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정 경기
이란과는 결국 2:2로 비겼다. 원체 이란의 축구 스타일이 한국팀에 우위를 갖는 데다가, 도라익이 공만 잡으면 서넛이 우르르 몰려와 드리블은 물론 패스까지 방해했다.
한국팀 역시 라인을 적당히 내리고 하다디에게 전담 마크를 붙여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았다.
아시아 축구 연맹은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하다디에게 A매치 1경기 출장 정지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란의 다음 상대가 현재 조 꼴찌인 이라크여서 징계에 별 의미가 없었다.
영국으로 돌아간 도라익은 4경기 동안 혼자 팀의 5골을 전부 넣으며 활약했다. 팀 역시 1승 2무 1패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4경기에서 5점만 딴 게 대단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팀이 무승부를 많이 낸 덕분에 스토크시티는 리그 10위까지 순위가 급상승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도라익은 중국 창싸로 가는 비행기에 앉았다.
"비겁한 새끼들. 베이징이나 상하이 두고 굳이 창싸라니."
창싸는 후난성의 수부로, 삼국지에 나오는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태수로 있던 곳이다. 꽤 오래전에 창싸에서 한국팀에 1:0 승리를 거둔 적이 있어 중국팀은 이번 경기 홈 구장을 창싸로 정했다.
"밤에 잘 때 커튼 치고 귀마개하고 자. 어쩌면 호텔 바깥에서 폭죽을 터뜨릴지도 몰라."
체면 때문에 현지 정부가 순찰차까지 안배해 이런 일을 방지한다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현재 한국은 4승 2무 18점으로 조 1위이고, 중국과 이란 모두 4승 1무 1패 17점으로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선배님. 형들이 너무 풀어졌는데요."
도라익은 화장실 핑계로 고명준한테 달려가 고자질했다.
이란으로 갈 땐 날씨나 거친 플레이 스타일, 주심의 판정 등 경기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연관된 얘기만 주고받았다.
그런데 얕보는 마음이 큰지 이번엔 경기와 무관한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도라익의 신고를 받은 고명준이 지체 없이 출동했다.
"야. 이것들아. 모여 있지 말고 자기 자리로 가서 전술 숙지하고 상대 선수 분석해."
고명준의 호통에 선수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지난 경기 후반에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어? 그리구 이번엔 중국 홈이야. 어쩌면 전반전부터 강하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죄송합니다."
뭔지 모르지만, 선수들은 일단 잘못부터 시인했다.
"저기서 가만히 듣자니 뭐 폭죽 어쩌고 교통 정체 어쩌고.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그런 얘긴 입에 올리지도 마.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알았어?"
"네!"
"니들이 이러다가 월드컵 16강 못 가면 그때 뭐라 할 거야?"
고명준이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찡그리며 말했다.
"아닌데요. 16강은 도라익이 말한 건데요. 전 그런 말 안 했는데요."
처음 보는 고명준의 모습에 일부 선수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푹 숙였다.
"설사 월드컵 진출이 정해졌다고 해도 풀어지면 안 돼. 예선전 경기는 당연하고, 친선전을 뛸 때도 월드컵이다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리그 경기를 뛸 때도 늘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 고민하고, 훈련할 때도 정신줄 절대 놓지 마. 알았어?"
"네!"
"경기에 집중 안 하는 놈 발견하면 내가 감독님께 대표팀에서 쫓아내자고 칼 물고 우길 거야."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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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대기하라고 합니다."
공항 직원과 대화한 통역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거 봐. 내 이럴 줄 알았다."
"몇 년 좀 나아지나 했더니, 또 이러네."
빨리 호텔에 짐을 풀고, 경기장에 가서 잔디를 밟으며 적응하고, 또 전술 회의도 열어야 하는데 공항에서 그만 발목이 잡혔다.
"자, 다들 편하게 앉아서 쉬어."
통역과 대화를 마친 차 감독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밖에 우리 라익이 팬들이 몰려와서 길이 다 막혔대."
창싸는 해마다 대형 공연을 수십 번 열 정도로 대중예술에 열광하는 도시다. 그래서 공항에 팬들이 몰려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엔 규모가 좀 컸다.
"5천 명이요?"
도라익 본인이 가장 당황했다.
"여기 한국 사람 그렇게 많이 살아요?"
"한국 유학생이 일부 있지만, 대부분 현지인이래."
다행히 자주는 아니어도 이런 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기에 공항은 빠른 조치로 길을 텄다.
"시위 진압하나?"
방패까지 든 경찰들이 두 줄을 쭉 서서 한국 선수들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지하로 내려가서 차를 타면 됩니다."
통역이 공항 직원의 말을 전달했다.
"꺅!"
도라익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프라노가 자괴감에 은퇴할지도 모를 고음이 곳곳에서 터졌다. 곧이어 멀리서 터진 우렛소리와 같은 굉음이 공항을 흔들었다.
수백 개의 피켓이 도라익의 눈앞에 펼쳐졌다. 절반 이상은 영어로 된 피켓이지만, 한글로 된 피켓도 꽤 많았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도라익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환영하는 인파에 꾸벅 인사를 한 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바로 곁에 있는 통역한테 질문했다.
"사정이 복잡합니다. 이따 말씀드릴게요."
[중국팀을 이겨라.]
[도라익 화이팅.]
[질풍의 용사.]
[아시아의 자랑, 아시아의 별.]
도라익은 눈에 들어오는 피켓 내용을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다행히 방독면처럼 생긴 마스크에 방패와 진압봉을 든 경찰들 덕분에 사고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버스에 탔다.
