이긴 했지만 그냥 다 무시했지. 시간이 지나자 누구도 날 이해하려 들지 않던걸. 심지어 집에서 오는 연락마저 뜸해졌어. 다 잘 된 거야. 난 역시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 과정을 거쳐 2학년이 됐어. 여전히 혼자 지냈고 그 생활에 만족했어. 뭐, 별로 즐겁지는 않았지만 상관없었지. 그럼 지금부터 진짜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자. 다시 말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건 2학년이 되고 봄이 점점 무르익을 무렵이야.

내가 다닌 대학교에는 도서관이 하나 있었어. 낡고 어둠침침한 건물이었는데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아 조용한 곳이었지. 유난히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었거든. 난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혼자 지내면서 꽤 우울했어. 그런 침울한 감정이 극으로 치달을 때면 도서관에 종종 가곤 했지. 책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해야 하나, 넌 아마 이해 못할 거야.

나는 착실한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교수들이 내준 과제에 얽매이지 않았어. 그러다 보니 시간이 꽤 남으면 여지없이 도서관에 찾아갔지. 아, 그러니까 날라리 아니래도? 그래, 도서관에 붙어살면서 껌 좀 씹었다, 됐냐?

늘 그랬던 것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 아마도 점심을 먹은 직후였을까, 나른함을 참고 책장에 몸을 기대고 서있던 중이었지. 아마도 서서 깜빡 졸았을 거야. 몸이 뒤뚱 기울어질 정도로 춘곤증에 시달리던 나였어.

그러던 중에 나타난 거지. 내게 이별을 안겨줄 여자가.

“너, 그거 급해?”

나는 한참 졸다가 깼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그러자 어떤 작은 손이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덥석 쥐는 게 아니겠어.

“너, 이거 지금 당장 읽어야 할 정도로 급하냐구.”

귀엽다면 귀엽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내가 듣기엔 꽤 날카로운 목소리였지. 거의 1년 가까이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고 불쾌하기도 했어. 일단 대답하지 않고 뒤로 살짝 물러났지.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내 눈앞에는 단발머리에 뿔테안경을 쓴 여자가 눈을 치켜뜨고 있었지. 나보다 조금 키가 작았는데도 그것을 메워버릴 박력이 있는 여자였어.

“지금 확실히 해줄래? 넌 그 책을 졸면서 읽을 정도로 느긋한 거야, 아니면 졸면서라도 읽을 정도로 급하게 읽는 거야?”

“…….”

“대답을 안 하네. 어쩐지 말 없는 애 같더라니.”

뜬금없이 나타난 여자는 안경을 고쳐 쓰고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어. 감히 날 애 취급 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게 거슬렸는데 아예 본격적으로 애 취급 하려는 모양새였지.

“너, 올해 2학년이지? 작년부터 이 도서관에 드나드는 걸 봤으니까 아마 틀림없을 거야. 그렇지? 이 누나가 지금 그 책이 어어엄청 필요하거든? 만약 지금 당장 읽을 필요가 없으면 나한테 양보해주지 않을래? 그거 여기에 한 권밖에 없는 책이란 말이야.”

선배도 아니고 누나라니, 닭살이 확 돋고 말았어. 난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이 누나라는 여자는 날 꽤 관심 있게 봐왔던 모양이었어. 말투도 좀 짜증나고 귀찮기도 해서 난 그냥 얼른 들고 있던 책을 넘겨주고 말았지. 뭐, 시간 때운다고 읽고 있었으니 줘도 괜찮았어. 그냥 평범한 동화책이었거든.

“너라면 양보해 줄줄 알았어. 고마워!”

난 도망치듯 도서관을 빠져나왔어.

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 때문에 약간 화가 났지만 뭐, 어차피 다시 만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나한테 말을 건 것도 그냥 우연히 그 사람이 필요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테니까. 다음 날부터 모른 척 하면 그만이었지.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은 거야.

“안녕. 미안한데, 나 그 책 지금 엄청 필요한데 양보해주지 않을래?”

“…….”

“아, 오늘도 만났네? 저런, 또 나한테 필요한 책을 먼저 읽고 있구나. 혹시 급하지 않으면 양보해줄 수 있겠어?”

“…….”

“독서 청년! 그것 좀 나한테 양보해줘!”

“…….”

한 번 그러고 말 줄 알았더니 그 누나라는 작자는 매일 반복해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뺐어갔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 생긴 건 꼭 애호박에 깨 박아 놓은 것처럼 못났으면서 이상하게 내 독서에 찬물을 끼얹었단 말이야.

