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몽둥이
차 감독의 배려로 9월 대표팀 경기에 빠진 도라익은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홈에서 첼시를 맞이했다.
덕분인지 경기가 시작하고 3분도 안 되어 원거리 슛으로 첼시의 골대를 뚫고 시즌 첫 골을 넣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도라익은 자신이 있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참패를 연신 하며 선수 모두가 이를 악물고 수비 전술을 익히는 데 열중했다. 덕분에 강팀 상대로 문을 잠그는 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그런데 이어진 경기 진행은 도라익의 낙관적인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첼시의 강한 공격에 스토크시티의 양쪽 측면이 너덜너덜해졌고, 거길 돕느라 중앙이 허한 틈을 비집고 첼시가 연속 2골을 넣었다.
'스토크시티는 중앙 수비가 측면보다 나은 팀이다. 좋은 풀백이나 윙백이 귀하기에 스토크시티의 측면은 늘 약점이다. 반면 첼시는 전통적으로 왼쪽 공격이 강한 팀이다. 왼쪽 공격이 강하니 오른쪽 공격도 살고, 양쪽 측면이 강하니 미드필더나 센터백이 골을 잘 넣는다.'
미드필더인 프랭크 램파드가 프리미어리그에서만 176골이나 넣을 수 있었던 건 다 첼시의 이러한 특징 덕분이다.
반면, 스토크시티는 도라익을 포함한 선수들이 중앙을 두드려 수비를 안으로 모은 다음 공을 측면으로 보내 크로스를 올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도 나쁘진 않은데, 문제는 정면 수비가 강한 첼시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윙이나 풀백이 귀하니까 약팀은 중앙이 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중앙을 무너뜨리면 승패를 떠나 경기가 쉽게 풀리는 거고, 중앙을 못 무너뜨리면 행운의 골에 기대야 하는구나.'
경험이 쌓이면서, 공 차는 것 외에도 많은 걸 알면서, 예전엔 잘 몰랐던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도라익은 매 경기 조금씩 성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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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경기에서 볼튼과 1:1로 비긴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맨유를 맞이해 0:2로 패배했다.
성적으로만 보면 찰리의 부재가 큰 영향이 없는 것 같지만, 약팀이 아닌 강팀과 대결할 땐 차이가 극명히 드러났다.
찰리도 약한 모습을 보였던 맨유의 센터백을 상대로 도라익은 파워 포워드 역할을 아예 못 해내며 경기 내내 거의 공을 따지 못했다.
스토크시티는 도라익을 직접 찾는 것보다 강하게 찔러 도라익이 속도로 공을 잡길 바랐다. 그러나 늘 맨유 키퍼가 빠른 출격으로 먼저 공을 차지해 도라익이 헛걸음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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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턴과 1:1로 비긴 경기가 끝나고 도라익과 오창범은 스페인으로 갔다. 월드컵 예선을 끝낸 대표팀은 스페인과 루마니아에서 친선 경기를 하나씩 벌이기로 했다.
스페인에서 상대할 팀은 우루과이이고 루마니아에선 루마니아 대표팀을 상대하기로 했다.
도라익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만 내려놓고 바로 차 감독을 찾았다.
"라익아, 할 말이 뭔데?"
"감독님, 첼시나 맨유 같은 강팀을 이기려면 제가 뭘 해야죠?"
실점한 건 스토크시티의 측면 수비가 첼시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며 수비 전체가 무너진 탓이다. 득점이 어려웠던 건 스토크시티가 첼시의 중앙을 뚫지 못하면서 측면 공격까지 완전히 죽어버린 탓이다.
즉, 수비도 공격도 무너졌다.
맨유를 상대한 경기는 달랐다. 맨유의 중앙 수비는 첼시처럼 난공불락이 아니었다. 도라익의 활약에 맨유는 수비 인력을 중앙으로 집중했고, 스토크시티는 측면에서 크로스를 간간이 올렸다.
대신 반격이 문제였다. 골 넣을 확률이 훨씬 큰 반격이 도라익이 공을 따지 못하는 바람에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론적으론 쉽지. 첼시를 상대할 땐 무조건 반격 기회를 잡아야 하고, 맨유를 상대할 땐 크로스 기회를 살려야지."
코너킥이나 프리킥 모두 첼시가 절대적 우위다. 찰리가 있을 때도 스토크시티가 첼시한테 밀렸다. 진지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첼시 상대로 스토크시티가 득점하는 그나마 확실한 방법은 반격이다.
맨유 상대로는 찰리가 있을 때도 빠른 반격이 어려웠다. 중앙 수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곤 하나, 수비 진영을 중앙으로 좁히면 도라익도 뚫을 방법이 없다.
그러니 간간이 터지는 크로스로 골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안 됐다.
"그러나 현실적인 조언을 원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네?"
차 감독의 말은 너무 의외였다.
"내가 실수한 것 같구나."
차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널 설득할 때 내가 협회 가는 거랑 대표팀의 월드컵 성적을 얘기한 건."
차 감독은 잠깐 쉬고 말을 이었다.
"그냥 나온 말이야. 사실은 도르트문트나 아틀레티코로 가는 게 네 성장에 제일 좋다고 판단했고, 그걸 전제로 생각하니 대표팀이나 내게도 좋은 일이었던 거야."
"그런데 내가 말주변이 부족해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구나. 대표팀 성적을 위해 네가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니야. 예전처럼 네 플레이만 잘하면 돼."
