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정직원4
“당신은 지금 신성한 노동운동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쌓아올린 노동자의 권리를 이렇게까지 무시하고 다른 기업들도 따라하게 된다면 세상은 다시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신음으로 가득할 것이며 이 모든 책임은 미래그룹에 있을 겁니다.”
노동일보라고 했나?
이새끼는 대놓고 노총 나팔수네.
“인수형 이 사람도 조사. 노동자의 권리는 중요하고 노동운동의 공로도 인정합니다.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소득 분배가 잘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직원 제도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무조건이라는 게 있으면 정책 세우기 얼마나 쉽겠습니까?
상황은 항상 바뀌며 전태일의 시대와 지금 시대는 다릅니다. 지금 문제가 무언지 생각을 좀 하세요. 주 52시간 근로를 강제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추가 근로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는 게 중요한 겁니다. 호봉제를 통해 오래 일할수록 많이 버는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한 만큼, 성과만큼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게 중요한 겁니다.
당신들도 알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들이 하는 게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운동입니까? 국내에서 가장 공평하고 풍성하게 돈을 주는 우리를 상대로 작업할 만큼 한가합니까?
당신들이 할 일은 파업을 해서 사업을 볼모로 잡고 기업이 멈춘 손해비용보다 근로자의 임금을 확 인상하는 게 이득이라는 식의 인질협상을 벌이는 게 아니라, 5인 이하 사업장, 하청의 하청구조 사업장에서 갑을정병, 병이 갈리고 있는 현실을 들추고 캐내 그들이 숨 쉬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돈 많은 기업을 마비시키고 사냥해서 큰돈을 뜯어내려 하지 마시고, 돈많은 기업에 깔린 하청이 겪는 진짜 고통을 치료해주세요. 그게 노조, 노총의 방향입니다. 자, 마지막 질문.”
내 잘못 아님.
하청구조의 문제이며 하청구조가 심화되는 건 정직원 제도 때문임.
모든 기자가 손을 든 와중에 민형수가 껴 있다.
잠깐 대담하다가 마이크를 빼앗긴 아저씨가 기자들 틈에 껴서 초딩처럼 얌전히 손을 든다.
명성, 돈을 위해 나온 게 아닌 신념을 위해 나왔으니 자기 위신이나 쪽팔림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 거겠지.
불쌍해서 시켜준다.
“변호사 민형수입니다.”
규칙대로 자기소개도 하네.
“글로벌 1위 미래그룹이 정규직을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기업이 따라갈 것입니다. 미래그룹에선 젊은이들을 위해 돈을 더 쓰는 건 이해했으나 타 기업은 악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정규직을 없애고, 회계자료를 들이밀며 마구 자르겠죠. 필요할 때만 하루씩, 이틀씩 고용할 테고요. 그렇게 되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미래 그룹이 도와주십시오.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끝까지 날 호구로 보네.
“기업은 원래 그래요. 최대이익을 얻기 위한 집단이죠. 고용한 근로자에게 최대한 조금 돈을 주기위해 나누고 국가가 정규직을 유도하니까 하청에 하청구조를 만들어 지출을 줄였죠. 기존 하청업체들은 쥐어짜고 쥐어짜, 매일 야근을 해도 본전인 상황으로 만들죠. 기업은 원래 그래요.
이게 미래그룹 때문이다? 아니죠. 원래 그런 겁니다. 이전에도 최대 이익을 위해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고, 정직원제도가 없어져도 똑같이 최대이익을 위해 수정된 시스템을 만들 겁니다.”
“그러니까 선두그룹이 모범을 보여달라는 겁니다.”
떼쓰지 마라. 나 니 아빠 아니다.
“난 이미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회사에 내 방식을 강요할 순 없죠. 내가 왜? 그건 당신들이 할 일입니다. 그게 당신들 직업이고, 댁들은 그걸 위해 돈을 벌어먹고 살잖아요. 일 해요. 돈 많이 버는 귀족노조를 위해 활동하지 말고, 진짜 도움이 필요한 하청업체와 을을 위해 일해요. 댁들은 그게 직업입니다. 자기 직업을 망각해 협박하는 삶을 살지 마시고요.”
아 짜증나.
돌아서자 기자들이 일제히 악다구니를 썼다.
성실한 신념맨이 떼쓰는 데 자꾸 마음이 약해진다. 짜증나게.
