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1위
2031년 1월 9일.
한국의 포털 사이트와 게시판들이 시끌시끌했다.
[박창식 대체 선수 도라익은 누구?]
[교체 선수 명단에 이름 올린 18번 도라익의 소속은?]
[속보 - 도라익 선수는 내일 만 16세에 무소속.]
'도라익'이 '한국 vs 일본'을 제치고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발표한 명단에 18번 도라익이 이름을 올린 탓이다. 하루 전까지 대체 선수를 찾다가 어쩔 수 없이 도라익으로 정했고, 차 감독이 파격적으로 교체 명단에 넣은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축협이 몽니를 부려 대표팀 관련 기사가 적게 나가도록 조치했으나, 도라익의 등장으로 언론들이 미쳐 날뛰었다.
온 국민이 도라익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상황에 기사를 안 쓰면 자기만 손해다.
[축구계 원로 - 차 감독의 일탈은 경질 가능한 중대 실책.]
[반드시 이겨야 하는 한일전, 이대로 포기하나.]
[빠져나갈 구멍? 도라익이 교체 명단에 포함된 이유.]
[강호민 선수, 국가가 부른다면 진통제 맞고 뛰었을 것.]
물론, 축협과 가깝게 지내는 언론들은 도라익의 합류로 차 감독을 열심히 깠다. 차 감독이 아니라 차돌이어도 가루가 날 수밖에 없도록 전방위적으로 꼼꼼하게.
역대 최약체 대표팀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국민의 관심이 시들했는데 한일전이라는 휘발유와 도라익이라는 선풍기가 등장했다. 경기 시간이 다가올수록 도라익이 궁금한 사람들이 인터넷을 마구 헤집었다.
└ 축협 고위층 중에 도씨 있는지 아는 사람.
└ 부정 입학, 부정 취업에 이어 부정 선발이야?
└ 4강 진출로 웅장해졌던 가슴이 쪼그라든다.
└ 한국 축구는 총체적 난국이다.
└ 축병신들, 그니까 야구나 봐.
응원하는 댓글도 없진 않지만, 품을 꽤 들여 찾아봐야 할 정도로 희귀했다.
- 한국과 세계 각지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쿄 올림픽 구장에서 인사드립니다. 해설에 강철민.
- 해설 도움 박만호입니다.
이란과 벌인 8강전에서 해설 도중 욕설을 퍼부은 바람에 벌금 2백만 원을 한 해설이 바로 강철민이다.
엄한 놈 곁에 있다가 같이 벼락 맞는다고, 박만호 역시 50만 원의 벌금이 물렸다.
- 원래는 출전 명단을 소개하고 상대 포메이션을 분석하고 그래야 하는데, 시청률에 눈이 먼 최 PD가 도라익 위주로 진행하라고 갑질했습니다.
- 최 PD가 대학 후배 아닙니까?
- 목구멍이 포도청이죠. 사석에서도 제가 형이라고 부릅니다.
중계 스튜디오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 자, 농담은 여기까지. 우선 도라익 선수 프로필을 읊겠습니다.
최 PD는 쭉쭉 올라가는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정확한 데이터는 아니지만, 시청률 변화 추이는 대체로 실제와 비슷하다.
- 2015년 1월 10일 출생. 내일이면 만 16세입니다.
- 키 185센티에 몸무게는 83.4킬로그램.
- 여기까진 인터넷 뉴스만 찾아봐도 다 나오는 거죠.
- 이제부턴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서 겨우 얻은 대표팀 내부 자료 최초 단독 공개입니다.
- 광고 안 보고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최 PD는 모니터 안의 두 해설한테 쌍 따봉을 날렸다. 엿새 전 욕설 파문으로 최 PD도 50만 원 벌금 했지만, 덕분에 오늘 시청률은 시작부터 평소보다 1.2% 높게 들어갔다.
- 제자리멀리뛰기 3.43미터.
-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죠?
- 길 가다가 처음 보는 사람 잡고 막 자랑해도 됩니다.
- 그런데 축구하고 큰 관계가 없는 듯한데요.
-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피지컬을 가늠할 때 쓰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 제자리높이뛰기 116센티.
- 이건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하네요.
- 여기에 키 185을 합치면 3미터에 육박하죠?
- 헤딩할 때 참 유리하겠네요.
- 그리고 100미터를 10초9에 달립니다.
- 와. 제가 60미터 달릴 때 100미터 달린다는 소리군요.
- 강 해설이 100미터 달릴 때 도라익 선수는 왕복한다는 거죠.
-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선수가 무소속이라고요?
-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독일과 영국에서 열 개가 넘은 구단이 도라익 선수와 접촉했고 계약 의사를 내비쳤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오라는 데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든 것이겠죠?
- 이번 국가대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어 도라익 선수가 하루빨리 유럽 리그를 누볐으면 좋겠습니다.
- 영국과 독일은 세계 랭킹 1, 2위를 차지한 빅리그입니다. 그리고 16세부터 프로 계약이 가능한 리그죠.
- 독일은 예전에 18세부터 프로 계약 가능하고 영국은 17세부터였죠?
- 그렇습니다. 리그 경쟁력을 높이려고 최근 많은 조치를 했는데요. 계약 연령을 낮춘 게 그중 하나입니다.
- 내일부로 도라익 선수는 유스 계약이 아닌 프로 계약을 맺을 수 있겠군요.
- 오늘 도라익 선수의 출전 가능성은 어떻게 점치십니까?
- 희박하다고 보지만, 개인적으로 꼭 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 도라익 선수가 출전하면 대표팀 최연소 출전 기록이 깨지죠?