아아, 정말 평화로운 일상이었는데, 우울하고 외로운 것만 빼면 꽤 괜찮은 생활이었는데. 나름 만족하고 있던 생활 패턴이 겨우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그 여자, 정말 끈질기게 도서관에 다니더라고.

“어이! 독서에 미친 후배! 오늘도 나한테 양보할 책을 읽고 있니?”

“…….”

혹시나 그만두지 않을까, 혹시나 이건 우연의 과도한 일치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주일 넘게 참고 도서관에 다녔단 말이야. 그런데, 아아, 정말 못할 짓이었어. 결국 난 화를 내고야 말았지.

“…이제 그만하시죠.”

어때, 무섭지. 뭐? 별로야? 보통 내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질려버리거든. 그런데 그 여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아닌 사람도 있긴 하나보네. 그래, 그 여자도 너처럼 좀 정신이 이상했나봐. 오히려 깔깔거리면서 웃어버리더라고.

“도대체 얼마나 반응이 느리면 이렇게나 오래 걸리니? 싫었으면 진즉 말하지.”

속에서 열이 확 올라오는 게 아니겠어.

“알았으면 앞으로 말 좀 걸지 마시죠! 당신처럼 헤프게 웃음 팔며 대화하는 여자,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더럽습니다!”

알아, 나도 안다고. 분명 심한 말이긴 했어. 하지만 어쩌겠어. 나라는 사람은 집적대는 녀석을 물리치는 일에 도가 터버렸단 말이야. 심해? 당연히 심해야지. 심지어 나는 더 정도가 심한 말까지 장전하고 있었다고. 그런 사람 있잖아. 아무리 험담을 들어도 꿈쩍도 안할 것 같은 사람 말이야. 그 여자가 왠지 그런 류의 사람일 거라 생각한 거지.

아하하, 근데 울어버리데. 그렇게나 잘 웃던 주제에 울어버리데.

“헤프지 않아!”

여자가 던진 책에 맞아본 건 그게 처음이었어.

그렇게 집에 돌아갔는데 그날은 통 잠이 안 오는 거야. 침대에 누웠다가도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서 벌떡 일어나버렸지.

아니, 사람 귀찮게 한 건 그쪽이 먼저였으면서 왜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건데? 고작 그런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어쩌라는 거야? 응? 나는 오히려 그것을 상회하는 정신적 피해를 입었는데.

짜증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이 속에서 울컥울컥 솟아나서 사람 돌겠는 거야. 눈물범벅이 된 그 못난 얼굴이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뭐, 결국 그렇고 그런 얘기였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난 아마 그날 그 여자에게 반해버린 걸지도 몰라. 야, 솔직히 너만큼은 아니거든.

마침 주말이 와서 좀 쉬고 다시 대학교에 있는 도서관에 갔지. 왠지 모를 묘한 기분으로 그 여자가 왔는지 확인했는데, 아, 오긴 왔어. 언젠가 읽다 만 소설을 꺼내들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그 동태를 살폈지.

다시 봐도 못난 얼굴이다, 그런 감상이 들었어. 딱 보니까 남자친구도 없어 보이던데. 옷 입은 것도 촌스럽고 특히 안경 너머로 빛을 형형히 뿜어내는 그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어. 절대 다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래, 그런 거야. 그때 나는 의식하고 있었던 거지. 외로움에 사무치면서까지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나였는데. 하아, 결국 철옹성은 아니었던 거지. 겨우 일주일 조금 넘게 밀어붙이면 그렇게 허물어져버릴 벽이었어.

운명? 글쎄, 만약 그런 게 있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거기 테오딤이라는 곳은 어쩐지 몰라도 여기 지구에서는 확실히 그럴 거야. 그저 지나간 과거에 대한 변명으로나 쓰이면 딱일 말이지. ‘그건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뭐, 그런 식으로. 난 별로 그렇게까지 변명하고 싶지 않아.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아, 그 여자의 동태를 살폈다는 얘기였지. 나한테 심한 말을 듣고 눈물을 쏟으며 뛰어갔던 주제에 잘도 내가 있는 곳을 힐끔거리데. 뭐, 나도 힐끔거리고 있었으니 피차일반이었지만 말이야. 만약 그 미묘한 대치가 끝끝내 계속되었으면 아마 거기까지만 관심을 가지고 말았을지도 몰라.

꽤 살폈는데 별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단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담? 완전히 시간낭비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들고 있던 책에 집중하기로 했지.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어. 나, 꽤 독서를 좋아했거든. 독서 청년이라 불려도 딱히 할 말은 없었어.

