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 생활, 마지막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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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리프드림
작품등록일 :
2021.02.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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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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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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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고블린 찾기 (2)

DUMMY

검푸른 밤풍경에 점차 빛이 돌아오기 시작할 무렵, 필은 홀로 나무에 기대어 서서, 여러 파편이 널부러져 있는 기사단의 이전 야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폐허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와 함께 숲 속에서 무시무시한 대발굴을 했던 자크는, 슬슬 기사단의 일과 시작 시간이라며 먼저 도시로 돌아간 뒤였다.

충격 때문인지 멍한 얼굴인 자크가, 더 정확하게는 그의 행동이 걱정되어, 필은 자크가 기사단에서 취해야 할 행동을 일러두었다.


하나, 망토 핀을 찾은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괜히 트집 잡힐 수 있으니까.


둘, 망토 핀 때문에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도 추궁하지 말 것.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까.


특히 이 두 가지를 자크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단단히 이른 뒤, 필은 턱을 매만지며 자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사단이 엮였다는 걸 안 이상,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기사단에서 화약도 쓰나?”

“화약? 아니, 대포가 없어서 화약은 없는데. 폭탄은 있지만.”


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폭탄?”

“흠? 본 적 없나? 쇠로 된 공인데, 안에 화약이랑 작은 쇠구슬이 들어 있네.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크기이고. 심지가 나 있는데, 거기에 불을 붙이면 심지가 다 타 들어가면서 펑~ 터진다네. 태엽 달린 것도 있긴 한데 그건 비싼 데다 너무 예민해서 잘 안 쓴다더군. 왜, 보여줄까?”


자크는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허리춤에 맨 작은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자크의 말대로 한 손으로 쥘 수 있고, 또 쇠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제법 묵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긴 하나, 굳이 사용법을 물어볼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심지에 불을 붙여서, 다 타기 전에 던진다.


굉장히 단순하고 명백한 방법이긴 하지만, 정말로 가능한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무거웠다.

게다가 화약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쇠구슬까지 들어 있다.

무게 때문에 실수로 멀리 못 던지고 근처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완전히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잠깐 그 광경을 상상한 필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폭탄을 다시 자크에게 돌려주었다.


그 뒤 자크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도시로 돌아갔고, 필은 야영지’였던’ 곳으로 다시 향했다.

처음에 봤을 때처럼 탄 자국과 구덩이, 그리고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 같다.

그러나 그때는 별 생각없이 슥 보고 지나쳤던 이 풍경이, 지금은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묻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은 아직 검은빛이 감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이었다.

해가 뜨면, 어둠 속에 묻혔던 세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이곳에 숨겨진 비밀들도 드러날 것이다.


필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예기치 않은 발견에 뒤죽박죽해진 머릿속을 차가운 겨울 공기가 한번 휘저은 뒤, 하얀 김이 되어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갔다.


잠시 후, 숲은 본연의 색을 되찾았고, 필은 파편들 속에서 여러 개의 작은 톱니바퀴를 찾았다.

반쯤 녹은 금속 조각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필은 코끝에 차디찬 금속 표면이 닿을 정도로 바짝 코를 갖다대었다.


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톱니바퀴들이 바닥에 구른 뒤로 해가 세 번이나 다시 떴다.

세찬 겨울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며 이곳의 남은 연기와 냄새를 모두 가져가버리고도 남았을 시간이건만.


“······”


톱니바퀴들은 아직도 화약 냄새를 품고 있었다.

이대로 잊혀질 순 없다며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듯했다.



여관으로 돌아온 필은 이틀치 숙박비를 미리 계산하면서 식당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곳에 묵는 손님인 듯한 사람이 두세 명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그가 아는 두 숙녀의 모습은 없었다.


“나랑 같이 온 두 사람도 나갔나요?”

“예에. 조금 전에요.”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아침이라도 같이 먹을까 해서 들른 것이니, 두 사람이 여기 없다면 굳이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할 이유는 없었다.

