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9월에는 A매치 데이가 있어 약 보름에 가까운 휴식기가 있다.
6월에도 쉬지 않고 코어 단련에 매진했던 도라익이건만, 주장이 되면서 느낀 정신적 피로로 하루 휴식을 결정했다.
"도우는 왜 경기하러 안 가?"
도라익은 산체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와 함께 보육원으로 봉사하러 갔다. 6월 말부터 산체스의 권유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진심으로 자신을 반겨주는 순진무구한 아이들 덕분에 많은 힐링을 받았다.
도라익은 켄으로 불리는 흑인 꼬마와 함께 공원 의자에 앉아 대화했다.
"나 국제경기 출장 정지 처분받았어. 다음 해 1월까지 유효해."
"왜 처벌받았는데?"
"경기 끝나고 노래했거든."
"바지 벗고 노래했어?"
끅끅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참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런 웃음.
"아니. 몰랐는데 그 노래가 정치색이 있대."
"근데 도우 진짜 내 아빠 아니야?"
"응. 넌 8살이고 난 16살이야. 임신 기간까지 따지면 7살에 널 만들었다는 건데, 그건 과학적으로 불가능해."
"도우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쿵 소리가 났다. 웃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흘렸지만, 무거운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도라익도 더는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청바지에 점박이 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여자가 바닥에 엎드려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여자는 얼굴을 감쌌던 손 하나를 빼서 뒤로 뻗은 후 좌우로 흔들었다.
"부축해 드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킨 여자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러나 여전히 웃는 입꼬리나 슬픈 기색이 전혀 없는 얼굴에서 유추하건대, 너무 웃다가 짜여 나온 눈물이 분명하다.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엿들었네요."
말을 마친 여자가 또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었다. 도라익은 머리에 꽃 하나 꽂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기에 비까지 내려주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도우, 당신 팬이에요."
겨우 웃음을 멈춘 여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도라익은 가늘고 흰 손을 살짝 잡았다가 바로 놨다.
"사인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그런데 펜이 없어요."
"괜찮아요. 저는 펜과 종이를 늘 갖고 다녀요."
여자가 가방에서 꺼낸 건 그냥 펜이 아니라 사인펜이었다. 그리고 가죽 커버가 멋진 노트를 꺼내 마지막 장에 사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름이?"
"엘사. 그냥 엘이라고 하면 돼요."
"이름은 한글로 써드릴게요."
[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자기 이름과 날짜까지 쓴 도라익은 펜과 노트를 여자한테 돌려줬다. 노트를 확인한 여자는 도라익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참 말을 망설였다.
"사진도 됩니다."
여자가 또 배를 그러안고 깔깔 웃었다. 도라익은 여자의 시선이 떠난 사이 조심스럽게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정신 질환이 전염성이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방심할 수도 없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패션모델 엘사라고 해요. 참고로 17살이랍니다."
"네, 반갑습니다. 도라익입니다."
"또 만났으면 좋겠어요."
"아 네."
도라익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여자는 또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도라익은 엘의 배꼽 근처에 웃음 벨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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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데도 경기를 해?"
도라익의 질문에 제임스가 큭큭거렸다.
"비가 오는데 왜 경기를 안 해?"
도라익은 우천 시 취소를 설명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야구랑 축구는 다른 스포츠니 당연히 우천에 대한 대응도 다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도우 너 처음 우중에서 경기하는 거야?"
"응."
"와. 영국에서 반 시즌이나 뛰었는데 오늘이 처음이라고? 운 더럽게 좋네."
이제부터 많이 경험할 거라며 제임스가 악담을 퍼부었다.
"도우, 레인 슈즈를 신어."
평소랑 똑같은 신발을 꺼내는 도라익한테 찰리가 조언했다.
"응?"
"그 주황색 슈즈 신으라고."
경기용 축구화는 세 개가 한 세트다. 스터드가 짧은 축구화, 잔디 길이가 길 때 사용하는 스터드 긴 축구화, 미끄럼 방지 스터드가 있는 우천용 축구화.
테크닉이 좋은 선수 대부분은 스터드가 짧은 축구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육체파일수록 스터드가 긴 축구화를 선호한다.
우천용 축구화는 새로 나온 품종이다. 원래는 풀이 길거나 비로 바닥이 미끄러우면 스터드가 긴 축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스터드가 긴 축구화는 발의 피로도를 높여 섬세한 볼 터치가 필요한 선수들이 자기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잔디가 짧으면서 미끄러운 경우를 대비하여 우천용 축구화를 새로 개발했다.
프리미어리그는 긴 잔디를 허용하지 않기에 비가 오면 우천용 축구화를 신는 게 맞다. 다른 리그는 잔디 상황을 살펴 스터드가 긴 축구화를 신을지 우천용을 신을지 판단해야 한다.
표면에 빗물이 안 맺히게 특수 처리까지 하여 마찰력이 주는 일도 없고, 스터드가 평소 신던 것보다 조금 길긴 하나 크게 불편하진 않다.
