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이터
4월 1일.
도라익이 스토크시티 벤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네티즌은 만우절 조크다 아니다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당연히 만우절 조크 팀이 우위를 점했다. 아니다 팀은 '조크 같은 소리 하네'로 분풀이만 할 뿐, 구체적인 진술을 할 수 없었다.
상황이 뒤집힌 건 도라익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였다.
- 도라익 선수,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격동한 나머지 강철민과 박만호는 1분 동안 침묵했다. 최 PD는 그런 둘을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
- 지난해 6월에 도라익 선수 주치의가 축구 선수로 복귀하는 게 어렵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 균형이 깨져서 자기 몸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는데요. 이제 보니 개소리였습니다.
- 개소리라뇨. 개도 안 할 소리였습니다.
웨스트햄의 벤치 선수 몇 명이 도라익에게 인사를 건넸다. 도라익도 밝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줬다.
- 1월에 도라익 선수를 리그 스쿼드에 넣을 때만 해도 유니폼을 팔기 위한 구단주의 수작이라고 다들 평가했죠.
- 강 해설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몰매를 맞았는데요.
- 선지자의 삶은 늘 고달프죠.
19점으로 리그 꼴찌를 차지한 스토크시티는 4-4-2로 원정팀 웨스트햄을 맞이했다.
키퍼는 페데리치였다. 미켈은 레체르트와 함께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센터백은 줄리엔과 보크스였다. 마르코는 지난 시즌 갑자기 경기력이 급락했고, 이번 시즌 분데스리가로 돌아갔다. 리엄은 은퇴했고 네이선은 벤치에 앉았다.
오른쪽 풀백은 오창범이고 왼쪽 풀백은 맥자넷이었다. 오창범은 현재 5도움, 맥자넷은 7도움을 기록해 팀 공격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다.
미드필드는 루이스와 산체스 그리고 제임스와 토미가 차지했다. 이들 중 토미는 현재 11골로 팀의 골잡이 역할을 했다.
공격수로는 발제르와 우디르가 출전했다. 우디르는 득점보다는 상대 수비진을 허무는 역할을 맡았고, 8골의 발제르가 득점을 책임졌다.
알론소는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으나 구단주의 요청으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알론소의 자리를 대신한 건 테일러였다.
수석코치로 지내다가 윌슨이 자리를 비웠을 때 대리 감독으로 팀을 이끌어 유로파리그 우승을 따낸 바로 그 테일러다.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주장 완장은 루이스 팔에 감겨 있었다.
토미와 산체스는 상황에 따라 중앙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고 양쪽 윙으로 뛰기도 했다.
팀의 전체적인 지휘는 발제르가 맡았다. 발제르의 판단에 따라 선수들은 공격에 집중하기도 하고 수비에 치중하기도 했다.
'균형이 잡혔어.'
벤치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는 도라익의 소감이었다. 토미와 산체스가 중앙과 라인을 오가며 균형을 잡은 덕분에 스토크시티는 리그 꼴찌답지 않게 공격과 수비의 균형이 제대로 잡힌 경기를 운영했다.
도라익이 할 일은 현재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팀의 공격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도라익은 우디르 혹은 발제르를 교체해 출전했을 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전반전을 알차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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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60분.
스토크시티가 실점했다. 페데리치가 미친 듯이 활약하며 상대의 단독 찬스를 5개나 막았으나 페널티킥은 막지 못했다.
상대 다리를 걸어 페널티킥을 만든 보크스가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
"도우, 네이선. 준비해."
센터백 중 보크스가 대인 수비를 가장 잘한다. 그러나 오늘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에게 5번이나 단독 찬스를 주며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그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지 않아도 될 반칙으로 팀의 실점을 초래했다.
- 0:1의 점수로 뒤처진 가운데, 도라익 선수가 1년 10개월 만에 프리미어리그에 출전합니다.
- 도라익 선수는 11번 우디르를 교체하고 네이선 선수가 방금 실책을 범한 보크스 선수를 교체합니다.
선수가 실책을 범했을 때 감독에겐 두 가지 옵션이 있다. 하나는 선수를 계속 경기장에 둬서 자신이 범한 실책을 만회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교체하여 더 상처받지 않게 보호하는 것이다.
