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덕유산
큰 테이블이 있고, 양쪽에 숯불 불판이 두개 피워져 있다.
데뷔 7년차에 중견그룹이 된 트비스타는 불판 하나를 맡아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먹고 있다.
가오리는 자기네 회사 사원 한민선과 나란히 서서 불판 하나를 굽고 있다.
꽤 잘나가는 조연배우가 된 차정미는 안절부절 못하며 고기를 주워 먹고, 낯가리는 닥똥길영주 부부는 겁먹은 쥐며느리 커플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다. 한심한 것들.
루비와 예하는 서로 팔짱을 끼고 볼 붙이고 앉아 술을 들이켜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얘들도 그룹이구나. 그 빌어먹을 노래.
“윤회장님, 그거 알아요? 우리가 7년 동안 번 것보다 제시가 스탠드 투게더 한 곡으로 땡긴 게 더 많대요!”
“꺄아. 우리 막내 성공했어.”
“부럽다아아.”
“역시 인생은 한방.”
트비스타는 짬밥도 먹었겠다, 소속사의 간섭도 약해져서 인지,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트비스타도 한방 터트리세요.”
“그게 마음대로 되남유.”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시넹.”
“예하 부러워.”
아, 어쩌라고.
“언니들 진정해. 쫌. 벌써 좋은 세상 간 거 같아.”
“회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시죠. 사적인 자린데.”
“에? 그럼 어떻게 불러요?”
“오ㅃ...”
푸흡.
몸을 말고 있던 쥐며느리 닥똥놈이 웃는다.
이 쥐며느리새끼가.
고기를 굽고 있던 가오리가 소리쳤다.
“핸플! 저놈 별명 핸플이에요.”
“에? 무슨 뜻이에요?”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오리는 못 들은 척 고기를 뒤집었고, 예하는 볼을 붉히며 고기를 집어먹었다.
길영주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다가가 귓속말했다.
저기요 쥐며느리 암컷씨? 뭐하십니까?
“꺄아아.”
“완전 야하다아.”
“평균이상이란 거네. 예하는 좋겠다아.”
“대놓고 연애도 할 수 있고. 부럽다아앙.”
아 시끄러워. 예하 너 얘들 왜 부른 거야?
예하의 개인방송에 몇 번 출연해 함께 놀고, 트비스타의 공연에 예하가 몇 번 나가며 친하게 지낸 건 맞는데, 난 별로 만나지 못했다.
“핸플놈아. 받아.”
가오리가 어깨를 툭툭 친다.
고기 접신가 해서 봤더니 고기집게다.
“우리끼리 먹자며. 니 차례임.”
“어? 어.”
고기 집게를 들고 불 앞으로 갔다.
두꺼운 소고기, 두꺼운 돼지목살, 토마호크 양갈비 숯불위에서 지글대고 있다.
“오랜만.”
회귀전 사귀었던 예전 여자친구 한민선과 나란히 섰다.
“어. 힘든 거 없지?”
“일? 재밌어. 세상에 별의별 직업이 다 있더라. 아, 미싱공장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 동네 4,5층 빌딩들 보면 두 개 중 하나에 미싱공장이 있어. 닭장 같은 공간에 미싱기 줄줄이 서 있고, 여자들 40명씩 붙어서 하루 종일 타다다다다 하는 그런 곳이 정말 많더라. 시급이 아닌 품떼기로 일하는데 시간당 5천원 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열두 시간씩 일하는데 6만원 받고. 불쌍해.”
“어... 사각지대네.”
“그니까. 도와준다고 해도 이거 말고 할 게 없다며 겁먹고 주저앉는 사람들이야. 보면 외국인 여자들 많고, 불체자도 섞여 있고. 밤엔 노래방 일 나가고. 불쌍해. 정작 노조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인데.”
“그러게...... 일은 힘들지 않아? 월급이 부족하거나.”
“충분해. 그룹 평균 월급 받고, 괴롭힘도 없고. 딱 좋아. 일하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는 느낌? 아주 만족스러워.”
노노노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 윤회장. 고기 좀 가져와봐.”
가오리놈이 소리쳤다.
트비스타 틈에 앉은 가오리가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말투로 녹아들었다.
꺄하하하하. 세최부가 구운 고기. 와아아 회장님 잘 먹을게요. 가오리 오빠 대단하다.
울컥.
“아니 왜 쟤는 오빠고 나는 회장님이야?”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한두 살 나이차에 다들 예하만큼 예쁜 최고의 아이돌 들.
물론 예하가 더 예쁘지만, 큰 차이 없다.
세계 1위 수영선수와 세계 10위 선수의 차이가 0.01초 차이인 것과 비슷한 거지.
“왜냐면요... 돈 너무 많으셔서. 무서워요.”
