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일본방문
정치공세가 사라졌다.
전세계 군부와 정부로부터 숟가락 얹으려고 끝없이 연락이 오고 돈 좀 기부하라는 정치권의 협박 겸 달래기가 끝없이 이어졌었는데 싹 사라졌다.
건드리면 문다.
누구 하나 물려봐야 안 건드리지.
11월이 되었다.
두 달 간 메타버스로 인해 세계가 요동쳤다.
온갖 기업이 파티에 들어왔고, 신규 커뮤니티를 만들고 충돌영역을 정리하느라 세계 주식시장이 요동쳤다.
직원을 계속 뽑고 수많은 TF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와 상관없이 난 한가하다.
“아, 심심하다.”
일이야 전화나 메신저로 해결한다.
방향만 정해주면 형들이 열심히 해준다.
“여행이나 갈까? 아...... 그것도 귀찮다.”
“여행? 에에에. 그래.”
귀가 솔깃했던 예하가 축 늘어졌다.
띠리리리.
인터폰이 울리고 스케줄 비서가 왔다.
“......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스케줄이 있습니다. 직접 하셔야 합니다.”
수많은 스케줄을 채인수형한테 떠넘겼더니 나선혜 스케줄비서가 경고하듯 말했다.
“뭐죠?”
“예비군 훈련입니다. 다음 주에 본사 훈련 8시간짜리를 받지 않으시면 2박 3일 캠프에 나가셔야 합니다.”
뚜두두둥.
아 시발. 시발시발.
내가 예비군 훈련이라니!
“음...... 빠지면......”
“감옥에 가시지는 않겠지만, 그룹에 엄청난 악영향이 끼치게 됩니다. 지금껏 쌓아올린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군대를 빠지면 한방에 훅 갑니다. 기획실 계산으로는 1조원 이상의 이미지 손실을 볼 거라고...”
무슨 1조씩이나.
“네. 일단 가는 걸로 하고... 빠지는 방법 있는 지 조사 좀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일단 스케줄에 넣어두겠습니다.”
나선혜가 떠나자 예하가 눈을 반짝이며 매달렸다.
“오! 오빠 군복!”
“왜?”
“엄청 멋질 거 같아. 군복입은 오빠. 그러고 보니 오빠 총도 쏴봤어?”
기억도 안 난다.
작년엔 비가 와서 밴드오브브라더스 시청으로 때웠고...... 어...... 총 쏴본지 20년 넘었네.
“쏴봤지. 특등사수였어.”
내가 왼쪽으로 쐈었나? 오른쪽으로 쐈었나?
기억도 안 난다.
“우왕. 회사 예비군이면 나도 갈 수 있어?”
“군대가 장난인줄 알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한몸 불사르는 애국의 현장을 물로 보지마!”
“힝. 지송. 지송.”
“장난이야. 아...... 벌써 가기 싫다. 태풍 한 달 연속으로 와서 예비군 훈련 취소되면 좋겠다.”
어째서인지 군복에 로망을 보이는 예하를 위해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놀았다.
군복을 입으면 남자는 마초가 된다.
그날 밤은 유독 뜨거웠다.
간절히 바라면 하늘이 이루어준다더라.
사흘 후 무수골 저택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CIA 한국 지부장 칼리 페르난도 입니다.”
수행비서가 통역해줬다.
“예. 오랜만입니다.”
CIA와는 다섯 번 정도 접촉했다.
핀빙빙 사건을 통해 인연이 닿았고, 미국에서 최중요 인사로 분류되어 극진히 도와주고 있다.
소설에서처럼 막무가내로 납치하려는 시도는 없고, 일단 도움을 주면서 미국으로 귀화를 조심스레 추천하고 있다.
“혹시 도청에서 완전히 안전한 곳이 있습니까? 저희 둘만 비밀리에 대화하고 싶습니다.”
“제가 영어가 안 되는데요?”
“한국말 조금 알아요. 번역기 쓰시오.”
진짜 조금 아네. 조금.
“그러죠.”
걱정하는 예하를 남겨두고 본관 지하로 갔다.
도청, 감청이 불안해 중요 회의실로 개조한 알루미늄 방이다.
각자의 경호원이 들어가 전자기기 체크를 한 후 둘만 남았다.
“어제 한쿡 국정원 도청 감지 했습니다.”
“네?”
“들어보시오.”
칼리 페르난도는 폰에서 미래 메신저로 들어가 녹음파일을 틀었다.
해킹을 막으려고 저기 넣어놨네.
-부장님 그놈 다음 주에 예비군 훈련 한답니다.
그래서?
거기서 잡죠.
되겠어?
경호팀도 없고 회사원들과 있는 거 아닙니까? 예비군부대와 협력하면 간단합니다. 괴한이 납치한 걸로 속이고 끌고 가서 일단 말을 듣게 만들면...... 이게 애국 아닙니까?
