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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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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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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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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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15. 언령 (3)

DUMMY

“무슨 뜻이냐.”


헌진이 되묻자 나리아는 슬쩍 베니를 바라보았다. 베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달싹였다. 어쩐지 끼지 말아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에 이 방을 나가고 싶다는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리아는 그런 베니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이 자리를 불편해하는 베니를 배려하는 미소였다.


“그냥,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났어요.”


나리아는 옛 기억이 잠든 광산에서 보냈던 시절을 떠올렸다. 빛은 들어오지 않았고, 어둡고 습한 동굴은 오로지 손끝으로만 파악되었다. 그 안에서 유달리 선명한 것은 일곱 개의 눈이 박힌 고목이었고, 나리아는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저는 어쩌면, 도시에서 비롯된 삶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자신이 이 도시가 규정하는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옛날이야기를 알았고, 기계를 다룰 줄 알았으며, 다른 시각으로 도시를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고작 그 정도였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러나 마고 일행을 만난 후 나리아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힘을 막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리아는 그 사실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만약 제가 도시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존재거나, 그들 종족과 관련이 있다면······.”

“출생의 비밀이라, 네가 들려준 옛날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던 요소구나.”

“헌진, 저 진지하거든요?”

“나는 진지하지 않은 적이 있더냐.”


헌진은 웃지 않았다. 나리아는 그가 농담하는 중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기대하고 있는 거냐.”

“네? 뭘요?”

“네가 특별하길 바라는 거냐고 물었다.”

“저는······.”


나리아는 헌진의 지적에 대답을 망설였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만이 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단어가 변질한 이 도시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한다면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헌진 같은 힘도, 마린 같은 통솔력도 지니지 못한 나리아의 희망이었다.


“특별해야만, 할 거 같아요.”

“그러냐.”


헌진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쓸었다.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나리아는 헌진의 자세를 따라 하며 말을 기다렸다. 베니가 보기에, 기사와 소녀가 한 침대 위에 앉아 팔짱을 끼고 마주 보는 광경은 어딘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보고 들은 것을 설명하는 헌진의 말은 늘 간결했다. 따라서 헌진이 고민하는 이유는 나리아의 질문에 망설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꺼낸 헌진의 뒷말은 다소 의외였다.


“이 도시에는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있지. 그러나 그 어느 사람도 특별하지 않다.”

“보통 반대 아니에요?”

“네 일반론은 도시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으니 동의하기 힘들구나.”


나리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헌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사람의 가치에는 경중이 있고, 도시가 그것을 부여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사람의 가치는 서로 다르다. 때로는 그 이유로 사람은 차별되어야 마땅하지.”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헌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헌진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때면 계단을 밟듯 가장 아래에서부터 시작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고 싶다는 뜻이라면 인내심이 필요했다.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나리아는 견뎌냈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가 다르다고 한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지점이 있다. 너라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냐.”

“음······존엄성이요?”

“사어로군. 너답다.”


나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 도시의 구성원을 보고 그런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리아뿐일 것이다. 헌진의 말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감상이었다.


“도시에 속했으되 잃지 않는 것, 그 누구도 존중하지 않되 침범할 수 없는 것, 나는 그것을 개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요?”


보통은 그것을 존엄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리아는 자신의 보통이 남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인 나리아는 입가를 진정시켰다.


“개인은 오직 타인과 자신을 구분할 때, 투쟁할 자격을 갖춘다.”


투쟁. 헌진이 말하는 그 단어는 어딘가 낯설었다. 도시 속에서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단어였으나, 나리아는 가지각색의 형태로 분명히 목격했다.


헌진의 말에 동의하려던 나리아는 그러나 거부감을 느꼈다. 투쟁이 개인의 것이라면, 지금까지 보아온 반역은 투쟁이 아닌 다른 지점에 속하게 된다. 나리아는 집단의 힘을 보았다. 기사가 아닌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인간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극도로 철저한 개인은 사람 사이에 섞일 수 없는 법이었다.


“투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은요? 그들도 분명히 개인이에요. 약자들, 3구역의 사람들, 마린이 일어서지 않았다면 공장에서 갈려 나갔을 사람들 말이에요.”

“그들은 개인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헌진도 분명히 보았잖아요. 마린과 밤까마귀는 7구역에서 개혁을 일으키고 있어요. 개인이었다면 이루지 못할 분명한 성과를······.”

“개인에게 의존하는 개인, 집단에 의존하는 개인, 그들은 개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덩어리 일부분에 불과하지. 그들은 마린이라는 개인에게 의탁했을 뿐이다.”


나리아는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헌진이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논리를 펼친 적은 없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이유는 희생을 무시하는 헌진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긍정한다면, 자신은 헌진이라는 개인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금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나리아는 침착한 태도를 버리고 쏘아붙였다.


“지금,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할 말인가요?”

“개인은 그렇게 벼려지는 법이다, 나리아.”


헌진은 어디까지나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담담함이 불러오는 의미심장한 뜻에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벼려진다고요?”

“그렇다. 사람은 스스로 발생한 개인에게 이끌리지. 개인에게 몰려들어야, 사람은 집단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몰려든 사람들은 구심점에 있는 개인에게 벼려져 또 다른 개인으로 거듭난다.”