트비스타 리더의 말에 화가 났다.
“돈 많으면 오히려 잘 보여야지.”
내 말에 지들끼리 서로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와아. 잘 보이자아.”
“오빠, 오빠오빠오빠아.”
“한잔하쟈 오빠야.”
“안주도 앙~”
달려들어 둘러싸고 술과 안주를 먹이는데...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각본... 각본이었나?”
정신을 차릴 수 없네.
미녀들의 공격에 에너지가 넘친다.
기 빨려.
“와. 말 놨다.”
“에헷. 우리도 패밀리 입성?”
“줄 잡았다아아! 예하야 고마워어!”
“줄은 무슨?”
“동욱오빠, 친한 사람 막 챙겨주고 퍼주잖아요.”
“우리도 이제 패밀리임.”
“쫄딱 망해서 길에 나앉으면 택시라도 한 대 사주겠지.”
“우오 택시드립. 완전 아재.”
“언니 말하는 게 더 아재거등.”
정신없어.
“내 친구라고 딱히 챙겨주는 거 없는데.”
“챙겨주지.”
닥똥.
“나랑 닥똥 봐라. 고졸인데 웬만한 회장보다 강하잖아. 주제에.”
가오리.
“나도 엄청 챙겨줬잖아.”
한민선.
넌 그냥 일반사원이잖아.
“전 면식도 없는 같은 대학 후배일 뿐인데 탑대우 해주셨고요.”
차정미.
너에겐 네가 모르는 과거의 빚이 있어. 말할 수 없지만.
“내 생명의 은인이야.”
루비.
쟨 벌써 취했네. 어쭈 예하도.
“에헤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둘이 볼을 붙이고 앉아 날 바라보는데 눈에 하트가 뿜뿜한다.
천국의 문에 들어갔구나.
없는 사람 취급하자.
“난 딱히 받은 거 없는데?”
새로운 목소리.
정식예명 모닥불PD가 랍스타치즈구이가 가득담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언니이~”
예하가 벌떡 일어나 달려가 안으...
“랍스타!”
려다가 멈췄다.
다 쏟아질 뻔했네.
예하를 보면 가끔 비글같다.
특히 취했을 때.
음... 예뻐.
“안녕하세요. 모닥불이에요. 닥부리라 불러주세요.”
“예. 저희는...”
한바탕 인사를 하고 따끈따끈한 랍스타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언니 어디 있었어요? 남친은?”
“예하야, 예하야. 내가 오늘 특별방송 진행해야 하는데 사표 쓰고 튀어나왔거든. 사표 쓰고 남친놈한테 같이 덕유산 가자고 집에 뛰어갔거든. 그런데 여자랑 있더라.”
“헐.”
“세상에.”
“헐벗은 채로.”
“맙소사.”
“그걸 살려뒀어요?”
“난 개인 방송 켜고 송출중이라서 못 때렸어.”
“......”
그놈은 영원히 매장이네.
모닥불 남친은 몇번 봤는데 그냥 잘생긴 평범한 놈이었는데.
“암튼 이제 난 솔로다아아. 에이. 마셔. 마시자.”
“마셔!”
“우와. 랍스타 진짜 맛있어요!”
“후후후. 많이 드세요.”
뭔가... 기가 빨린다.
둘러보니 남자는 나와 가오리닥똥밖에 없다.
경호팀이나 매니저그룹들은 두칸이상 떨어진 자리에 포위형식으로 자리잡고 조용히 술마시고 있고.
여자만 많으니까 남자가 기를 못 펴는구나.
“동욱쓰~ 뭐해? 고기 타잖아.”
모닥불이 다가와서 집게를 뺏었다.
“가서 먹어. 내가 구울게.”
“오늘 깨져서 우울해. 요리하고 싶어. 노노노님도 가서 드세요.”
“어... 그래.”
꼬냑병을 들고 온 모닥불이 병나발을 불면서 고기를 뒤집는다.
무서워.
떨어져 있어야겠어.
“우와아아. 동욱오빠 왔다.”
“오빠오빠오빠아아아. 우리 중 누가 제일 예뻐요?”
“예하가 어디가 좋아요?”
“솔직히 몸매는 내가 더! 꺄악 막이래.”
“및 인년아. 자제해. 제시가 노려본다.”
“히익. 미안해 막둥아.”
기 빨린다.
다들 빠르게 취했다.
가오리 혼자만 신나서 대화를 주도해간다.
“오빠는 왜 그렇게 돈을 뿌려요?”
“내가? 얼마 뿌리지도 않았는데 뭐.”
“아닌데. 기사 봤어요.”
“맞아. 분석기사 있었는데. 3년 동안 40조 정도 뿌렸대.”
“와 세상에......”
“그러니까 얼마 뿌리지도 않았다고.”