사장실로 올라가니 채인수가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이번엔 명분이 확실했죠. 솔직히 프로젝트 팀을 정규직 전환 하자는 건 무리한 요구였죠. 이미지 생각해서 받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우리가 호구도 아니고.”
“어. 차라리 잘 됐어. 다른 섹터들은 아슬아슬한 게 많았거든. 계약연장을 이어나갈 직군이 많은데 거긴 정규직 강제전환 당할 수도 있거든. 이번에 입장표명 제대로 했으니 건드리지 못할 거야.”
계약연장을 통해 꾸준히 고용하면 국가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걸리게 된다.
강제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건드리면 회사를 이전한다고 했으니 못 건드리겠지.
건드리면 깨뭅니다.
지금 나는 아주 위험한 짐승.
됐다. 이거면.
내 영상은 편집과 뽀샵을 통해 미래그룹 홈페이지 메인에 올라갔다.
모든 영상 사이트와 미래 커뮤니티 안에서 모든 언어로 번역된 내용을 볼 수가 있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환영한다.
미래 그룹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자국에선 절대 정치적 압박이 없을 거라며 회사 이전을 추진해왔다.
미국의 네바다주는 거액을 준다고 했고, 일부 국가는 치외법권지역을 만들어 주겠다고까지 했다.
실수인 척 몇몇 제안서를 외부에 흘렸다.
[국가와 개인의 힘 싸움]
백성은 통치 받는 자인가. 나랏님은 무지몽매한 백성을 통치하고 목민하고 이끌어주는 존재인가.
미래그룹은 애니메이션 파업 현장에서 조용히 질문했다.
난 떳떳한데 노동법으로 옭아매려한다면 떠나겠다.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할 차례다.
시위허가를 내준 경찰이나 미래그룹의 행보를 안 좋게 보던 정부관계자들이 발언에 비춰볼 때 이번 사태의 뒤에는 정부의 길들이기가 있었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과연 미래 애니메이션이 큰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고 떠난다면 그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지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국가보다 강한 25살 ㅅㅂㅋㅋ
-그냥 노조랑 싸우는 거 아니냐? 노총에서 뽐뿌질 한 거잖아
-와 그 새끼들 1억 넘게 챙긴 거 몰랐네 그런데도 더달라고 한거야?
ㄴ계약 끝나면 못 받잖아 어떻게든 평생 먹으려고 무리한 거지
-이미지 손상이 두려워 받아들일 줄 알았겠지만 그딴 거 신경안씀
-근데 진짜 똑똑해 보이더라
ㄴ 금융계에선 투자의 신으로 평가받음
ㄴㄴ 금수저도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이룩한거잖아 ㅁㅊ
-이전비용 1500억? 껌값이네 버리지 뭐
ㄴㅅㅂ 졸라 간지난다
ㄴㄴ 이시국에 간지? 멈춰!
ㄴㄴ 이전하지 마시고 저 100만원만...
ㄴㄴㄴ 저도 100만원만 한일은행 0176455...
-개시끼 잘생겼드라
-ㅅㅂ 세계1위부자인데 25살이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비율좋고 몸도 좋아 ㅅㅂ
ㄴ 고추는 작을거야
ㄴㄴ 너님 고소조심
ㄴㄴㄴ 힉 아닙니다 미래님 이건 저희집 고양이가...
여론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이거면 됐지.
고추 작다고 유언비어 퍼트린 새끼는... 내가 평균보다 크니까 봐주마.
나는 관대하다.
“오빠, 친구등록 1억 넘었다. 팬클럽도 확 늘었는데?”
“그래?”
내 메신저창에 들어가니 황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거대한 황궁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켠에 있는 방명록은 실시간 방송마냥 글이 좌라락 올라가지만, 황궁 안엔 둘러볼 게 없었다.
-제발 20대라면 윤동욱 응원합시다
-줴엔장, 믿었다고! 20대의 구원자!
-20대의 구원자!
-초기 미래펀드 가입자로써, 짐까지 수익률 490%다 2년만에.
-형, 나 100억만
-이 형 음악 리스트 전부 제시노래만 있다
-여윽시 일편단심
부담스러워.
“좀 꾸며 오빠.”
“귀찮아.”
“팬클럽에 글도 좀 올려줘. 셀카도 올리고.”
“부담스러워.”
거긴 좀 광신도 모인 곳 같아서 싫어.
아무도 내 정체를 모르는 코인게시판이 편해.