"와. 우리 라익이 대박이네."
"나 봤어. 나 진짜 봤다고."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 중에 스토크시티 유니폼을 입은 팬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오창범은 23번 유니폼을 봤다고 얼굴까지 붉히며 우겼다.
"팬들 때문에 조금 돌아갑니다. 중간에 비포장도로가 있어 버스가 덜컹거릴 거니까 조심하세요."
대형 버스는 바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낡은 기와집이 가득한 마을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코너를 돌 때 바퀴가 도랑에 빠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경험이 풍부한 버스 기사가 완벽하게 해냈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난 다음,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탔다.
"호텔까지 1시간 정도 걸릴 예정입니다. 쉬고 싶은 분들은 쉬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궁금증이 도져 누구도 잘 생각이 없었다.
"통역 아저씨. 아까 공항에 무슨 일이래요?"
도라익의 질문에 통역이 대답했다.
"중국 귀화 선수가 은퇴한 다음 다시 국적을 브라질로 바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말이 많아요."
최근 은퇴한 귀화 선수가 중국 국적을 버린 것 때문에 민심이 말이 아니다. 만약 중국 국적을 버린 선수가 미국이나 독일 그리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의 국적을 땄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후진국으로 인식되는 브라질이어서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가 난 상황이다.
"그게 아니어도 도라익 선수 팬이 원체 많습니다. 도라익 선수 유니폼을 가장 많이 산 게 중국인 거 아시죠?"
기뻐할 일이지만, 도라익은 오히려 얼굴을 굳혔다.
'우리가 좋은 모습을 못 보이면 한국 팬들 역시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잖아.'
도라익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만, 월드컵을 뛰고 돌아온 대표팀에 호박엿을 던진 사건도 있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대부분 선수와 달리, 도라익은 중국 팬들의 원정팀 응원을 경종으로 삼았다.
"도라익 선수. 기사 아저씨가 사인 부탁하는데, 괜찮겠어요? 이후 이동을 모두 책임질 분이니까 부탁 들어줘서 나쁠 건 없어요."
"그럼요. 저 사인 좋아해요."
기사 아저씨가 미리 준비한 A4 종이와 사인펜을 들고 왔다. 그리고 중국말로 뭐라고 말했다.
"아저씨 딸이 도라익 선수 광팬이래요. 집안에 도라익 선수 화보만 백 장 넘게 붙였대요."
"감사합니다. 딸 이름이 어떻게 돼요?"
도라익은 아저씨가 알려준 딸의 이름을 삐뚤삐뚤 그러나 정성스럽게 적었다.
"아저씨 딸이 축구선수 할 거래요. 티비 화면 두 개 박살 내서 집에 티비 없대요."
"왜 집에서 축구 해요?"
"축구장이 없으니까요. 웬만큼 면적이 되는 곳은 다 주차장이고, 공원 같은 곳은 농구 하는 애들이 다 차지했대요."
도라익은 사인을 마친 종이를 두 손으로 건넸다. 도라익이 건넨 종이를 받은 기사 아저씨는 서류철 같은 것에 소중히 끼워 넣은 다음, 도라익의 어깨를 툭툭 치며 뭐라고 말했다.
"도라익 선수한테 경기 잘해서 중국팀 좀 깨워달라는데요."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면서도, 도라익은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헷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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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익이 공을 잡자 환호가 터졌다. 고작 2백 명도 안 되는 한국 관객들이 모인 곳이 아닌 경기장 전체에서 터진 고함이었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플리플랩을 펼쳤다. 먼저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온 다음, 바로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오른쪽으로 치고 달렸다.
프리미어리그에선 반응이 빨라 플리플랩을 펼친 다음 왼쪽으로 가는 게 맞는다. 그러나 중국 수비수의 반응이 느려 처음에 오른쪽으로 친 동작 말고 다시 왼쪽으로 공을 끌어오는 동작이 페이크가 되었다.
중국 선수들은 수비 반응이 조금씩 느리기에 팬텀 드리블 같은 기술은 오히려 효과가 별로다.
공간을 만든 도라익은 바로 슛을 때렸다. 솔직히 아주 각이 날카로운 슛이 아닌데 중국팀 키퍼는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중국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로 도라익의 골을 축하했다. 골키퍼는 얼빠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골대 안의 공을 주워 멀리 뻥 차버렸다.
경기가 재개됐다. 중국 선수가 공을 잡자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공이 귀화 선수에게 넘어가자 야유가 쏟아졌다. 야유에 자극받은 귀화 선수는 능숙한 드리블로 한국 수비수를 돌파했다.
그러나 또 다른 수비수를 만났고, 돌파하니 또 다른 수비수를 만났다. 그렇게 세 명을 돌파한 뒤 다리에 피로가 쌓여 네 번째 수비수에게 공을 뺏겼다.
커다란 환호가 터졌다.
- 도라익 선수 해트트릭에 성공합니다.
- 박창식 선수도 1골을 넣어 한국팀은 경기 종료 5분을 앞두고 4:0으로 앞섰습니다.
"감독님. 라익이 교체 안 합니까?"
차 감독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라익이가 저기 있는 게 저들에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거야."
도라익이 혜성처럼 나타나기 전의 몇 년 동안 한국 대표팀 역시 늘 팬들을 상심하게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차 감독은 도라익을 계속 경기장에 두는 거로 중국 팬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길 바랐다.
'후계 양성이 답이다. 라익이도 언젠간 은퇴할 건데. 다음 협회장 선거엔 출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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