찰리의 친절한 설명으로 상식 하나 챙긴 도라익은 주황색을 신었다.
"미켈. 비가 올 때 어떤 공이 수비하기 힘들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오는 슛, 그리고 땅볼. 마찰력이 작아서 공이 평소보다 빠르거든. 늘 집중하지 않으면 별 어렵지 않은 공에 실점할 수 있어."
"수비수들, 땅볼 슈팅을 최대한 제한해. 그리고 공격수들은 어떤 실수를 자주 하는지 레체르트가 말해 봐."
"음, 그게."
레체르트는 조금 길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신발도 공에도 방수 코팅이 되어 있어 터치할 때 감촉은 크게 다르지 않아. 단 바닥이 미끄러운 정도가 다 달라서 드리블할 때 공이 길거나 짧은 경우가 많아. 그런데 이건 수비수도 마찬가지야. 상대가 찬 공이 어디까지 올지 판단이 어려우니까 공 뺏으러 달려갈지 뒤로 물러나며 더 지켜볼지 결정할 수 없어."
"그러니까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우리가 불리하다는 거네? 최대한 드리블을 자제하고 패스는 속도보다 정확도를 신경 쓴다. 상대의 공 잡은 선수를 수비할 때 반드시 뒤에 백업 한 명이 붙어서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걸 방지한다."
도라익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선수는 유스 때부터 배워서 아는 지식이지만, 주장이 이렇게 직접 말해주면 그 효과가 남다르다.
그리고 처음 듣는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제임스를 보면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게 참 잘한 일이다.
- 경기 시작합니다.
- 오늘 원정팀은 미들즈브러입니다. 지난 시즌 도라익 선수가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승리를 챙긴 상대죠.
- 당시 미들즈브러는 부상과 카드 결장으로 주전 여럿이 이탈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경기에선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전력으로 출전했죠. 그러나 스토크시티의 진영 역시 보강되었고 그때 없었던 찰리 아담 선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미들즈브러가 스토크시티보다 강하다. 지난 시즌 12승 10무의 성적으로 중위권을 차지했고, 현재도 7점으로 리그 11위에 랭크됐다.
비록 승리한 두 상대가 하위권 팀이라곤 하지만, 미들즈브러가 객관적으로 스토크시티보다 강팀인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스토크시티가 훨씬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오늘 경기에선 쇠렌센 대신 루이스가 선발로 출전했다. 미들즈브러는 전통적으로 공격 속도가 느린 편이고, 오늘 경기에서 활동 범위가 넓은 톰 미켈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수비 라인을 올리는 전술을 사용하기에 쇠렌센보다는 루이스가 훨씬 적합했다.
- 쇠렌센 선수가 없는데도 큰 이질감이 안 느껴지죠?
- 루이스 선수가 어느 정도 자기 역할에 적응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스토크시티의 팀 전술이 보완됐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양쪽 윙백과 루이스가 남긴 공백은 타이먼이 늘 적절하게 메꿨다. 운동선수치고 속도도 느리고 키도 178밖에 안 되지만, 타이먼은 반격을 꿈꾸는 미들즈브러의 악몽이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악몽은 따로 있었다.
- 도라익 선수 드리블로 수비수 세 명을 연속 제칩니다.
- 리버풀과 벌인 경기 후반전부터 개인 돌파가 부쩍 늘었는데요.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라익이 공을 다루는 기술은 지난 시즌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며 상대 리듬을 깨는 것으로 쉽게 수비를 벗겨내고 포위망을 뚫었다.
- 도라익 선수 공을 띄웁니다.
- 키퍼가 달려 나가죠.
- 찰리 아담 선수와 수비수도 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 골, 골입니다. 찰리 아담이 헤딩에 성공했습니다.
의료진이 급하게 투입됐다. 공만 보고 달리던 키퍼와 수비수가 심하게 충돌한 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심의 동의를 구한 스토크시티 의료진도 재빨리 달려가서 미들즈브러 선수의 상황을 살폈다.
"저거 뭐야?"
"기절하면서 혀가 기도를 막은 거야. 말린 혀를 펴서 숨 쉬게 하는 거지."
세리머니를 하다가 멈춘 스토크시티 선수들도 마음을 졸이며 지켜봤다. 경기 상대긴 하지만, 아무도 부상을 바라지 않는다.
말린 혀를 펴자 키퍼는 바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약 5분 가까이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키퍼는 결국 경기를 계속 뛸 컨디션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전반전에 교체되었다.
키퍼 부상으로 기세가 확 꺾인 원정팀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스토크시티는 도라익의 1도움과 찰리의 2골에 힘입어 3:0의 점수로 2연승을 달성했다.
- 작가의말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주장 완장을 단 후에야 기초 상식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한 도라익. 그런 도라익이 너무 무식하게 보이지 않도록 받쳐주는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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