차 감독은 도라익을 생각해서 도르트문트나 아틀레티코로 가는 걸 원했다. 그런데 도르트문트나 아틀레티코로 가면 뭐가 좋은지 설득하는 과정에 대표팀과 축협 얘기가 나왔고, 서투른 의사 전달 때문에 도라익에겐 마치 대표팀을 위해 바르사나 레알 마드리드로 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차 감독은 자신의 말이 도라익에게 그렇게 큰 영향이 있을 줄 몰랐다. 그저 레알 마드리드 같은 구단에 가더라도 성취감에 취해 더 높이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길 바랐던 것뿐이다.
"희생도 아닌데요 뭘. 받을 돈 다 받고 프리미어리그 뛰는 게 왜 희생이에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넌 좀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차 감독은 월드컵을 위해 이적을 포기한 것과 어린 나이에도 더 나은 선수가 되려고 조급해하는 모습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달랐다.
'좀 더 이기적인 플레이. 동료가 공을 원하면 패스하고, 팀 전술대로 가느라 측면에 기회가 생기면 공을 돌리는 그런 플레이 말고 내 힘으로 해결하는 그런 플레이.'
지난 시즌에 토마슨 박사한테 이기와 이타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덕분에 시즌 후반기에 골을 연신 넣으며 실버 슈즈를 얻었다.
그런데 새 시즌엔 더 강한 자신보다 더 강한 팀을 추구하며 지난 시즌 좋은 모습을 보였던 그 마음가짐을 잊고 지냈다.
'팀의 역량을 최고로 뽑아내는 플레이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게 정답이 아니었어. 전체적으로 우리보다 강한 팀 상대로는 망치보단 송곳이 되는 게 나아.'
완벽한 정답은 아니지만, 도라익은 나름대로 첼시와 맨유를 상대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미 체감하고 있던 거여서 깨달았다고 하기보단 다시금 깨우쳤다는 게 더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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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익이 공을 잡자 루마니아 선수들은 똥구멍까지 힘을 빡 줬다. 사흘 전 우루과이 상대로 3골을 넣은 괴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톡.
공이 고운 포물선을 그리며 루마니아 수비 라인을 부드럽게 넘어갔다. 어느새 달린 이혁신이 공을 잡고 다리를 휘둘렀다.
루마니아 키퍼가 허겁지겁 오른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이혁신의 슈팅은 페이크였다. 마지막 순간에 다리에서 힘을 뺀 이혁신은 공을 자신의 오른쪽, 그러니까 키퍼의 왼쪽으로 밀었다.
패스 주워 먹는 하이에나 제임스의 수제자 오창범이 혀 빼물고 달려와서 골을 주워 먹었다.
- 지난 경기에서 혼자 3골을 독식하는 바람에 도라익 선수가 개인플레이를 너무 하는 게 아닌지 일부 좆문가가 근심과 걱정이 가득 담긴 글을 썼거든요.
- 강 해설, 발음 조심해 주십시오.
- 죄송합니다. 아까 물 마시다가 혀 씹어서 그런지 발음이 이상하게 나갔네요.
- 강 해설은 도라익 선수의 개인플레이를 지지하는 건가요?
- 한국팀의 가장 강력한 전술은 도라익을 선발로 내보내는 것이고 가장 강력한 포맷은 도라익이 포함된 포맷입니다. 사자를 잡으려면 단단한 몽둥이 열 개보다 날카로운 창 한 자루가 더 필요한 법이죠.
- 다른 대표팀 선수들 무시하냐고 채팅창에 항의가 올라왔습니다.
- 전교 일등이 공부 젤 잘한다고 말하는 게 남은 학생 무시하는 겁니까?
- 이러다 또 징계받겠습니다.
강철민이 그냥 팬심에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후반전에 바로 증명되었다. 차 감독은 후반전에 1골 1도움을 기록한 도라익을 김명표로 교체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루마니아 대표팀의 세상이 되었다.
"형, 공을 좀 더 잡고 있어야지. 바로 패스하면 어떡해."
왼쪽 윙으로 출전한 이혁신이 바로 백 패스로 공을 고명준한테 주자 도라익이 중얼거렸다.
"야, 이혁신. 네가 공을 잡고 라인이 더 올라오길 기다려야지. 바로 패스하면 어떡해."
곁에서 듣던 고참 선수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고명준이 협동 수비를 벗겨내지 못해 공을 뺏겨 반격을 당하는 바람에 수비하러 뒤로 뛰던 이혁신이 손은 흔들어 알아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저새낀 맨날 알았대."
"짐 절반이 화장품이어서 반짝하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래도 기특하잖아."
"저놈이랑 창범이가 라익이만큼 열심히 해주면 진짜 16강 갈 거 같은데."
"형, 무슨 소리야. 우리 다 열심히 해야지. 아직 서른도 안 돼가지구 벌써 꼰대 마인드야?"
"그게 다 이 새끼 때문이지. 서른도 안 됐는데 왠지 퇴물이 된 거 같단 말이지."
도라익 주변에 앉은 선배들이 합동해서 도라익의 머리를 헝클어 괴롭혔다.
"장난 좀 그만 쳐. 저녁에 영상 분석할 때 도 감독님 말씀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경기에 집중하게 좀 냅둬."
수석 코치의 지적에 선수들의 장난이 끝났다. 덕분에 도라익은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남은 후반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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