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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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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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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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5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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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탑 (5)

DUMMY

나리아는 자신이 이들에게 기이한 악몽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더는 사람의 꼴을 갖출 수 없는 자들에게 자신의 몸은 영원히 잃어버린 평안과 같다. 나리아를 마주한 순간, 저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나리아가 인간이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다. 나리아는 후자가 더 편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방호복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동안, 나리아는 울부짖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육삼의 얼굴, 불투명한 유리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들은 삶을 지키고자 할 뿐이다. 자아를 붕괴시키려는 괴물을 불태워 구역을 순정하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나리아는 입술을 깨문 채 육삼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으로 육삼을, 나아가 이곳의 생명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육삼은 나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것이 죄책감 때문인지, 나리아를 단념하기로 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리아는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이미 숱한 공포를 겪어보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공포, 거대 허수를 눈앞에 둔 공포, 전쟁의 한 단면을 엿본 공포. 그런 나리아에게 자신의 목숨을 잃는 공포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저를 죽인다고, 당신들의 병이 나을 것 같나요?”


나리아는 방호복에 매달린 채 뒤따르는 육삼을 노려보았다.


“병자만이 가득한 곳이라면, 건강한 사람의 삶을 탐내는 법이다.”

“이기적인 생각이에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임을, 너는 이해해야 한다.”

“옛날이야기에, 어둠에서 태어난 짐승이 태양을 갖고 싶어 삼키려다가 타죽었단 내용이 있죠.”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하려는 행위는 짐승의 행위에요. 모든 인간은 아직 어둠이죠. 불을 피우고 땅을 일굴 것인지, 짐승이 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에요.”

“어쩌라는 것이냐.”


육삼이 나리아의 얼굴에 유리창을 들이밀면서 속삭였다. 자그마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험악했다. 나리아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우리가 괴물됨을 받아들인다면 옷을 벗어 확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탑은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 도시가 무너진단 말이다. 너는 자신을 직시하라고 우리에게 말할 셈이냐. 그것이 도시의 파멸을 불러올진대, 감히 그러라고 말할 수 있겠냔 말이다.”

“······.”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제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하려 한다 해도 육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도시를 위해서라면 이들은 이대로 살아야 했다. 나리아는 그 또한 옳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람은 도시의 부속품이다. 도시의 완전성은 인간을 소비하며 이루어진다. 도시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괴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나리아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이들의 유폐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나리아는 이들을 위해 죽는 것이 단순한 미봉책임을 안다. 그러므로 부정해야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나,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황제에게 대적하기로 한 순간부터 나리아의 방향성은 확고했다.


부정해야 한다.


나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언뜻 올려다본 탑의 최정상은 자그맣게 흔들렸다. 희미하게 쇠가 갈리는 소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걷는 방호복들은 나무를 옮기고 있었다. 나리아를 불태울 속셈이었다. 사람을 착란 시키는 괴물을 불태워 이들은 정화를 기도할 것이다. 도시를 데우는 3구역다운 발상이었다.


“육삼, 제가 불 속에서 살아나온다면, 받아들이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나리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지금 꺼내려는 말은 자신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제가 당신들의 왕이라는 것을요.”


육삼은 나리아를 보고 침묵했다. 넋이 나가 내지르는 말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단말마처럼 내지르는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떤 순정함마저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리아로서는 이들을 보듬으며 대표자로서 단죄에 앞장서는 역할을, 왕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표현할 길을 몰랐다.


“당신들에게는 죄가 없어요. 죄가 있다면 오직 이 도시에게만 있을 뿐이죠.”

“······멍청한 소리.”


육삼은 간신히 쥐어짜듯 그 말만을 내뱉었다. 그러나 나리아의 목소리에는 모든 것을 내맡기고 도망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몸을 지닌 자의 힘일지도 모른다.


육삼은 나리아와 대화를 피했다. 애꿎은 인부들을 재촉해 장작을 옮겼다. 탑의 외곽, 유달리 붉은 빛이 쏟아지는 광장에서 나리아를 불태우기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내뱉은 말이었지만 나리아는 그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러고 싶을 뿐이라는 소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는 이곳에 없었다. 3구역에 속하지 않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것을 나리아가 말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장작이 되는 게 아니겠죠.’


나리아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헌진은 여전히 도시를 위한 싸움을 믿고 있다. 그렇다면 나리아도 믿어야 했다.


‘대신 싸워줄 사람인 거예요.’


나리아는 욕망했다. 흩어졌던 움직이는 대장간이 허공에 맴돌았다.





탑의 최정상이라는 좁은 장소는 헌진에게 유리한 전장이 아니었다. 반걸음 이내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린첸을 상대로 거리조절이 중요한 요소였는데, 벽에 몰리기 일쑤인 이곳에서는 취할 수 없는 점이었다.