읽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어. 괜찮은 소설이라서 재밌게 읽었지. 역시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던데. 아마 너는 그런 기분 모를 거야. 너네 세계로 돌아가면 책이나 좀 읽어라.

시간은 흘러서 내가 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에는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어. 아아, 정말 시간 한 번 제대로 때운 날이었지. 강의야 몇 번 빠진다고 큰일 날 것도 없고 말이야. 정말 큰일은 그 여자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어온 일일 거야.

“다 읽었니?”

“…그렇습니다만. 아직 내게 볼일이 남았습니까? 끈질긴 사람이네요. 자존심도 없나.”

저절로 날카롭게 벼려진 말투가 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여자는 저번처럼 울거나 하지 않았지. 그저 평소처럼 박력 있고 활기 넘치게 말을 이었어.

“오늘도 마침 그 책이 필요했거든. 그때는 읽기도 전에 뺏어가니까 엄청 화냈잖아. 그래서 이번엔 네가 먼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린 거야.”

뺏어간다는 자각은 있었던 건가, 난 할 말을 잃고 말았어. 이 비뚤어진 일관성은 뭐란 말인가, 나는 다시 화를 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지. 역시 아무리 험담을 들어도 기죽지 않는 여자였던 거야.

“도대체 이런 책을 어디에 쓸 생각입니까?”

내가 졌다, 내가 졌어. 결국 일상적인 물음을 하고 말았어. 대화가 성립된 거지. 그러자 그 여자가 아주 기쁜 듯이 활짝 웃는 게 아니겠어.

“드디어 물어봐주는구나! 그 말만 기다렸다구!”

지금까지 여러 웃는 얼굴에 침을 뱉어온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어. 그 못난 미소를 보며 마주 웃지 않으려 애쓰는 게 고작이었지. 아니, 뭐, 웃는 얼굴은 그 나름대로 볼만은 하데.

“그럼 통성명부터 할까? 나는 간호학과 3학년 주서민! 너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름이 기네. 줄여서 별로라고 불러도 될까? 어때, 별로 군?”

“…2학년 강수하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서민 누나는 만나게 되었지.

하아, 그럼 이제 대강 결말로 가자. 싫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이 정도만 얘기해도 그 여자가 얼마나 사람 귀찮게 하는 성격인지 알았을 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식어있는 사람인지도 말이야.

나와 서민 누나는 순조롭게 만나서 그만큼이나 순조롭게 사귀게 되었어. 쉽게 말하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연 거지. 두드려서 열리지 않을 문은 아니라고 할까나. 나는 그런 사람인 거야. 너? 겨우 그 정도 두드려서 내가 쉽게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냐? 정말 너 때문에 잠도 못자고 이게 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짊어지기로 마음먹은 결점은 그리 대단하진 않았어. 그저 자신에게 연결된 수많은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고 홀로 외롭게 사는 일이었지. 완벽한 사람은 고독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서민 누나와 만나고 있었지만 난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결점을 버리지 않았어. 오직 그 한사람만 받아들였을 뿐 다른 이들은 절대 사절이었지. 여자 친구의 지인이든, 가족이든, 누구에게든 그랬어. 차갑게 대했고 또 심하게 얘기했지. 그냥 뭐, 그렇더라고. 서민 누나와 같이 끈질기게 나와 친해지려 했던 사람은 없었어. 금세 나와 관계되는 걸 포기하고 외면했어.

서민 누나는 어떻게든 날 다독거리며 세상과 연결시키려 노력했어. 하지만 세상은 그 여자처럼 내게 밀어붙여주질 않아. 게다가 내겐 그렇게 하고픈 의지도 없었어. 도중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할 인연이었지.

나도 지치고, 그 여자도 지쳐버린 거야.

아마 사귄지 6개월 조금 넘었을 때였을까. 오늘처럼 가을장마가 한창인 날이었지. 내가 자취하는 집 앞에 서민 누나가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있었어. 헤프지 않은, 오직 나에게만 지어주던 그 친밀한 웃음을 띠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미안, 수하야. 난 결국 널 받아들인 채로 끝까지 갈 수는 없는 것 같아.”

“별로 사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난 누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조차 없었는걸.”

왜 나의 말은 그런 식으로 차갑게 나와 버렸던 걸까. 끝까지 갈 수 없더라도 행복했었다고. 어쨌든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건 당신뿐이었다고. 그렇게 얘기해주면 좋았을 텐데.

“미안, 미안해…….”

“그럼 잘 가요.”

나와 그 여자는 그렇게 헤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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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 꼬리 무는 회귀(1) 16.04.14 24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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