- 최연소 출전, 최연소 교체 출전 기록이 깨집니다. 그리고 AFC 아시안컵 최연소 출전 기록도 깨지고요.
-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에서 15세 292일 선수가 국가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어서 세계 기록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 도라익 선수를 대체 선수로 선택한 이유가 포워드 위치에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죠.
- 현재 김명표 선수가 선발인데 차 감독이 원하는 빠른 포워드와는 거리가 멉니다.
- 몸싸움은 박창식 선수보다 낫다는 평가지만, 속도는 느린 편이죠.
- 그럼 수미 한 명 줄이고 두 톱으로 출전시키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 두 선수의 호흡도 문제고, 급작스러운 포메이션 변경으로 팀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원래 전술을 밀고 나가야 합니다.
- 요즘은 죽도 엄청 맛있게 나오죠? 심지어 밥보다 비싸고요.
- 그렇습니다. 차 감독이 선수들을 잘 다독여 오늘 맛난 죽 한 번 끓였으면 좋겠습니다.
- 말씀드리는 순간. 교체 선수 입장합니다. 일본 생중계 감독이 도라익 얼굴을 단독으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 굉장히 신난 얼굴입니다.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네요.
- 선수와 코치들과 장난도 치는데요. 강심장으로 보입니다.
- 저런 배짱이면 뭘 해도 크게 될 겁니다. 도라익 선수, 응원할게요.
교체 선수와 감독 코치들이 벤치에 자리를 정해 앉았다. 도라익은 뒷줄 중간 자리를 배치받았다. 양쪽 좌석은 감독과 코치 그리고 팀닥터가 차지했다.
곧 양 팀 주전이 입장하고 국가 연주 차례가 왔다.
그리고 사고가 터졌다.
- 원래 국가 연주할 땐 정숙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그런데 이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네. 지금 저희 해설석 맞은편에 전범기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일본 국가를 연주하는 중이 아니고 한국 국가를 연주하는 중에 말이죠.
- 차 감독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죠.
- 보안 요원들이 전범기를 치우고 관련자들을 추방했습니다.
- 저런 경우엔 어떤 처벌을 받습니까?
- 법적으론 처벌을 안 받습니다. 대신 해당 구장에서 블랙리스트로 올려 일정 기간 출입을 금지하는 게 관례입니다.
- 오늘 일본이 이기더라도 결승 경기를 현장에서 못 보겠군요.
- 추방당한 사람들이 아쉽지 않도록 대표팀이 오늘 경기 꼭 이겼으면 합니다.
관중석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한국 관중들은 괜히 욕하다가 함께 추방당할 것 같아 참아야 했고, 일본 관중들도 난데없는 소란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반대로 그라운드의 한국 선수들은 격렬하게 불탔다. 아슬아슬하게 이겨도 욕먹는 한일전인데 전범기의 등장이 불을 제대로 질렀다.
"골키퍼가 키가 작네요?"
오창범은 새삼스럽게 말하는 도라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리 프로필 확인 안 했어?"
"키도 작고 팔도 조금 짧아요."
일본 골키퍼는 키가 도라익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팔이 키에 비해 짧은 편이었다.
"팔이 짧으면 어떤 약점이 있지?"
"높은 공에 약해요. 바닥으로 오는 공을 처리하는 게 힘겨워서 자세를 팔이 긴 키퍼보다 더 낮추죠. 그래서 오히려 높고 빠른 공에 실점을 자주 해요."
"그럼 어떻게 대표팀 주전이 됐을까?"
"다른 장점이 있겠죠. 약점은 수비수들이 잘 보완해주고."
오창범은 도라익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네가 축구만큼 공부에 머리를 썼으면 서울대 씹어 먹었겠는데."
"형도 말하는 시간 아껴 훈련했으면 벌써 주전인데."
"이게 감히 하늘 같은 선배를 놀려?"
오창범이 헤드록을 걸고 턱을 도라익의 머리에 세게 비볐다.
삑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오창범도 도라익도 장난을 멈추고 경기에 집중했다.
차 감독은 평소와 달리 경기 초반부터 고함을 지르며 적극적으로 지휘했다. 박창식의 부재로 반격 속도를 잃은 한국을 패스워크가 우위인 일본이 골대 앞 30미터 안에 몰아넣고 압박했다.
어렵게 공을 뺏아 김명표한테 전달해도 빠른 반격은 어림도 없었다.
경기는 내내 일본 페이스로 흘렀다.
- 아, 안타깝습니다.
- 유럽 심판이면 페널티킥 판정을 안 내렸을 겁니다.
- 이번 경기에 이란 심판을 배정한 위원회의 결정이 아쉽네요.
규정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8강전 상대였던 이란 출신의 심판을 이번 경기에 안배한 건 뒷말이 안 나올 수 없는 결정이다.
전반 44분에 일본이 페널티킥을 통해 세 번째 골을 넣었다.
심기일전한 한국팀이 마지막 맹공격을 펼쳤다. 왼쪽 풀백이 드리블로 돌파한 후 크로스를 곱게 올렸다.
- 반칙! 일본의 반칙입니다!
키퍼와 경합하던 김명표가 팔꿈치에 맞아 쓰러졌다.
- 심판 미쳤네. 이게 페널티킥이 아니라고?
주심은 골키퍼한테 옐로카드를 제시한 후 페널티킥 박스 안 간접 프리킥을 선언했다. 한국 선수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VAR마저 주심 편을 들어줬다.
- 작가의말
점프할 때 다리를 굽히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머리가 3미터까지 닿는 건 아닙니다. 115cm를 점프하면 머리가 250cm까지 가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도움닫기를 하는 상황이라면 290cm까지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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