거기가면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거실 쇼파에 누워 뒹굴뒹굴 시간을 보냈다.
매일 예정된 시위참여자는 계속 줄어들었다.
둘째 날 반 이하로 줄었고, 엿새가 지나자 서른 명도 남지 않았다.
저들은 누군가에게 돈이나 자리를 약속받았겠지.
무언가 약속을 받고, 선동한 이들.
샅샅이 조사하라고 했으니 받아먹은 게 있으면 사태종료 후 털어버린다.
띠링.
“아. 거절당했네.”
“어? 뭐?”
“2020 올림픽 파트너. 일본이 거절했어.”
2000억을 주고 올림픽 파트너가 되는 제안서를 보냈다.
대신 메타버스 중계를 하는 조건을 달았는데 IOC와 일본 측에서 거절했다.
“힝. 2000억이 뉘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냥 받지.”
아니야 예하야.
“우리가 메타버스에서 방송하면 세계 각국의 공중파 방송에서 반발하겠지. 중계권료도 내려갈 거고. 거절하는 게 맞아.”
“엥. 실패할 거 알면서 그런 거야? 왜?”
“글쎄. 혹시 몰라서. 일단 준비는 시켜야겠다.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미래를 안다.
올림픽의 권위와 IOC의 영향력을 1/10토막 내는 도쿄올림픽.
좀 더 제대로 박살내주마.
-메타버스 중계 연습해주세요. 내년까지 있을 가능한 모든 대회를 메타버스로 중계 해주세요.
기획실에 문자를 넣었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재밌겠다.
신난다.
도쿄올림픽 개박살.
“오빠, 미소가 악당 같애.”
“크크큭. 내 안의 봉인이 풀리고 있다.”
니혼 사요나라.
약속한 날이 되었고. 서른명의 시위자가 남았다.
정치인들, 전문가들은 한주동안 욕을 무진장 먹다가 사라졌고, 노총의 봉고차는 오히려 늘었다.
겁먹은 30명의 파업근로자가 옹기종기 모여서 힘없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번엔 채인수가 나섰다.
전엔 그룹 전체의 방향을 말하려고 나섰지만, 목을 치는 역할에 내가 나설 이유는 없지.
내가 했던 것처럼 본관 앞에 경호팀의 벽을 만들고 채인수가 섰다.
“수많은 국가에서 미래 글로벌 애니메이션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이미지, 조건, 입지, 상징성 등 다양한 후보를 고른 끝에 저희는 세네갈로 회사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설마 진짜 옮길 줄은 몰랐겠지?
너희 서른 명, 앞으로 어떻게 살래?
얼굴도 다 공개됐는데.
아프리카 국가 중 정치가 그나마 가장 안정된 국가.
추가로 한국에 대한 우호도가 극도로 높은 나라이며 아프리카에서 미래 메신저 사용률이 가장 높은 나라, 세네갈 되시겠다.
“오늘부터 미래 애니메이션 직원에 대한 연장 계약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계약기간을 존중하되 각자 계약이 끝나면 떠나야 합니다. 2년 후 모든 계약이 종료되면 한국에서 완전 철수하게 됩니다. 향후 직원 고용은 세네갈에서 이뤄지며 직원 모집은 글로벌, 메타버스 비대면 면접으로 이뤄집니다. 기존 직원이 글로벌 애니메이션에 채용될 수는 있지만, 가산점은 없습니다.
본래 한국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부흥시켜 세계 NO.1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반쯤 기부사업이지만, 한국에서 되려 이용하려 하므로 떠납니다.
앞으로 미래 그룹은 글로벌 기업으로써 각국에 차별을 주지 않고, 글로벌 전체를 위해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채인수의 말을 잘 들어보면 떠나는 이유는 정부 탓이다.
정부 탓.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구경만 했지만, 어쨌든 정부 탓임.
당장 여당에 대한 반대당의 성토가 쏟아졌고, 미래그룹에 특혜를 줘서 되돌리라는 시위가 이어졌다.
1500억 써서 내 포지션을 굳힌다.
나는 괴롭힘 당해 떠나는 천사 포지션이다.
- 작가의말
민형수는 꽤 공들여 설계해서 백제그룹 때부터 주우욱 나올 정의로운 캐릭이었는데... 스토리 몇개를 스킵했더니 뜬금없이 떼쓰는 아이가 됬네요... 흠... 아 몰랑 형수야 미안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