그러나 헌진은 수비에 급급하면서도 자신이 불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린첸은 기세 좋게 헌진을 몰아붙였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공격이 거셀수록 그녀의 몸은 빠르게 붕괴하였다. 녹아내린 팔이 간신히 칼을 쥔 채 기묘한 궤도를 타고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런 몸으로도 싸울 수 있다는 점은 의외성을 부여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후우······.”


린첸의 끊임없는 공격이 간신히 멈추었다.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피주머니를 입안에 털었다. 그러나 진작에 텅 빈 주머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린첸의 어깨가 흘러내릴 듯이 주저앉았다.


“멈춰라, 린첸. 이건 해결방안이 아니다.”

“알아요, 헌진? 저는 해결방안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한 시간이라도 더, 하루라도 더, 이 탑을 유지하는 것만을 바랐어요. 탑을 지키라는 것만이 명령이니까요.”


린첸은 칼날에 맺힌 헌진의 피를 핥았다. 신선한 기사의 피에 린첸이 몸을 다잡았다. 그러나 효과는 길지 않았다. 린첸의 몸은 붕괴를 향해 가속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더, 하루만이라도 더······.”


린첸이 헌진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날카롭지 않았다. 헌진은 가뿐하게 칼을 쳐냈다. 린첸의 몸은 빈틈투성이였다. 그녀의 옆구리로 꽂히는 주먹은 당연한 순서였다.


주먹을 꽂은 순간, 린첸의 몸이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헌진은 아차 싶었다. 린첸의 몸이 날아간 방향은 피의 저장고였다.


린첸이 휘장 너머 벽에 부딪히자 흙먼지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헌진은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얼마 남지 않은 피 웅덩이를 게걸스럽게 마시고 있었다.


‘2차전이로군.’


헌진은 담담하게 칼을 겨누었다. 아직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도시를 위해 칼을 휘두를 대상으로 린첸이 적합한지 헌진은 확신하지 못했다.


‘나리아였다면 말렸을 테지.’


헌진은 문득 탑에 들어오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가늠해보았다. 독기로 가득 찬 탑은 헌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코끝이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시큰거렸고 또렷하지 않은 머릿속은 시간의 흐름을 정렬하지 못했다.


‘나리아?’


그 순간 헌진은 바깥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바깥의 소란은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헌진이 지켜본 탑 아랫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소란을 일으킬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바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헌진은 그럴 만한 원인은 단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이런 제기랄.’


헌진은 이를 갈았다. 이제까지 없던 위기감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렸다.


‘독이 아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헌진!’


헌진은 스스로 꾸짖으며 창문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그 앞에는 이미 린첸이 서 있었다.


린첸의 온몸은 피로 물들어있었다. 기사의 피를 뒤집어쓴 그 모습은 마치 방호복을 두른 듯이 보였다. 그 안에서 린첸의 몸은 온전했다.


“싸움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릴 셈인가요.”

“비켜라, 린첸.”


헌진은 초조하게 칼을 세웠다. 린첸은 돌변한 헌진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이 당신과 저의 결투보다 중요한가요?”

“어리석은 소리.”


헌진이 톱니칼을 가동했다. 좁은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벽에 매달린 각종 계기판과 바닥에 눌어붙은 살덩이들이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 들썩였다.


그에 맞춰 린첸도 쌍검을 가볍게 교차시켰다. 칼날이 불꽃을 일으키며 진동했다. 헌진의 것과는 다른 초진동이 린첸의 칼날을 감쌌다. 지금껏 수많은 짐승의 몸을 갈랐고, 철혈보다 단단한 가죽을 찢었다. 국소부위를 파괴하는 데에는 헌진의 톱니칼에도 뒤지지 않는 칼날이었다.


린첸은 자신이 있었다. 일시적인 효과라도 좋다. 기사의 피로 몸의 안팎을 적신 지금, 몸은 대원정 시절에 한없이 가깝다. 노쇠한 헌진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다. 쓰러트린 뒤에, 그는 새로운 공급원이 되어 이 탑을 유지할 연료가 될 것이다. 린첸은 파괴할 헌진의 내장을 가늠했다.


“탑을 위해, 저에게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헌진은 폭풍의 중심에서 린첸을 노려보았다.


“나에게는 그 아이가 이 탑보다 중요하다.”

“아이?”


린첸의 의문은 짧았다. 헌진이 칼을 치켜들었다. 그가 선공에 나서는 것은 드문 일이다. 린첸은 자세를 취하고 공수를 겸하는 궤적을 떠올렸다.


그러나 헌진은 린첸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톱니칼은 탑의 바닥을 그었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가자 낡은 탑의 머리는 산산이 박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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