“세상에. 소름.”
“40조가 아니라 40억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너 40억 넘게 있어.”
“어 진짜? 어쩐지 소원이 없더라.”
정신없어.
예쁜애들이 둘러싸고 재잘대는데 정말 당황스럽다.
도와줘야 할 예하는 루비랑 얼굴을 맞대고 소근 대는데 ‘너네 언제 헤어져? 날 위해 깨져라.’ 이런 소리 하고 있고.
12월 말 고산의 추위가 전혀 안 느껴진다.
더워.
“왜 그렇게 뿌리냐고요오 어? 안 마셨어. 마시고 답하기.”
“마쎠라 마쎠라.”
“쭉쭉쭉쭉쭉.”
너네 잘 노는구나.
마시고.
예하 대신 센터가 된 예쁜 애가 넣어주는 고기를 씹고.
“보호받으려고.”
“응? 뭘요?”
“사람들의 호의를 받아야 나중에 위험할 때 보호받지. 나랑, 가족이랑, 친구들까지. 한국 사람 전부가 날 보호해줘야 안전해지지.”
“에이. 대통령보다 경호팀이 많으면서.”
“방금은 쫌 겁쟁이 같았어요.”
“대실망.”
“그러므로 한잔 더.”
“왜 자꾸 날 술 메기려고 해요오오오. 나 취하게 해서 어쩌려고요.”
“꺄아 귀여워.”
“잘 생겼다아.”
“잡아먹자!”
안 통하는구나.
마시고.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돈이 너무 많아서. 위험해. 5000만 명이 보호해줘도 안전할까 싶을 정도로 불안해. 너흰 모르겠지. 내가 누구랑 싸우게 될지.”
파도를 일으키는 신과 싸워 살아남으려면 지지와 보호가 필요하다.
“목소리 깔았어. 캬하하.”
“귀여워!”
“잡아먹자아.”
안 통하는 구나.
일어났다.
“어디가요?”
“어디?”
“화장실.”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오빠. 나도 같이. 무서워.”
예하가 일어나서 비틀거리며 왔다.
강력한 랜턴을 들고 고산 언덕의 오솔길을 걸었다.
“좋다. 여기.”
“그러네. 꽤 괜찮다.”
“오빠는 바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섬만 가고.”
“바다가 좋은 게 아니지.”
경호원의 호위를 생각하면 섬이 안전하니까 그리로 간 거였다.
중국의 습격을 당한 후엔 아예 외국이나 섬에 갈 생각도 못 하고 있고.
“아이쿠.”
화장실 가는 길에 경호팀이 저녁을 먹고 있다.
야간 조는 고기만 먹고, 근무가 끝난 조는 술과 고기를 먹는다.
“일어서지 마세요. 드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이런 거리감.
편하게 대하라고 해도 그게 되지 않지.
그래서 친구가 더 소중한 거지.
캠핑장 중심에 자리 잡은 우리 주변으로 넓게 포위한 경호팀과 매니저팀이 돌발상황에 대비한다.
“미안해. 다들 밤새 교대로 근무 서실텐데.”
굽신굽신 인사한 예하가 내 팔뚝에 매달리며 중얼거렸다.
“놀러 와서 일하는 거면 그렇지만 돈 주잖아. 야간 근무 한번 서고 24시간 인정받아서 일급의 5배인데. 만족할거야.”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
기업이 언제나 악인 건 아니고 노동자가 언제나 선한 것도 아니다.
선만 잘 지키면 된다.
휴일에 돈 안주고 끌고 나오는 건 범죄지만, 야근 2배 챙겨주며 부르는 건 좋은 일이지.
자원한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며 더 달라고 하면 잘라야지.
화장실에서 헤어진 후 예하를 기다리니 얼굴에 물기가 가득한 예하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세수했어?”
“어. 어지러워서. 베이스화장만 했으니 괜찮.. 오빠... 나 얼굴이 어는 거 같아.”
“어. 언다. 살얼음 보인다. 러시아 냉미녀 같아.”
“히긱. 마스크 쓴 거 같아. 으으. 나 얼굴 떨어진 거 같아.”
“바보냐. 빨리 가자.”
가다가 아까 본 경호팀에 양해를 구해 숯불 위 불판을 치우고 예하 얼굴을 구웠다.
취하니까 별걸 다하네.
물기를 닦아내고 얼굴을 숯불구이 하니 좀 살려고 한다.
“후와 죄송해요. 재밌게 노세요.”
예하가 90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돌아가는 길.
“오빠. 언니들이랑 서먹해보여.”
“어? 그냥 할 말이 없네.”
“아니 딴 거 신경 쓰는 거 같아서. 그거 생각하지? 나 부상.”
“......”
바보주제에.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