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4,887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8.03 23:57
조회
30
추천
2
글자
11쪽

114. 언령 (2)

DUMMY

“이 도시를 관리하라고 했소?”

“제가 이놈이랑 말입니까?”


베니와 재형이 거의 동시에 반문했다. 두 사람은 말을 하자마자 서로를 노려보았다. 베니가 적의를 담은 눈을 재형에게 고정한 채 헌진을 향해 말했다.


“헌진 경, 이놈은 이미 배신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놈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제국군의 이탈을 방지하고 카얄란을 수색해서 모두 폐기하면 그만이다.”

“······헌진 경.”


재형의 눈은 침착했다. 헌진의 명령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나, 그는 진지하게 그 내용을 고려하고 있었다. 기사단장의 명령은 거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렇게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굳이 필요한 일이오? 카얄란이라는 마약을 폐기하는 일은 내 무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오. 방해하는 자들도 없을 테니 말이오. 또는, 방금 전 그 마고라는 일당이 나설 수도 있는 일이겠지. 그러니 군대를 추스를 필요는 없다고 보오. 이곳에는 지켜야 할 사람도 시설도 없소. 무장장이 없을 때도 군대는 유지되었으니, 애써 관리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오.”

“타당한 의문이다.”


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흡족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베니가 한층 더 사납게 재형을 노려보았다. 말로서 헌진에게 인정받는 것은 베니가 가장 자신 없는 분야였다.


“그러나,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군대가 쓰여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


헌진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불러오는 상상이 어떤 상황이더라도, 결코 밝을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재형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나와 나리아는 1구역으로 가야 한다.”

“······도시를 위한 일이오?”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재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헌진을 관찰하듯 살펴보며 그 말을 곱씹었다. 한낱 이탈자에 불과했던 자신이 도시의 관리를 맡는다니,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누구나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헌진과 나리아가 구역에 들어서고 상황은 급변했다. 이미 발생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면, 그에 참여해 조율해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받아들이겠소.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구역민과 제국군에 대한 통솔권은 내가 지시를 내려두겠다.”


헌진이 이번에는 베니를 돌아보았다. 베니는 헌진의 시선에 움찔했다. 그녀는 최대한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애초에 후보생은 기사의 말에 거역할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의 삶에 새겨진 논리였다.


베니는 재형처럼 그럴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도하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베니가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재형은 물론이고 헌진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 거절한 거냐.”


헌진은 순수한 의문을 담아 되물었다. 베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절하겠······아니, 제 말은 헌진 경의 명령을 거절하겠······아니, 반드시 거절······제가 왜 이러죠?”

“내가 묻고 싶군.”


베니는 쩔쩔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부정에 이르렀다. 오히려 그렇게 되고 보니,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니는 그 명령을 거절해야만 한다. 그것은 과정이나 결론이 아닌 당위처럼 느껴졌다.


“마고의 언령이 제법 강한 모양이네요.”


나리아가 어느새 다가와 베니를 올려다보았다. 베니는 도움을 구하는 듯 입을 가린 채 나리아를 바라보았다.


“언령이라고?”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헌진이 되물었다.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는 언어를 무기로 쓴다고 했어요. 아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언어체계가 아닌 무언가겠죠. 움직이는 대장간도 그런 언어의 일종인 것 같지만······. 아무튼, 마고도 그런 언어를 부렸어요. 베니, 마고가 당신한테 한 말을 기억해요?”


베니는 마고에게 칼을 휘두르려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너는 할 수 없다.’


그 한마디에 베니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말로 이루어진 속박이었다.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 순간 칼을 휘두르려는 베니의 의지는 소멸했고 그 자리에 고정됐다.


“그때 베니는 칼을 휘두르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은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머릿속으로 칼을 휘둘러야만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서 그런 시도를 떠올리지 못했을 테지만.”

“그럼 지금 제가 이러는 것도?”


베니는 마고가 자신의 속박을 풀면서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을 떠올렸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 맡은 바 일을 다 해라.’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석됐을지는 모르겠지만, 헌진의 명령을 받아들이면 수행할 수 없는 거겠죠. 그러니까 베니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고의 마지막 언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베니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마고의 마지막 말을, 베니는 나리아를 지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 구역을 관리하라는 헌진의 명령을 거부한 것도 당연했다.


“실험해볼까요? 베니, 저에게서 떨어지세요. 구역 반대편 끝으로요.”


나리아의 말에 베니가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일정거리 이상으로 떨어질 수 없었다. 베니는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다리에 힘을 주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맞는 것 같네요.”


나리아가 헌진을 돌아보았다. 헌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고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부린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베니에게 입력된 명령이 나리아에게 도움이 된다면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저는······.”


베니는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그럴 수 없습니다. 네, 그럴 수 없어요. 이 구역에 남을 수 없어요.”

“아마 저를 따라가야 하겠죠?”


나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피곤해 보이기도, 영문 모를 죄책감을 내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베니는 어쩐지 쑥스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아마도······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습니다.”

“그럼 결정됐군.”


헌진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자의든 타의든 베니를 이곳에 남길 수 없으니 오로지 재형에게만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사실에 재형과 베니는 동시에 안도했다. 서로 껄끄러운 관계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나리아, 1구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해야한다.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지.”

“내일 바로요? 아직 마고에게 물을 게 산더미만큼 있어요.”