필은 여관 주인이 계산을 마치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여관을 나와, 시장에서 몇 가지 식료품을 산 뒤 스밀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스밀이 식사를 해결했든 말든 솥을 빌릴 생각이었다.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자크는, 아마 저녁이나 되어야 여관에 돌아올 것이다.

즉, 그때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스밀에게 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도시내에 차고 넘치는 소일거리 의뢰들을 맡아도 될 것이다.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면 자크의 선배들이 대장간으로 쳐들어오는 것뿐이었다.

필은 그들이 아침 댓바람부터는 아니더라도 오늘 오전 안으로 반드시 대장간에 오리라 예상했다.

그들은 기사단이기 이전에 귀족이었고, 귀족은 대부분 자존심이 강한 편이며, 그 자존심은 전날 필이 실컷 꺾어버렸고, 애초에 그 원인은 스밀이 고집을 피운 것에 있다.


그러니 그들은 명분도 있겠다, 반드시 대장간, 정확하게는 스밀을 찾으러 올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피땀 안 흘리고 넘길 수 있을지, 그는 아침을 먹으면서 느긋하게 고민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장간에 도착한 필은, 아연한 얼굴로 턱이 벌어진 채 제자리에 멀뚱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붉은 망토가 펄럭이며 물결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약간 예상을 벗어나긴 해도 그럭저럭 오차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녀가 붉은 물결을 마주보고 있고, 그 옆에서 시청 관리인 듯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이 상황극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음, 이런 걸 예상한 건 아닌데.”


그보다 갑옷덩어리들이 길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필은 대장간 입구는 커녕 그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대장장이 한 명 추문하러 이렇게까지 우르르 몰고 오다니, 그는 상식밖의 짓을 태연하게 벌이는 귀족 기사들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릴 때문이라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옆으로 돌아서 울타리를 넘기도 귀찮아 어떻게 할지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안쪽에서 그를 발견했는지 ‘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말소리에, 필은 그만 사레가 들 뻔했다.


“거기 키 엄청 큰 촌놈 전사님!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오셔서 어제처럼 기사단을 물리쳐주세요!”

“······”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큰 잘못을 했던 건가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아쉽게도 짚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 기회를 봐서 하나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래도 릴의 외침이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필이 가지고 있던 당장의 고민, ‘대장간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고민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릴의 목소리가 공기중으로 흩어지자마자 수많은 배서닛들이 뒤를 돌아보더니,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붉은 물결이 일제히 사라지면서 양옆으로 갈라져 길이 생겼다.


“······”


태연한 얼굴로 이 길을 걸어가기엔 손이 너무 허전했다.

필은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허리춤의 단검 손잡이를 꽉 쥐고 울타리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일자 또는 T자로 된 틈새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마구 쏘아져 얼굴에 꽂히는 듯했다.

일부는 호기심, 일부는 의구심, 그리고 나머지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창이 멀쩡했다면 지팡이로라도 쓰고 있을 텐데.

그는 무기점과 대장간 일을 다 차지한 기사단을 욕했고, 그 이전에 날을 망가뜨린 괴물을 욕한 다음, 애초에 그 원인을 제공한 리안을 원망했다.

주의도 돌리고 보복도 할 겸, 만약 그녀가 오늘 아침 영양제를 빼먹은 걸로 밝혀지면 무얼 먹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는 태연하다 못해 약간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울타리문을 통과해, 홀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기사단원을 지나 릴과 스밀 앞을 가로막듯 설 수 있었다.

대신 리안은 무와 양파를 으깬 것을 탄 영양제를 먹게 되었지만, 그다지 문제될 것 같진 않았다.


홀로 길을 만들지 않은 그 기사단원은, 별 움직임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은 기사단원의 배서닛 속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기사단원들의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니, 분명 이 사람이 대장이리라.


“너 여기서 뭐해?”


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릴은 한번 그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다시 기사단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안을 마법학회실에 데려다 주고 나서 여관에 마차를 두러 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걸 봤어. 지나가는 소리로 ‘대장간’ 어쩌고 하는 게 들리길래 이쪽으로 와본 거야.”


