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one two birds
주심은 바로 가슴 주머니에서 레드카드를 꺼내며 달려갔다. 그러다 휘슬을 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반대 손으로 가슴께를 더듬었다.
스토크시티 팀 닥터는 주심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그라운드로 달렸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뛰다 보니 발이 엉키며 벌러덩 넘어졌다.
그때.
도라익이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렸다. 주장의 멍청한 파울에 욕설을 퍼붓던 포츠머스 키퍼가 황급히 달려 나왔다.
먼저 도착한 도라익이 골라인 쪽으로 공을 짧게 쳤다. 급하게 속도를 줄인 골키퍼가 자세를 낮추며 도라익의 다음 터치를 기다렸다.
도라익은 왼발로 플립플랩을 펼쳤다. 아웃사이드로 공을 골라인 쪽으로 미는 척하다가 인사이드로 뒤로 꺾었다. 그리고 바로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툭 쳐서 중앙으로 보냈다.
동시에 몸을 틀어 공을 따라 달리던 도라익이 키퍼가 공을 건드리려고 휘저은 팔에 걸려 또 넘어졌다. 키퍼는 당황한 얼굴로 고의가 아니라며 길쭉한 검지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주심은 자비를 몰랐다. 휘슬을 높게 분 주심은 주장인 센터백과 포츠머스의 키퍼한테 레드카드를 한 장씩 줘서 함께 쫓아냈다.
"도우. 내 말 들려?"
"코너킥 상황엔 몸싸움을 피하고 캠벨 주변에 숨는다. 크로스 상황엔 무조건 상대보다 먼저 점프한다. 상대 센터백이 공을 잡았을 땐 가까운 풀백한테 패스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하늘을 보며 도라익이 감독의 지시를 웅얼거렸다. 영어와 한국어가 마구 섞여서 누가 봐도 헛소리하는 것이었다.
"우웩."
갑자기 도라익이 헛구역질을 하자 팀닥터가 몸으로 꾹 눌렀다. 간이 수송차가 들어와 담가에 도라익을 실은 후 느리게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어느새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가 담가를 옮겨 싣고 바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찰리 아담. 몸 풀어."
윌슨은 부상에서 갓 복귀한 찰리 아담에게 워밍업을 지시한 후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이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결승에 진출하지 못하면 난 더는 감독 행세를 할 자신이 없다."
윌슨이 단단히 굳힌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찰리 아담과 캠벨 투톱이다. 제임스와 톰 인스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로 간다. 주요 공격 수단은 크로스와 미드필더의 원거리 슛이다. 상대 반격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껏 크로스를 올리고 마음껏 슈팅해라."
"저희가 헤딩하러 가도 될까요?"
스토크시티의 두 센터백이 질문했다. 키 191의 대니 밧스와 193의 리엄 린드세이는 느린 센터백이다. 어차피 상대 반격을 막기엔 부족하니 차라리 페널티킥 에어리어로 가서 압박하는 게 낫다.
"상의해서 둘 중 하나만 가."
도라익이 실려 가고도 2분 정도 지나서야 경기가 재개됐다. 포츠머스는 두 윙을 내리고 키퍼와 센터백 한 명을 넣은 채 수비에만 전념했다.
스토크시티는 오버래핑이 극히 드문 두 풀백까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며 9인으로 힘겹게 저항하는 포츠머스의 골대를 폭격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라익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응? 오늘 경기하는 날인데?"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도라익의 몸은 탄력 밴드로 침대에 고정됐다.
"선생님, 환자 깼습니다."
"뇌진탕 환자 앞에서 고함을 지르다니. 언제 철들래?"
간호사를 책망하며 다가온 의사는 도라익의 눈꺼풀을 뒤집고 강한 후레시를 비췄다. 그리고 도라익의 이름과 거주지와 나이 등을 묻고,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제가 납치된 거죠?"
"납치 아니고 입원입니다."
"미안해요. 입원이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경기는 기억나나요?"
도라익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오늘 경기 벌써 시작했어요?"
"끝났습니다. 스토크시티가 4:0으로 이겼습니다. 위대한 승리입니다."
"내가 여기에 묶인 게 경기랑 상관이 있습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당신은 경기중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제 책임인가요?"
"그렇다면 상대방이 두 명이나 퇴장당하진 않았겠죠?"
"말을 어렵게 하시네요."
도라익이 툴툴거리자 의사가 즐겁게 웃었다.
"지각은 다 회복한 것 같아요. 그래도 병원에 며칠 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분간 식사와 대소변 볼 때를 제외하면 이것들로 몸을 고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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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도라익은 탄력 밴드를 제거하고 산책까지 허락받았다. 이미 두 번의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고 판정받았지만, 조심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검사해야 퇴원을 허락한다고 했다.
'내일 리버풀이랑 경기하는데.'
1월 31일 원정에서 리버풀과 경기한다.
환자복 위에 패딩을 껴입은 도라익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비록 시즌 초반에 엉망인 모습을 보였지만, 리빌딩에 성공하며 점점 무서운 모습을 회복하는 리버풀이다.
도라익이 제일 좋아하는 팀 중 하나이기도 해 꼭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경미한 뇌진탕 때문에 놓치게 되었다.