“언젠가 마린이 사라지면, 마린을 대신할 개인이 나타날 테지. 페이긴이 사라지면 페이긴을 대신할 자가.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 아니겠느냐.”

“헌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간단한 일이다.”


헌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간의 관계란 그러한 법이다. 개인은 개인일 때 타인과 대등하다. 그렇기에 사람은 투쟁을 통해 개인을 추구해야만 하지. 그런 의미에서, 누구든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너야말로 개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칭찬하는 건가? 나리아는 헌진의 말을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헌진의 안에서 가다듬어진 말은 나리아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지하공간이 품은 도시계획에 네가 들어있는지, 나는 모른다. 보아도 해석할 수 없으니 알지 못했겠지.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더냐. 너는 이 도시에서 홀로 선 자다. 과거와 미래에서 분리된 바로 지금 이 지점에서 말이다. 이 도시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너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지 않으냐.”


황제를 만난다. 분명하다기에는 막연한 목표다. 그러나 그것은 헌진의 충고이기도 했다. 다른 것을 살필 겨를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리아는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지금까지 말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나리아쪽이었다. 그러나 지금 헌진의 말은 나리아에게 큰 수수께끼를 남긴 격이었다.


“그리고······.”


뒷말을 이으려던 헌진의 고개가 문을 향해 돌아갔다. 한 박자 늦게 구석에 서있던 베니도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리아는 뒤늦게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감지했다.


“재형이 곤란해하는 것 같구나. 내가 가봐야겠다.”


헌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법우의 흔적을 잇고 구역을 안정화하려는 재형에게는 헌진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리아는 일단은 더 묻고 싶은 말을 담아두기로 했다.


“차차 얘기할 때가 또 있을 거다.”

“네, 그렇겠죠. 그렇고말고요.”


헌진은 나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고는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기 직전, 나리아는 헌진의 짧은 속삭임을 들었다.


“내가 사라진다면 그때는······.”


헌진이 방을 나서자 나리아는 베니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 있는 가구처럼 여겨지기를 바랐던 베니는 살짝 움찔했다.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속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헌진은 만인에게 철인이나 초인이 되라고 하는 걸까요? 그건 너무 가혹한데요.”

“······.”


베니는 현명하게 침묵을 선택했다.


“만인은 초인을 좇아야만 한다는 말인 걸까요? 애초에, 그럴 수나 있는 걸까요? 헌진의 말처럼 개인은 스스로 발생한다면, 그럴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죠? 어떻게 생각해요, 베니?”

“어······.”


베니는 결국 침묵을 지키지 못했다. 콕 집어서 묻는 나리아의 말에는 대답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기사가 될 수 없다면, 기사의 마음가짐이라도 지니라는 뜻이 아닐까요?”


베니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대답할 수 없을 질문에 반쯤 넋을 놓았기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원리와도 같았다. 개인과 투쟁을 운운하는 두 사람의 가치관은 베니에게는 까마득했지만, 적어도 이 도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분명히 정하고 있는 베니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기도 했다.


“마음가짐이라.”


나리아는 베니의 말을 곱씹다가 돌연 베니를 보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리아의 반짝이는 눈빛에 베니는 시선을 돌렸다. 분명한 명령과 부려지는 일에 익숙했을 뿐, 논하는 일은 적성에 없었다.


“고마워요. 조금은 실마리를 잡은 것 같기는 해요.”

“별 말씀을.”


베니는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나리아는 이내 침대 위에서 턱을 괴고 자신의 안으로 가라앉았다.


베니가 보기에, 바로 곁에서 지켜본 나리아와 헌진의 관계는 기묘했다. 주종관계는 아니었고, 친구라고도 부를 수 없었으며, 부녀지간이라고도 하기 힘들었다. 헌진의 말은 충언에 가까웠고, 그 말을 끌어내는 나리아는 헌진과 대등했다.


기사의 본질은 섬기는 것에 있다는 옛 격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헌진은 나리아를 섬기고 있는 걸까. 그러나 나리아는 헌진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리아는 관계 속에서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하는 걸까.


‘깨어나려는······불안정한······.’


베니는 나리아를 위해 그럴싸한 수식어를 떠올리려다가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전염된 탓이 분명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이 아닌 칼 속에 있다고 정해두지 않았던가.


‘이 또한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 언령일지도.’


베니는 생각을 그만두고 바른 자세를 취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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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1 Pivoine
    작성일
    21.10.12 01:51
    No. 1

    묵혔다가 풀었는데...죽은거냐구...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39F
    작성일
    22.11.01 23:40
    No. 2

    마지막으로 본게 벌써 1년 반이 지난 과거이네요. :>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지금도 결말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해요.
    글 너무 흥미진진하고 잘 쓰셔서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그 결과 아직도 생각나서 들어와봐요. 그런것치곤 지금까지 말 없다가 찾아온게 너무 뜬금없기는 하지만...ㅋㅋ 아무튼 나아아중에라도 생각이 나신다면 결말을 부탁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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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106.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1) 21.07.13 4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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