“저희 분석 귀하입니다.”
“날 납치하겠다는 말이네요. 국정원이 왜?”
“글쎄요. 아마도 머니? 많은 머니.”
아.
내가 세상을 우습게 봤구나.
세상은 상식적으로 움직이지만, 아주 가끔씩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날 납치하는데 성공하면 3000조. 한국을 살 수 있는 돈이다.
미친 짓 할 만 하지.
“이건 확실한 겁니까?”
못 알아들어서 번역기로 써서 요상한 영어를 보여줬다.
그래도 적당히 대화는 된다.
“네. 국정원 국내 4부장인걸로 확인되었오.”
“예...... 감사합니다.”
“그냥 저희 미국으로 오시는 게. 그러하시면 특급 경호와 그리고......”
“생각해볼게요. 지금 당장은 아니군요.”
“예.”
“고맙습니다. 보답은......”
“없습니다. 저희가 비밀경호를 붙여도 되오? 듣기로 중국쪽 킬러 들어왔데 표적 모릅오.”
“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답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건설적이오. 파일 드렸오.”
이 아저씨 한국말 못해.
알아듣긴 하니까 잘하는 건가.
악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 뭐야? 무슨 일이야?”
예하가 달라붙어 물어봤는데 대답해줄 수 없다.
“나... 초대받았어. 예하야 여행가자.”
“여행? 어디?”
“음... 일본, 칠레, 호주, 필리핀.”
“어. 어? 우와아아앙.”
“가자. 일단 사장단 회의부터.”
아까 그 방에 핵심임원들을 모아 대략적인 상황을 전했다.
큰틀을 잡고 이제 한국을 떠난다.
사업상 해외출국을 해서 예비군 훈련을 받지 못하면 다음해로 연장된다.
일단은 피하는 게 한계다.
개인이 국가권력을 이길 순 없다.
아직은.
과연 납치 계획이 부장의 독단인지, 상부의 의지인지 아는 게 중요하겠지.
“안녕하세요. 여기는 비행기 안이에요. 여행을 떠났어요.”
예하가 개인방송을 켰다.
예하의 매니저가 앞자리에서 돌아서서 송출카메라를 잡았다.
-제시 만세!
-제시 예뻐!
-일 안하고 또 놀아?
-선글라스도 안하네? 사람들 다 달려들겠다
“아하항. 일하러 가는 거예요. 협상과 조율... 뭐 그런거래요. 그리고 요건 전세기에요. 다 아는 분들이라서 마스크랑 선글라스 안 해도 되요. 헤헤헤.”
-ㅗㅜㅑ 전세기 클라스
-오빠랑 같이 가나보네
-겸손하게 전세기를 타네. 전용기 없나?
-솔까 기부한 금액 조금만 줄여도 전용기 살 텐데
“그러게요. 오빠오빠. 왜 전용기 안 사? 오빠만 탈수 있는 전용기. 전세기 자주 타는 거면 전용기가 낫지않아? 맨날 도청탐지하고 수색하고 힘들잖아.”
“어... 그건... 사긴 살 건데.”
지금은 아니야.
내년에 공짜 매물 쏟아지거든.
그때 사줄게.
“울 오빠는 진짜 자기한테 돈을 너무 안 써요. 하루 한끼는 라면이나 삼각김밥을 먹는다니까. 진짜. 왜 그걸 먹냐니까 그게 제일 맛있대요. 참.”
-플렉스다 플렉스
-어설픈 부자는 명품 찾지만 진퉁부자는 삼각김밥 찾짘ㅋㅋㅋ
-라면 ㅅㅂㅋㅋ 아는 맛, 생각나는 맛 ㅋㅋ
-자수성가한 재벌은 서민음식 먹는다더니. 재벌2세는 고급만 찾고
“자,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어요. 짜잔. 저희는 이제...”
세 시간의 입국수속을 마쳤다.
“세 시간... 입국수속 중 최장시간이네요. 후아 힘들다. 이제 우리는 도쿄 올림픽조직위원회를 찾아갈 거에요. 올림픽 메타버스 중계를 위한 최종 협상이에요.”
-놀러간게 아니네
-ㅅㅂ 라면먹는 25살이 하는 일이 올림픽 중계협상
-근데 글로벌 회장이 할 일은 아닌거 같은데
-놀러온거 맞네
-ㅅㅂ 갭차이 너무난다 ㅋㅋㅋ
-아 몰라 제시 예뻐!
-제시 예뻐!
저 댓글 누구지? 놀러온 거 맞췄네.
원래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예비군 훈련을 빠지기 위해 나오는 김에 방문한 것이다.
나중에 당위성을 만들기 위한 알리바이 작업이다.
다행히 예하와 내가 사귀는 데 반감이 크지 않은 것 같다.
반감이 큰 이는 예전에 떨어져 나갔겠지.