감독은 이미 멘탈이 무너진 보크스를 교체해 보호하기로 했다.
- 루이스 선수가 주장 완장을 벗어서 도라익 선수 팔에 감아줍니다.
- 완장 하단에 태극기 문양이 있습니다.
- 루이스 선수는 지난 1년 10개월 동안 늘 태극기 문양이 있는 주장 완장을 찼습니다. 도라익 선수가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기다렸다는 뜻이죠.
교체로 출전한 도라익은 선수들과 일일이 포옹했다.
"도우, 믿어도 되지?"
맥자넷이 말했다.
"믿으면 복이 올 거야."
도라익은 단지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팬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도라익이 팀을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큰 소리로 응원했고, 선수들도 풀리지 않는 공격의 실마리를 도라익이 찾아서 해결하길 바랐다.
- 도라익 선수 첫 터치입니다.
주심의 휘슬과 함께 경기가 재개되었다. 도라익은 센터 써클에 놓인 공을 루이스에게 패스하고 앞으로 달렸다.
카메라 한 대가 도라익의 움직임을 전담으로 좇았다.
- 토미!
공을 잡은 토미가 중거리 패스로 도라익을 찾았다. 공의 궤적을 확인한 도라익은 손을 뻗어 자신을 수비하는 웨스트햄 센터백을 힘껏 밀었다.
도라익보다는 공에 더 집중하던 센터백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밀려났던 센터백이 다시 접근했을 때 도라익이 이미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 해 안정적으로 잡은 후였다. 오른발로 공을 잡은 도라익은 상대 센터백의 바디 체크를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라익이 힘없이 밀려나자 가슴으로 푸시한 센터백은 오히려 놀라서 멈칫했다.
그 틈에 도라익은 몸을 돌려 상대와 얼굴을 맞댔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센터백이 도라익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도라익은 발밑의 공을 좌우로 굴리면서 주변 상황을 체크했다.
마치 동네 마실을 나온 한량과 같은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기회다 싶었던 센터백은 스탠딩 태클로 도라익의 발밑에 있는 공을 파괴하려 했다. 그런데 도라익이 미리 알았다는 듯이 드리블로 태클을 피했다.
태클을 피한 도라익은 짧은 터치로 쓰러진 센터백의 등 뒤로 갔다. 다른 수비수들은 센터백이 일어나길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당장 달려가서 도라익을 수비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도라익은 상대가 고민하는 틈을 타 공을 뒤로 툭 쳤다. 어느새 달려 온 발제르가 달리던 기세를 그대로 실어서 강슛을 날렸다.
슈팅과 동시에 도라익이 문전으로 쇄도했다.
- 골! 골입니다.
- 도라익 선수 복귀전에서 멋진 골에 성공했습니다.
멋진 골은 아니었다.
발제르의 슛을 쳐 내고 급히 일어선 키퍼의 위치가 별로였고, 도라익의 급가속을 수비수 중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치열한 몸싸움이 없었고 화려한 드리블과 가슴 뛰게 하는 돌파도 없었다.
- 아, 세리머니인가요?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도라익을 중간에 놓고 앉았다. 중간에 선 도라익이 오른팔을 높이 든 후 엄지손가락을 빼 들었다.
도라익이 천천히 앉고 다른 선수들이 천천히 일어났다.
I will be back.
세리머니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어섰던 선수들이 다시 앉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도라익이 천천히 일어났다.
Now I'm back.
- 돌아왔습니다. 우리 도라익이 돌아왔어요. 진짜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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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은 리그 9위로 강등 위험은 전혀 없고 유로파리그도 가망이 크지 않은 팀이다. 웨스트햄 감독은 자신들의 심리적 우위를 충분히 이용하기로 했다.
- 웨스트햄이 라인을 깊이 내립니다.
이기고 싶지 않은 팀은 없다. 웨스트햄이라고 1:1에 만족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더 이기고 싶은 팀은 스토크시티다. 그렇기에 웨스트햄은 안 이겨도 괜찮은 척 연기할 수 있었다.
테일러 임시 감독은 웨스트햄이 버스를 세우자 바로 마지막 교체를 진행했다.