"하이. 사인 하나 해줄 수 있어?"
그때 머리에 비니를 쓴 꼬마가 다가와서 종이와 펜을 수줍게 내밀었다. 아이답게 피부는 매끈했지만, 왠지 수척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너 나 알아?"
"알아. 18번이고 스트라이커잖아. 골 넣는 거 백 번 봤어."
양손을 꼭 맞잡은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라익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름이?"
"잭. 엄마아빠는 날 잭이라고 불러."
"그럼 잭 이름을 한글로 써줄게."
잭의 스펠링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은 도라익이 기지를 발휘했다.
"그래? 신기하다."
[잭, 내 팬이라서 정말 고맙다.]
[도라익 No.1 사인.]
"진짜야? 내가 진짜 첫 사인을 받은 팬이야?"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영국 팬들은 굉장히 열정적일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훈련장에서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선수들의 훈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훈련장을 찾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도라익은 다른 선수보다 훨씬 일찍 훈련장으로 가고, 훈련이 끝난 뒤에도 전술 공부를 하느라 늦게 떠난다.
해트트릭을 한 경기는 하필 원정이었고, 팬들도 피곤한 선수들을 배려하여 사인을 요구하지 않았다.
도쿄에 있을 땐 어린 선수 멘탈이 흔들릴까 봐 감독과 코치들이 엄중히 보호한 덕분에 팬과 접촉한 적이 없었다.
"도우. 해트트릭 두 번 했으니 집에 공이 두 개 있겠네?"
"아니. 하나야. 다른 공은 한국에 보냈어."
"왜 안 갖고 왔어?"
"엄마한테 내가 그리우면 그걸 보라고 줬어."
"나도 엄마아빠가 그리울 때 내가 생각나는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어."
"넌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 나만큼 크면 그때부터 준비해."
잭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까지 살기 어려울 거야."
"안 어려워."
아이의 무기력한 말에 가슴이 덜컹하며 넷째 동생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적 고열로 며칠이나 혼수상태로 쓰러졌던 동생이다. 다행히 깨어났고 건강도 회복했지만, 후유증으로 가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때 계속 울던 엄마가 생각나선지 가슴이 찌르르 저렸다.
도라익은 잭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뉴캐슬 상대로 해트트릭했어. 하나도 안 어려웠어.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너도 쉽게 이길 거야."
"진짜?"
"응. 잭은 착하고 강하니까 꼭 이길 거야."
"그럼 도우는 우리 팀을 데리고 우승할 수 있어?"
말문이 턱 막혔다. 이미 역사가 170년 가까이 되는 팀이다. 약 60년 전에 리그컵 결승에서 첼시한테 2:1로 승리한 게 팀 역사상 유일한 우승 경력이다.
"좋아. 그럼 내가 팀 데리고 우승하면 잭도 낫는 거야. 약속할까?"
"좋아. 약속 안 지키면 귀뚜라미."
잭은 간호사가 데리러 올 때까지 스마트폰으로 그간 모은 도라익의 영상과 사진을 자랑했다. 덕분에 도라익은 3주 전에 있었던 경기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산책 시간이 끝나 병실로 돌아간 도라익은 그새 친해진 목청 큰 간호사와 대화를 나눴다.
"여긴 무슨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에요?"
"종합병원이야. 유명한 건 뇌하고 소아암이지."
"소아암이요?"
"아이들이 걸리는 암이야. 90% 이상의 완치율을 보이긴 하지만, 그건 치료를 꾸준히 받았을 때 얘기야. 치료비가 부족한 환자는 어느 정도 나아지면 치료를 그만두거든. 안 그럼 가정 경제가 무너지니까. "
"치료비가 많이 들어요?"
"경우에 따라 다른데, 적으면 20만 파운드고 많으면 50만 파운드 정도야."
"내일 경기 생중계 볼 수 있나요?"
"내일 오전 검사 결과가 잘 나오면 펍에 가서 봐도 돼. 아, 도우는 펍 출입할 수 없지?"
"네. 술도 안 마셔요."
이튿날 오전. 검사로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은 도라익은 퇴원 수속을 밟았다. 떠나기 전에 새로 사귄 꼬마 친구와 작별하려고 했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잭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애칭 같은 거여서 그것만으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도라익을 태운 최경호는 느리게 운전했다.
"라익아. 지금 슬슬 광고하자고 몰려드는데 다 거절했다."
"왜?"
"왜긴. 지금 하면 돈을 적게 받아야 하니까 그러지. 그리고 너도 당분간 축구에만 전념하기로 했잖아."
"가능성을 보고 높게 부르는 회사는 없어?"
"없어. 네가 좋은 이미지를 구축해야 회사들이 비싼 값을 부르는 거야."
"이미지 구축은 어떻게 하는 거야?"
"아시아에서 일본 시장은 무시하기 힘들어. 근데 네가 독도는 우리 땅 이러니까 몸값 떨어지잖아."
"그럼 내가 사과하면 돼?"
"사과는 무슨. 근데 왜 갑자기 돈독이 올랐어?"
- 작가의말
아쉽게도 마라도나나 천마는 오지 않았지만, 대신 레드카드 두 장 소환하는 마술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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