예하가 거리 풍경을 비추며 재잘재잘 떠드는 사이 조직위원회에 도착했다.
건물 1층 비어있는...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로 안내받은 후 두 시간을 대기했다.
많이 바쁜가보다.
예하와 떠들고 노닥거리고 방송하는 거 구경하며 기다리니 막내급 사원 하나가 땀 흘리며 뛰어왔다.
“죄송합니다. 연락을 늦게 받았습니다.”
글쎄.
오늘 두시간전에 회담하기로 약속되었는데.
회담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개인방송을 껐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중계권을 산 방송사에서 반대가 심합니다. 죄송합니다.”
일본말은 모르겠는데 저 고개숙이며 스미마센 이라는 말을 할 땐 진짜 진심으로 미안한 것 같은 느낌이 묻어나온다.
느낌이 묻어나오게 사과하는 훈련을 따로 하는 걸까.
결론이 정해졌고, 진작에 거부당한 걸 굳이 직접 와서 수모당하며 재차 확인했다.
“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하에게 방송을 틀라고 시켰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7시간 걸렸는데 결렬되었어요. 힝. 1분 만에 회담 끝. 실패했어요.”
-캬, 일본 클라스 직이네.
-무슨 협상이기에 1분만에 결렬?
-글로벌 1위 기업인데 이렇게 보낸다고?
-자부심의 일본. 입국심사 3시간 플렉스.
“무슨 협상이냐면요, 올림픽을 메타버스로 중계하는 거예요. 달리는 선수들 옆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중계죠. 그런데 거절당했어요. 힝. 그러므로 이제 초밥 먹으러 갑니다! 예아~”
예하 신났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 낙담할 것도 없다.
그저 내가 고생했는데 일본에서 거절한 것만 세계에 알리면 된다.
이 정도 했으면 기자들이 열심히 기사를 쓰고 있겠지.
“예하... 제시야. 비행기로 돌아가자.”
“어. 어?”
“이번 일로 일본이 기분나빠할지도 모르잖아. 돌아가자.”
“에? 일본에 왔는데 초밥 안 먹고?”
“야. 너는 일본이 얼마나... 방송 소리 좀 꺼줘요. 네. 고마워요. 일본 위험해. 일본에선 검사가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어. 기소 없이 20일간 잡아가둘 수 있다고.”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기소 없이 잡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냥 막 잡을 수 있다고. 검사가 너 죄있는 거 같은데? 이러고 잡아가면 끝이야. 변호사도 부를 수 없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어. 그냥 20일간 잡혀있는 거야. 그러다 20일이 지나면 풀어주고 다시 잡아. 어? 너 다른 죄가 있는 거 같은데? 이렇게 계속 무한히 잡을 수 있어. 재판도 없고, 변호사도 없어. 왜냐. 기소되지 않으니까. 죄가 없는데도 잡혀있을 수 있어.”
“에에이 설마. 일본은 최고 선진국 중 하나잖아.”
“카를로스 곤이라고 닛산 자동차 회장이 있거든. 적자로 망해가던 닛산을 지난 해 세계판매 1위로 만든 회장이야. 이 아저씨가 이런 식으로 5개월간 잡혀 있어. 재판도, 변호사도, 가족도 만날 수 없이 그냥 마냥 막! 지금까진 일본에서 건들지 않았지만, 네 방송을 일본 언론이 알리면 기분 나쁘다고 우릴 잡아가둘 수 있어. 조심해야지. 튀자. 빨리.”
“어? 어.”
후다닥 공항으로 이동했다.
전세기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어? 오빠 혹시 미리 준비한 거였어?”
“응. 설마 일본에서 자려고 했어? 저 위험한 나라에서? 큰일 나려고.”
“그런데 왜 미리 말 안했어?”
“삐질까봐.”
“아하. 고맙네. 고마워. 으이고 고마워서 죽겠네. 죽겠어.”
“예하 너 할머니 같다.”
예하가 예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으어어어어. 아... 진짜 너무해. 앗. 오빠! 방금 나 신기한 경험함.”
“어? 뭐?”
“나 이 장면 꿈에서 본거 같아. 나 예지력 있나? 예지몽?”
“꿈 아니고, 홍콩에서 경험.”
핀빙빙을 처음 만나러 홍콩 갔을 때도 이랬지.
“아아악! 슬픈 기억이 떠올랐어. 흐어엉. 너무해. 그땐 저녁이라도 먹고 왔는데.”
“가자. 맛있는 거 먹게 해줄게.”
“...... 어. 뭐 먹을 건데?”
“기내식. 칠레까지 14시간 걸린대.”
“아아아앙! 미우우우우우어~”
예하 놀리는 거 왜 이렇게 재밌지?
- 작가의말
국정원납치? 말도안돼...
라고 하실까봐 카를로스곤 사건을 바로 넣었어요. 세상엔 말도 안되는 일이 참 많이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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