찰거머리 리 그레고리가 제임스를 교체하여 출전해서 상대 공격수를 마크하고 줄리엔이 상대 문전에 가서 포워드 역할을 맡았다.
줄리엔의 헤딩이 꽤 위협적이기에 웨스트햄은 양쪽 라인의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자 토미와 산체스가 안으로 좁히면서 중앙의 역량을 강화했다.
웨스트햄이 중앙 수비를 강화했다.
토미와 산체스가 측면으로 가자 웨스트햄은 다시 라인 수비를 강화했다.
이대로는 1:1로 경기가 마무리될 길밖에 없는 듯했다.
"토미, 나랑 바꿔."
보다 못한 도라익이 토미 대신 왼쪽 라인으로 갔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갈등했다.
토미가 왼쪽에 지원했을 땐 한 명이 수비했다. 좋은 크로스를 못 올리게 방해만 하면 되기에 별문제 없었다.
그러나 도라익이 왼쪽으로 간 지금도 한 명이 수비하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예전의 도라익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수비수 한 명을 더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지난 6월에 유럽에서 손꼽는 의사가 더는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선수다.
비록 등장하자마자 골을 넣어 존재감을 터뜨렸지만, 예전의 그 도라익과 똑같이 생각하고 상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의문이 남았다.
- 도라익 선수, 돌파합니다.
잠깐의 고민은 큰 실책이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선수 한 명을 가볍게 제쳤다.
자신을 수비하던 수미를 제친 도라익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쉽게 제쳤다. 수비를 전문으로 하는 센터백이 아니어도 수미면 도라익한테 이렇게 쉽게 돌파당하면 안 되는 거다.
은연중에 상대 선수들이 도라익을 얕보고 있다는 증거다.
미드필더 한 명이 도라익 앞을 막았다. 도라익은 골라인 쪽으로 공을 툭 쳤다.
발제르를 마킹하던 수비수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도라익의 가속을 보고 바로 포기했다.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시무시한 가속 능력이었다.
엄청난 순발력으로 공을 잡은 도라익이 짧은 터치로 공을 치며 발제르를 수비하는 센터백에게 접근했다. 그에 맞춰 발제르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오른발로 공을 발제르한테 밀어줘도 되고, 센터백 가랑이로 공을 빼서 발제르에게 키퍼와 단독으로 대결할 기회를 만들어도 된다.
센터백은 꼼짝도 못 하고 도라익에게 한없이 집중했다.
톡.
센터백의 에상과 달리 도라익은 공을 앞으로 곧게 찔렀다. 어느새 달려 온 토미가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더 망설일 여지가 없이 센터백은 몸을 날려 패스 경로를 차단했다. 먼 포스트에 있는 줄리엔은 물론, 곧 문전으로 쇄도할 발제르로 향하는 패스 경로까지 차단하는 훌륭한 판단이었다.
문제는 도라익이었다.
도라익이 출전하지 않았다면 토미는 요행을 바라고 중앙으로 강한 패스를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도라익의 존재로 토미는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공을 잡은 토미는 일절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뒤로 툭 쳤다. 도라익은 왼발로 공을 터치해 오른쪽으로 살짝 보냈다.
발제르에게 패스해도 되고 줄리엔에게 패스해도 되고, 뒤의 루이스나 산체스에게 패스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다급히 움직여 도라익의 패스 경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골키퍼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도라익은 발제르와 눈을 맞췄다. 도라익의 신호를 받은 발제르는 오른발로 중심을 옮기며 왼 다리에서 힘을 뺐다.
공이 오면 그대로 왼발로 슈팅을 날릴 작정이었다.
둘 사이에 오간 신호를 감지한 키퍼가 무의식적으로 작은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그 순간, 도라익이 슈팅을 때렸다.
인프런트 킥으로 강하게 찬 공은 가까운 포스트를 스치며 골이 되었다.
"으아아!"
골을 넣은 도라익이 미친 듯이 뛰었다.
원래는 패스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슛을 때리고 말았다. 오늘 골을 넣더라도 차분하게 세리머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경기장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데 지금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다.
그런 자신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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