“그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되지 않느냐. 일단은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 헌진이 가르쳐줘요.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죠?”


헌진은 조심스럽게 턱을 쓸었다. 자신이 지하에서 본 것들을 나리아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나도 네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니 말이다.”


나리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오늘은 잠을 잘 시간조차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녀의 공격을 네가 반격했다는 말이냐.”

“그렇다니까요!”


나리아는 가슴을 펴며 우쭐했다. 헌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디나의 공격은 헌진조차 막기에 급급했다. 언어라고 부르기에는 괴상한 힘을 나리아는 무력화시켰다. 짧지만 강렬한 정보를 담은 그 짧은 문장에 헌진은 말문이 막혔다.


“언어를 다루는 힘이라.”

“아까도 말한 것처럼 움직이는 대장간과 다를 바 없는 물건일 거예요. 실제로, 그걸 움직이는 감각으로 대응했을 뿐이니까요. 아마 알베릭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리아가 자신의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슬처럼 나리아의 몸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던 대장간이 손끝에 모여 흔들렸다.


“······그건 불가능할 것 같군.”

“어째서요?”

“알베릭을 비롯한 기사단의 그 누구도 움직이는 대장간을 그러한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기의 일종일 뿐이었지. 그런 한정적인 사고로는 그 아이에게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대장간은 헌진도 제한적이나마 다룬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디나와 직접 부딪치기까지 했다. 헌진은 대장간과 언어의 차이를 명백하게 실감했다.


“마고의 언어와 디나의 언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게 가장 결정적인 단서일 것 같은데.”

“······모르겠구나.”

“그래서 마고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게 됐네요.”


나리아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끝에서 대장간을 움직이며 고민하는 나리아를 보며 헌진은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1구역에 가까워질수록 나리아는 변화하고 있다. 그 끝에는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지 뜻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바깥이 소란스럽네요.”


나리아가 문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바깥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법우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들고 온 뒤 2구역은 작은 혼란에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체제가 흔들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헌진은 발생한 혼란을 즉시 수습했다. 법우를 대신해 전권을 주장하는 헌진에게 이의를 제시할 사람은 없었고, 각 부대의 장들은 빠르게 이해해야만 했다. 헌진이 대동한 재형과 그의 동료 후보생들은 헌진의 대리인으로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갔다. 살아남은 법우측 후보생들도 헌진의 명령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재형이 2구역을 장악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리 하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헌진도 이미 언어를 힘으로 부리는군요.”


나리아는 작게 웃었다. 나리아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서 부동자세를 취한 베니에게 옮겨갔다. 베니는 문밖에 서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시선 내에 나리아가 있어야만 하는 듯했다. 그것이 헌진과 나리아의 방에 베니가 있는 이유였다.


“저한테 있던 일은 대충 끝났으니, 지하 얘기나 해줘요. 그러니까, 인류의 원본이 그곳에 있었다고요?”

“그렇다.”

“어떤 형태로요? 인체였나요, 아니면 세포의 형태였나요?”

“그걸 설명할 말이 나에게는 없군. 손가락만한 원통에 담긴 형태였다. 그것이 인류의 원본이라더군. 사실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짓일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렇겠죠. 그런 거짓말을 한다는 건, 음, 그 어떤 의미 없는 거짓말보다 더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헌진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망설임 끝에 딸려 나온 말은, 헌진에게는 의외의 것이었다.


“혹시 그 원본 중에, 제 원본도 있었나요?”


나리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불안감에 흔들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주기 21.02.14 128 0 -
116 115. 언령 (3) +2 21.08.31 47 3 12쪽
» 114. 언령 (2) 21.08.03 31 2 11쪽
114 113. 언령 (1) 21.08.02 28 1 11쪽
113 112.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7) 21.07.27 33 1 11쪽
112 111.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6) 21.07.21 21 1 11쪽
111 110.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5) 21.07.20 26 1 12쪽
110 109.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4) 21.07.16 47 1 13쪽
109 108.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3) 21.07.15 24 1 12쪽
108 107.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2) 21.07.14 31 2 12쪽
107 106.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1) 21.07.13 44 1 11쪽
106 105. 마고 (3) 21.07.10 24 2 12쪽
105 104. 마고 (2) 21.07.08 29 2 10쪽
104 103. 마고 (1) 21.07.07 34 2 11쪽
103 102. 폐기물 (7) 21.07.06 29 2 12쪽
102 101. 폐기물 (6) 21.07.02 19 2 11쪽
101 100. 폐기물 (5) 21.07.01 25 2 11쪽
100 99. 폐기물 (4) 21.06.30 25 2 10쪽
99 98. 폐기물 (3) 21.06.29 25 2 12쪽
98 97. 폐기물 (2) 21.06.29 24 2 11쪽
97 96. 폐기물 (1) 21.06.25 25 2 10쪽
96 95. 2구역 (3) 21.06.23 24 2 11쪽
95 94. 2구역 (2) 21.06.22 27 2 11쪽
94 93. 2구역 (1) 21.06.22 32 2 12쪽
93 92. 탑 (8) 21.06.18 24 2 10쪽
92 91. 탑 (7) 21.06.17 28 2 12쪽
91 90. 탑 (6) 21.06.16 28 2 10쪽
90 89. 탑 (5) 21.06.15 24 2 11쪽
89 88. 탑 (4) 21.06.14 48 2 11쪽
88 87. 탑 (3) 21.06.11 29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