마치 증명이라고 하는 것처럼, 마당 한편에 묶여 있는 말이 푸릉거리며 투레질을 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어?”

“좀 있으면 싫어도 알게 될걸? 그러라고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부른 거니까.”


그냥 표적을 바꾸고 싶은 거면서 뭘 생각해주는 척하느냐고 따질까 아주 잠깐 생각해본 다음, 필은 그냥 한숨만 짧게 쉬고 말았다.


“하······ 그래, 신경 써줘서 엄청 고맙다.”

“별말씀을.”


그녀의 대응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밀을 곤경에서 구하는 데엔 가장 적절한 행동이었다.

단지 필 자신이 그 희생제물이 된 것이 신경을 건드릴 뿐이었고, 자신 말고는 다른 적절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또 그의 인상을 짜그라뜨렸다.


그건 그렇고 시청 관리는 왜 온 건가, 그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겨울용 코트자락을 무릎 높이까지 늘어뜨리고, 털모자를 썼다기보다는 머리에 살짝 얹고 있는 이 시청 관리는, 옆에 시녀도 대동하고 있겠다, 얼핏 보기엔 관리가 아니라 잠깐 아침 산책을 하러 나온 귀족 신사 같았다.

공직자임을 증명하는 배지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기사단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못 봤더라면, 필은 그 사람을, 기사단을 편들어 스밀을 괴롭히러 온 악덕 귀족 A라 착각했을 것이다.


“그래, 자네가 그 촌놈이로군? 어제는 우리 단원이 폐를 끼쳤다고 들었소.”


평생 쓸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 쓰더라도, 대장의 말투에서 친밀함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불쾌함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대장은 필의 얼굴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 햇병아리의 편을 들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자네가 직접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것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군. 새끼 늑대를 윽박질러봤자 어미를 불러올 뿐이라는 걸 모르는가?”


어미. 필은 그 단어가 생물학적인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비유일 뿐인지 궁금했다.

얼굴이 보인다면 추측이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대장은 배서닛을 벗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필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저는 어제 가르침을 받았을 뿐입니다. 제가 쓰던 창이 망가지는 바람에, 창을 고칠 때까지 임시로 검을 쓰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검을 잡은 지 오래되어 자신감이 없던 차에, 마침 금발 기사님께서 친절을 베푸시길래 감사히 응했을 뿐입니다. 폐를 끼치시다니요, 오히려 제가 큰 신세를 졌지요.”


거짓말은 없었다.

그저 긍정 에너지를 열심히 쏟아부어서 말을 자아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장은 필의 긍정 에너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가가 한층 더 일그러졌다.


“혀를 놀리는 게 보통이 아니로구나, 애송이. 그래, 네 녀석이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면, 신세를 갚을 생각도 있겠지? 나와 함께 가주어야겠다. 얼마나 큰 신세를 진 건지 몸소 깨닫게 해주마······!”


대장이 팔을 뻗어 필의 멱살을 잡으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시청 관리가 그 팔을 잡으며 앞에 나서서 호통을 쳤다.


“경거망동을 삼가시오, 페르베올! 내 앞에서 행패를 부릴 셈이오?!”


대장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시청 관리를 보면서 조용히 들끓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가 경거망동인지 모르겠군, 비스크린 백작. 내 비록 지금 기사로서 여기 서 있으나,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말길 바라오.”

“기사이기 이전에 외부인이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추방할 수 있다는 권한이 내게 있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군.”


관리가 손을 놓자, 대장은 홱 뿌리치듯이 팔을 내렸다.

그러나 대장에게 아직 공격 차례가 넘어가지 않은 모양인지, 시청 관리가 연이어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청년에겐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소. 무도한 칼잡이의 횡포를 막아주었으니까.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그대들 레드 나이트에게 곧 공식적인 항의서한을 보낼 것이오! 그대들의 근본 단장이신 국왕 폐하께서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시청 관리가 매섭게 쏘아붙이자, 대장은 갑자기 투구를 벗더니, 눈을 크게 부릅뜨며 얼굴을 관리에게 바짝 들이대었다.


“도시의 통치자라는 자가 이리 사리분별을 못할 줄이야. 지금 이 도시가 매일 새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누구 덕인지 모르는가? 그대는 정녕, 도적단이 목구멍 앞에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무뢰한인가?!”

“그래서 도시민들에게 기사단을 자발적으로 도우라고 명한 게 아니오? 그랬더니 어떻게 됐소? 푸줏간, 식료품점, 무기점, 대장간, 하다못해 빵집까지 전부 그대들이 전부 차지했소! 정말 자발적이고 공정하게 가져간 거면 내 말을 안 하지. 내가 집무실 안에만 박혀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안다면 오산이오. 어디, 하나부터 끝까지, 이 자리에서 그대들의 만행을 손가락 꼽으며 일러드릴까?”


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색깔이 변했다.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뿜어내던 대장은, 갑자기 표정이 사라지면서 딱딱해지더니 다시 투구를 썼다.

그러나 일자로 된 틈새로부터, 분노가 가득 어린 시선이 관리를 향해 꽂혔다.


“······더 해봤자 입만 아프겠군. 그대의 생각은 충분히 알았소. 단장님께 그대로 전하지.”

“’단장 대리’겠지. 명칭을 똑바로 하시오, 칼스 페르베올 경. 그대들의 단장은 국왕 폐하이지, 지금 대리로 앉아 있는 라이언 튜트 경이 아니오.

그래, 내 말을 튜트 단장 대리에게 똑똑히 전해드리시오. 레드 나이트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대들의 본분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고······!”


잠깐 동안 두 사람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 눈을 마주보았다.

마치 불꽃이 튀기는 듯한 긴장된 분위기에 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대장, 칼스가 먼저 등을 돌리고 열려 있는 길을 따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원들이 질서 있게 철걱거리며 대장간에서 멀어져갔다.


숨이 막히는 듯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어쨌든 필이 바란 대로 피땀 흘리지 않은 채 일이 끝났다.

그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엄한 표정으로 울타리문을 노려보는 시청 관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는 필을 향해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편안한 웃음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나. 내가 말한 것처럼, 시민을 구해주었으니 오히려 내가 감사를 해야 하네. 고맙네, 나와 이 도시가 자네에게 큰 빚을 졌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필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헛기침을 한번 한 후,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한 의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시청 관리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들으니 제가 완전히 잘못 짚은 듯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아, 저는 필입니다. 용병이죠.”


칼스와 한창 언쟁하는 것을 듣는 중에 절반 정도는 이미 예상이 갔지만, 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관리는 턱을 감싸며 잠시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혼자 어깨를 으쓱이고 입을 열었다.


“뭐, 어때. 행정관은 일을 안 하는데.

흠흠, 소개가 늦어서 미안하네. 나는 이 소도시, 본느의 영주인 에드워드 사이프러스 비스크린 백작일세. 이쪽은 내 시녀인 안나. 이 도시의 행정관보다도 더 일을 잘하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라네. 만나서 반가우이.”


필의 예상은 절반만 들어맞은 셈이었다.

공직자 배지를 달고 있는 이 남자는 귀족이 맞았지만, 시청 관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추측이 빗나갔다고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어느 영주가 버젓이 행정관이 있는데도 공직자 배지를 달고 바깥을 다니는가?


에드워드 영주가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자, 릴이 우아하게 한쪽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인사했고, 영주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낯간지러운 상황이 한차례 지나간 후, 영주는 필이 들고 있는 식료품 바구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직 식사 전인 듯하니 내 짧게 용건을 전하고 실례하도록 하지. 필이라고 했나? 식사를 마치고 준비가 되는대로 시청으로 와주게. 내 친히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안도감으로 풀려 있던 그의 표정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갔다.

귀족의 ‘부탁’은 그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것이었다.

영주는 필의 표정에서 그의 심중을 읽었는지 빙긋 웃었다.


“걱정 말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내 부탁이나 자네가 지금 하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어찌 되었건, 일단은 들어보는 게 도리 아니겠나? 내용도 듣지 않고 거절한다는 성급한 심성을 가진 것 같진 않은데.”

“······예, 물론. 급하다고 익지 않은 사과를 딸 순 없죠. 허나 외람됩니다만, 내용이 별 다르지 않다면 저는 이 영감님의 구두약속으로도 충분합니다.”


후후, 영주가 부드럽게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영주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꺼내었다.

말씨는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말을 하는 영주의 눈엔 서리가 내리는 듯한 차가움이 점점 차올랐다.


“자네나 자네 일행이나 나에게는 외부인이지. 특히, 자네는 어제 소란을 피웠고.”

“······”

“나 역시 되도록이면 자네를 신사 대 신사로 대하고 싶네. 감사한 마음이 있는 것도 거짓이 아니고. 내 약속하지. 만약 자네가 내 부탁이 무엇인지 듣고도 수락할 생각이 없다 해도 아무 책임 묻지 않겠네.

이 정도면 최대한 자네에게 양보한 셈인데, 안 그런가? 그러니······ 자네도 예를 표해주었으면 좋겠군.”


필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항상 이런 식이다.

목숨을 뺏지 않는다는 것, 부탁을 자유롭게 거절할 수 있다는 세상천지에 당연한 권리를 ‘특별히’ 준다며 선심을 쓰는 체한다.

거절할 자유 따위, 줄 생각은 없다는 건 뻔히 다 아는 사실인데도.


그러나 필은 여기서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영주가 말한 것처럼, 필은 이미 귀족에게 과분할 만큼 양보를 받은 상태이다.

이마저 거부한다면, 영주는 바로 필을 ‘괘씸하다’며 즉결처형을 명할 것이다.


그래서 필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한가득 띄우며 돌아가는 영주의 등에 대고, 필은 실컷 욕을 날려줄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어?”


영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릴이 물었다.


“괜찮긴, 망했지. 아, 뻔하다, 뻔해. 기사단이랑 사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귀찮은 거 더럽게 시켜대겠구만. 하······”


무조건 거절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에 잘 옮기려면, 역시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필은 아직도 멀거니 서 있는 릴과 스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침들은 드셨나?”


절레절레. 작은 얼굴과 큰 얼굴이 동시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솔직히 릴은 먹었을 줄 알았는데.

필은 어깨를 으쓱이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밥부터 먹고 생각하기로 하자.

배를 채우면 자연히 머릿속도 알차게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필은 망설임없이 솥에 물을 부었다.


작가의말

잠을 깨우는 데엔 아침 식사가 최고더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시리얼 한 그릇은 씹는 것도 있고 마시는 것도 있어서 아침밥으론 최고인 거 같습니다‘ ▽’)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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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5화 - 황야의 수선화 (1) 21.04.26 55 0 21쪽
25 24화 - 고블린 찾기 (5) 21.04.22 85 0 20쪽
24 23화 - 고블린 찾기 (4) 21.04.19 74 0 24쪽
23 22화 - 고블린 찾기 (3) 21.04.15 72 0 19쪽
» 21화 - 고블린 찾기 (2) 21.04.12 102 0 20쪽
21 20화 - 고블린 찾기 (1) 21.04.08 75 0 18쪽
20 19화 - 불꽃을 잃은 망치 (3) 21.04.08 59 0 18쪽
19 18화 - 불꽃을 잃은 망치 (2) 21.04.05 73 0 22쪽
18 17화 - 불꽃을 잃은 망치 (1) 21.04.01 72 0 18쪽
17 16화 - 재충전 21.03.29 72 0 22쪽
16 15화 - 경계 너머 (7) 21.03.27 79 0 33쪽
15 14화 - 경계 너머 (6) 21.03.25 93 0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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